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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붕붕 Aug 08. 2021

등산의 미학

어차피 내려오지만 그래도 올라간다

어제 오랜만에 등산을 다녀왔다. 요즘 계속 집에만 있어 몸이 찌뿌둥하기도 했고, 마지막 등산으로부터 벌써 한 달 반이나 지나있어 '등산 리듬'을 되찾을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무더위와 습도, 폭우의 컬래버레이션은 별 세 개짜리 800m대의 중급 난이도인 산을 순식간에 별 네 개짜리 상급 난이도로 만들어버렸고, 불어난 계곡물로 인해 순식간에 난코스로 변한 하산길은 30분이면 될 2km를 1시간 넘게 걸리게 만들었다. 덕분에 저녁 6-7시 정도에 하산할 거라던 예상은 가볍게 빗나가고 선두가 7시 반, 후발대가 밤 10시에 내려와 새벽 2시에 집에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샤워, 짐 정리, 땀에 절은 옷까지 세탁하니 새벽 3시 반. 그제야 지친 몸을 침대에 뉘어 겨우 잘 수 있었지만, 아침 8시 반이 되니 생체 리듬은 피곤하거나 말거나 여느 때와 같이 일어날 시간이라며 어김없이 활동을 시작했다.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딜 때 찌릿-하게 느껴지는 어제의 발가락 통증과,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의 허벅지 근육이 어디에 있는지 느끼게 해주는 근육통. 오랜만에 느껴지는 등산 후 통증들이 내심 반가웠다.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


어렸을 때부터 나는 등산을 무지 싫어했다. 그냥 싫어했다 정도가 아니고 요즘 표현으로 치자면 거의 '혐오' 수준이어서 항상 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러던 내가 등산을 한다고 하자 우리 가족부터 옛 친구들까지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저 말을 한 번씩은 언급한 걸 보면 아마 수백 번도 넘게 말했나 보다.


"네가 등산을 한다고? 너 어렸을 때 분명히...."
"누나가 등산을?? 진짜로?"
"살다 보니 네가 등산하는 걸 보게 되네?"
"삼십 대에 사람이 이렇게 바뀌기도 하는구나."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느끼고 싶어서

시작의 계기는 아주 평범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친구 따라갔다가' 시작하게 된 경우인데, 한국 같았으면 아마 안 갔을지도 모른다. 등산 말고 다른 걸 하면 되니까. 그런데 중국에 와서 친구도 별로 없을 무렵(물론 지금도 친구는 없지만) 몇 안 되는 친구들이 산에 간다길래 너무나도 심심한 나머지 '나도 갈래!'를 외쳤다. 땀을 뻘뻘 흘리며 당장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올라간 정상에서 예상치 못한 '만족감'을 만났다. '나도 할 수 있구나'라는 거. 그때의 나는 아직 실패의 자괴감과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는 자기 의심에 빠질 때가 많았는데, '내가 이걸 해내다니!'가 된 거다.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도 할 수 있다'를 느끼고 싶어서, 마치 중독이라도 된 사람처럼 산에 다니기 시작한 게. 


그리고, 산에서 만난 정(情)

막 등산을 시작했을 때. 산에서 생판 모르는 나에게 단지 지금 옆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간식을 건네는 사람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함께 땀 흘리며 힘든 오르막을 올라와서일까. 서로 싸온 간식을 건네고, 힘들어 잠시 멈추고 있으면 힘내라고 진심 어린 응원을 건네는 것. 국적에 상관없이 산을 오르며 이야기하다가 친구가 되는 것. 이것이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이 아닐까. 

빨리 와서 먹으라며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꺼내던 아저씨들 덕분에 산에서 포식한 날. 육해공이 골고루 다 있다.


그래서 나도 이젠 산에 갈 때 옆에 앉을 누군가의 간식을 조금 준비한다. 처음엔 건네는 것조차 부끄럽고 몇 번을 망설였다. (사실 망설이다가 건네지 못한 적도 있다.) '안 먹는다고 하면 어떡하지?', '가뜩이나 말도 잘 안 통하는데 뭐라고 말하면서 건네야 하지?' 등등. 누군가에게 먼저 권하거나 건네는 걸 해본 적이 없어서 힘들었지만 용기 내어 한 번 해보니 별 거 아니었고, 고맙게 받던 나와 상대방의 마음이 똑같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간식을 건넬 때 별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손으로 건네고 눈빛으로 말하면 끝. 그러고 나서 '먹을래?' 중국어 한 마디면 완성!)


아름다운 자연은 덤

산 위에서 보는 경치는 특별하다. 여긴 바다를 보기 어려운 지역이라 그런지, 간혹 바다가 보이는 산에 올라가면 감탄을 금할 수 없다. 파란 바다와 대비되는 청량한 하늘 속 하얀 구름들과 초록빛 녹음綠陰의 조화는 어떤 수식어를 갖다 붙여도 과하지 않을 만큼 절경이다. 산 위에 올라가야만 한눈에 들어오는 멋진 지형 또한 정상 등반이 주는 선물. 

산과 바다, 하늘과 구름까지 멋졌던 어느 여름날.
정상에 올라오니 한눈에 들어오는 아기자기한 봉우리들. 


처음엔 정상에서의 경치만 눈에 들어왔는데 등산을 시작한 지 일 년이 조금 더 지난 지금은 산 길에서 작은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어젠 길가에 간간히 피어있던 있던 분홍빛 꽃이 어찌나 예쁘던지. 겨울산에서 만났던 눈꽃과 봄에 만났던 이름 모를 붉은빛 열매, 어느 날 바닥에 떨어져있던 고운 빛깔의 나뭇잎들도 잊을 수 없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고운 빛깔의 나뭇잎들.


그래서 내려오지만 또 올라갑니다.

등산을 하면 할수록 우리 삶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오고, 내려와야 다음에 다시 올라갈 수 있다. 힘들어서 혼자 힘으론 더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힘내서 함께 올라가자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옆에 있다. 숨이 꺽꺽 차올라 이쯤 포기할까 싶을 때, 한 번만 더 꾹 참고 이겨내면 그토록 원하던 정상이 있다. 힘들게 도착한 정상에서 '내가 또 하나를 해냈구나'라는 감동에 절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던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등산을 사랑할 것 같다. 


그리고,

'힘내, 같이 올라가자'고 손을 내밀어주는 마음이 따뜻한 등산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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