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혼자 있는 공간에서 불을 켜지 않는다. 시인성이 필요한 경우에는 주황빛의 무드등 하나로 방을 밝힌다. 늘 커튼을 치고 사는 나에게 쨍하고 밝은 걸 좋아하는 엄마는 왜 이렇게 어두컴컴하게 지내느냐고 나무랐다.
광원의 색을 절대온도를 이용해 수치화한 것이 색온도이다. 표시로는 절대온도인 켈빈 온도(K)가 이용된다. 숫자가 낮을수록 따뜻한 빛(노란빛), 높을수록 차가운 빛(푸른빛)에 가깝다. 쨍하고 날카로운 분위기의 푸른기가 도는 흰빛인 주광색(5500K ~ 6500K), 밝으면서도 너무 차갑지 않은 자연광 느낌의 차분하고 깔끔한 하얀빛인 주백색(3500K ~ 4500K), 조명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노르스름한 따뜻한 빛의 전구색(2700K ~ 3000K)이 있다. 나는 전구색이 그렇게도 좋다.
남편과 함께 살 집을 구하고 인테리어 할 때, 평소 내가 불을 켜지 않고 주황빛에 집착한다는 걸 아는 남편은 인테리어 관련한 모든 것을 나에게 일임하고도 조명에서만큼은 목소리를 냈다. 쨍하고 밝은 걸 좋아하는 남편은 잘 보이지 않는 게 너무 답답하다며 제일 밝은 조명으로 해달라고 했다. 대화를 하다 보니 남편은 내가 감성적인 분위기를 추구해서 전구색을 고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집에서 밝은 흰빛 조명을 키는 걸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 말한 적이 없었다. 그냥 키면 꺼버리고, 다시 키면 또 꺼버릴 뿐. 밝은 흰빛 조명을 마주하면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받고 불안감까지 들 때가 있다는 걸 말하고 나서야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메인등을 모두 주백색으로 선택하고, (주백색도 충분히 밝다는 걸 설득해야 했다.) 전구색의 간접등을 곳곳에 배치했다.
엄마의 말마따나 나는 어둠의 자식인가 보다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는데 최근에 유튜브를 보다가 HSP라는 걸 알게 되었다.
고도 민감성 개인(HSP, Highly Sensitive Person)은 Elaine Aron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용어로 매우 예민한 사람, 과민한 사람을 말한다. HSP는 전문적인 의학 용어나 장애 여부를 나타내는 단어가 아니고 심리성격학에서 쓰이는 특정한 기질 타입을 의미한다.
HSP는 선천적으로 감각이 매우 예민하고, 감정 몰입 정도가 높으며, 심미안이 있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서 15~20%가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일반인 평균보다 수신하는 감각에 예민하며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자동적으로 전이받기도 한다.
‘어? 이거 난가?’ 싶어 HSP에 대해 자세히 설명된 글을 찾아 읽었다. HSP 민감도 테스트 항목을 살펴보니 대충 봐도 꽤 많은 항목에 해당되었다. 폰으로 클릭해 가며 하는 검사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테스트일지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민감도 83%로 높다고 나왔다. 내가 예민한 사람이라고? 나는 살면서 예민하다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을뿐더러 가방끈이 어깨 위에 배배 꼬여있어도 불편한 줄을 모르는 둔탱이 그 자체인데.
내가 HSP가 맞다고 하면 납득 가는 것들이 많기는 하다. 빛뿐 아니라 큰 소리에도 불안감을 느끼는 거, 감정적으로 예민해서 타인의 기분변화를 쉽게 알아차리고 영향받는 거, 미묘한 변화를 잘 캐치해 눈썰미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 거, 등등. 쓰다 보니 나 예민한 게 맞나 보다. 어쩐지 피곤하더라니.
오늘 저녁 남편하게 당당히 말해야겠다.
“오빠. 불 좀 다 꺼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