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미봉에서 뜻밖의 클라이밍 + 일본인 찐 클라이머들 만난 썰
무언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고, ‘올라올 때 이런 길이 있었던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아까는 보지 못한 그 길로 가야하만 할 것 같았고 이미 내 발걸음은 그 길을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곳은 자연 암벽이 있는 곳이었다. 아주 거대한 5층 높이의 바위가 덩그러니 있었는데, 자연 그 자체인 곳에서 사람들이 맨손 그리고 암벽화 외 아무런 장비도 없이 리얼 암벽을 타고 있었다. 실내 암장으로 클라이밍만 조금 해봤던 나로써는 진짜 아무런 안전장비 없는 쌩 돌덩이를 맨 몸으로 오르는 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자니 너무나 신기했다.
대부분 현지 남자들이었고 별다른 홈이나 잡을 곳이 없는데 어떻게 저리도 잘 오를까 너무나 신기했다. 인간 스파이더맨이 따로 없었다. 올라가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바닥이 흙이긴 해도 그렇게까지 쿠션감이 있지도 않을텐데 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중 눈에 띄는 사내 둘이 있었다. 딱 봐도 동양인이었고, 외관상 일본인 같았다. 한창 그들을 바라보는데 다른 현지인보다도 월등히 잘하는 둘이었다. 다들 밑에서만 조금 올라갈까말까 매달려 있었는데, 그 일본인 중 한 분은 아주 끝까지 올라갔다. 너무도 신기한 광경이어서 영상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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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창 감상하다가 나도 잠깐 도전이라도 해보고 싶어서 암벽을 올랐다. 나름 일단 한 단계 올라가기는 했는데, 신발이 트래킹화다보니 예민하지 못해서 틈새를 이용하지 못하다보니 더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그래도 진짜 야생의 암벽에서 클라이밍을 시도할 수 있어서, 그것도 이 아름다운 남미의 피츠로이에서 할 수 있어 뜻깊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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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그 일본 사내들의 정체가 궁금해져서 말을 걸었다. 알고보니 그 둘은 각각 7년, 10년의 경력을 가진 클라이밍 경력자였다. 선수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실력이 수준급이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남미에 온 이유도 암벽을 타기 위해서라고 했다. 몰랐었는데 피츠로이가 암벽 등반으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오르기에도 좋고 풍경도 좋아서라고 얘기했던 것 같다. 나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다시 한번 남미로 자연 암벽을 타러 와도 좋겠다 싶었다.
그리고는 그들의 코어와 근력이 너무나 좋아보여서, 급 요가 강의가 시작되었다. 어쩌다보니 나는 물구나무를 서면서 설명하고 있었고, 이어서 그 둘을 직접 가르치며 핸즈온(직접 손으로 티칭해주는 것)까지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둘 다 배운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해내서 대충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 놀랍기는 했다. 처음 보는 사인데도 이 낯선 남미 땅에서 같은 동양인 이라는 공통점으로 묘하게 통하고도 편한 기분이 들었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고향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달까. 이들과의 만남이 피츠로이 자체를 오른 것 만큼이나 오래도록 좋은 기억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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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창 재밌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는 다시 하산길에 올랐다. 내려올 때는 오를 때와 달리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또 색다르게 좋았다. 오를 때는 위를 바라보고 간혹 뒤를 돌아보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내려가면서 멀리 보이는 풍경과 계속해서 달라지는 산길을 감상하는 맛이 있었다. 내려가는 발걸음에는 더 속도가 붙어서 1시간도 안돼서 내려왔던 것 같다. 피츠로이가 카프리 호수까지는 난이도가 높지 않은 산이었고, 정상에 이르기 전 ⅕ 구간이 정말 기어간다고 하던데 언젠간 꼭 다시 와서 정상에 올라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예상보다 빠르게 산행은 끝이 났고, 혹시나 버스 시간을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터미널로 향했다. 한 자리 정도는 있겠지 하고 안심했는데 아쉽게도 그날의 표가 이미 다 매진 되어서 바꾸는 건 고사하고 새로 살 수 있는 티켓도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3시간 가량의 시간이 떴는데 사실 엘찬텐은 피츠로이 등반 외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아주 작은 시골 동네이기 때문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까 고민스러웠다.
카페를 가거나 낮부터 여는 펍 같은 곳에 가서 한 잔 적시기 정도를 생각해서 여기저기 가게를 들여다 봤다. 카페는 무난한 곳들이 많았고 펍은 딱 여기다 싶은 로컬 맛집 느낌인 곳이 하나 있어서 그곳에 정착하고 싶었는데, 와이파이가 없어서 후보지에서 탈락했다. 3시간이나 시간을 보내려면 최소 인터넷은 잘 터져야하는데 고장나서 와이파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부터 인터넷이냐 맥주냐 선택의 기로에 섰는데, 컨디션이 그다지 좋지 못했기 때문에 쉬면서 인터넷이라도 맘 편히 할 수 있는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떠돌아 다니다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식당을 발견했는데 그곳은 인터넷이 된다고 하여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들어갔다. 아주 거대하고 무거운 보온병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닌 탓에 팔과 어깨가 매우 굳어 있었고, 다리도 물론 천근만근이었다. 오후 5시 반쯤 된 시각이었고 사실 배는 그닥 고프진 않았으나, 지금이 아니면 밥 때를 놓칠 것 같아서 신중하게 매뉴를 하나 골랐다. 점심을 라면으로 먹었으니 뭔가 건강하면서도 든든한 것을 먹고 싶어서, 버섯 리조또 하나와 맥주를 골랐다.
맥주는 시원하니 너무 좋았고, 리조또 맛은 생각보다 그저 그랬다. 배는 이미 불렀지만 후식으로 모처럼 푸딩도 시켰는데, 달달한 시럽을 뿌린 계란찜 같았다. 결론적으로 맛집이 전혀 아니었고, 와이파이도 시원치 않아서 한 시간은 천천히 밥을 먹고 다른 한 시간은 멍때리면서 톡으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덧 2시간 정도의 시간을 보내고 나와서 인근 작은 슈퍼에서 장을 봤다. 마실 물과 요거트, 과자 등 간단한 먹거리를 샀는데 아주 놀랍게도 금액이 말도 안되게 높게 나왔던 기억이 있다. 영수증을 찍어둔 게 없지만 거의 산 게 없는데 1~2만원 언저리 나왔던 것 같다. 동네의 어느 허름한 가게 같은 슈퍼였는데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이제는 엘찬텐의 일정을 마무리하며 터미널로 향했다. 일어난 지 벌써 12시간이 지났다보니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었고, 이제는 얼른 집(호스텔)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7시 반쯤 다시 엘칼라파테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고, 숙소에 도착하니 10시 반이 조금 넘은 된 시각이었다. 씻고 나와서 어제 만났던 한국인 투어사 직원 나뚜씨와 잠깐 호스텔 커먼룸에서 만나 와인 한 잔 했다. 저렴하고 맛있는 와인으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에서 와인을 마음껏 마시지 못한 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이렇게 틈날 때 한 잔씩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엘칼라파테의 3일차 밤이 저물어 갔고 피곤했지만 벌써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잠에 쉬이 들지 못하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