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고치고 싶은 나의 언어적·비언어적 행동 패턴이 있다. ‘나는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어요’를 온몸으로 표현하며, “아~ 네네.” “진짜요?” 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다. 어쩔 때는 내 상식에서 벗어나거나 심기를 거스르는 말에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부터 끄덕이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곤 어련히 알아서 말해줄 내용을 앞서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또 뭐래요?” 그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핑계로 나 좋을 대로 넘겨왔는데 오늘은 그 이유를 조금 더 고찰해보려 한다.
누군가는 리액션이 좋다고 했고 아무개는 가식적으로 느끼기도 했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이가 어느 날 말했다.
“너 진짜 그게 궁금해서 묻는 거야?”
“왜 MC를 보려고 해? 가식 같아.”
그동안 배려라고 위안 삼았던 것을 가식이라는 위선으로 치부하다니. 왠지 모르게 섭섭한 기분이 들었지만 서로 날 것의 감정도 터놓을 수 있는 관계여서 부끄럽거나 상처가 되진 않았다. 아니라고 왕왕거리며 넘겼지만 이따금 그 말이 머릿속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처밀었다.
몇십 년을 살아내며 굳혀진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고치기란 쉽지 않다. 그렇게 된 데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 법. 대체 어떤 사고의 흐름에 의해 이렇게 고착화된 것일까. 반대의 시선으로 내가 얘기를 하는 입장을 떠올려봤다. 나는 어떤 얘기를 할 때,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상대방의 반응이 없으면 마음 한켠이 불안하다. 원체도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데다 급한 성격도 한몫하리라. 그래서 말하는 중간 “듣고 있어?”, “어떻게 생각해?”, “내가 이상한 거야?”라며 듣는 이의 반응을 살피게 된다. 물론 나도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라 모두에게 그러진 않고, 내게 편하게 그만 좀 물어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한다.
그렇다는 것은 나는 특정 반응을 기대하고 얘기를 시작한다는 말이 된다. 그동안의 나를 반추해 보니 인정하기 싫지만 답정너의 면모가 물씬하다. 지난 날들 속에서 다져진 사회성으로 용케 잘 감추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 되니 남편이 내게 종종 하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거야.”
내가 답정너라니. 사회생활 속 인간관계를 맺고 끊으며 그 많던 답정너들을 얼마나 욕했었는데 내가 답정너였다니. 내가 남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은 결국 내가 타인에게서 바라는 것에 기반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내가 무지성 리액션을 하는 것도 상대가 원할 것 같은 반응을 먼저 건네기 위한 습관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여러모로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이다. 주체적으로 해야 할 반응에서조차 ‘나’는 없다는 게 될뿐더러, 상대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를 일인데 왜 멋대로 판단하느냐 말이다. 그저 내로남불이 되기 싫은 한 답정너의 예의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나는 정말 아무개의 말처럼 가식덩어리(실제로 가식덩어리라는 워딩을 쓴 적도 없는데 혼자 긁혀서 부정적으로 확대해석)인 것일까?
가식 : 말이나 행동 따위를 거짓으로 꾸밈.
자꾸 변명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위선적으로 하는 행동은 절대 아니다. 나에게 습관적인 행동은 알맹이를 드러내기 위해 껍질을 까내는 과정이다. 내 진짜 알맹이를 드러내기 위한 숨 고르기랄까. 진중하고 시크한 나를 꿈꾸면서, 오늘도 여전히 한없이 가벼운 고개를 끄덕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