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적으로 인력이 필요한 고사리 수확은 딱 두달이다. 직접 생고사리를 실어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말린 고사리를 포장해서 택배로 보낸다. 그래서 택배차가 일년 내내 주기적으로 사도를 따라 문 앞까지 들어온다.
초기에 저온 창고를 들인 덕에, 한달에 한번 자식들에게 김치를 보낼 때, 담아주는 품목이 늘었다. 가을엔 감이나 밤도 넣고, 여름엔 옥수수나 서울서 구하기 힘들다는 호박잎도 한번 쪄서 넣었다. 한가할 때면 약밥을 쪄서 담고, 저장창고에 보관하는 사과는 일년 내내 나눠 보낸다.
예전엔 아이들이 고속버스를 타고 5킬로짜리 김치통을 가지러 오곤 했는데, 세상 좋아졌다. 택배차를 기다리고 있노라니 언제부터 택배를 시작했나 생각을 거슬러 보았다.
‘아마 김밥집 시작할 때였던가?’
양항의 큰 구내식당 문을 닫고, 큰 일 없이 수 년이 흘렀다. 그 자식들은 한목소리로 이제 좀 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이라며 작은 김밥집을 열었다. 한 줄에 천 원, 가격은 낮았고 손은 여전히 빠르고 정확했다.
“엄마, 이거 팔아서 얼마나 남는다고 이 고생이야.”
딸은 늘 같은 말을 했고, 그녀는 웃으며 “싸게 한끼뚝딱 해결하믄 좋지야.”라고 대답했다. 계산대 위에 천 원짜리 지폐가 올라올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확인했다. 그 작은 금액은 하루를 온전히 버텨냈다는 증표 같았다.
그 무렵부터 택배를 보내기 시작했다. 자식들의 집으로, 날짜를 정하지도 않고 이유를 붙이지도 않은 묵직한 박스들이 오갔다. 전라도 김치와 직접 짠 참기름, 집에 있던 양념들과 밑반찬이었다. 그래도 마트에서는 쉽게 살 수 없는, 엄마의 손맛이 담긴 것들로 채웠다. 직장생활로 바쁜 자식들의 손이 덜가게 하려고 일회용 포장을 하고, 한번 끓일 분량으로 얼린 국거리까지 챙겨 넣었다.
박스에 물건을 담고 테이프를 붙이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고, 말은 짧았지만 손은 늘 바빴다.
여름의 초입이면 택배 박스에는 매실 장아찌와 액기스가 추가되었다. 예전 법천댁에게 처음 배운 매실 담그기는 어느덧 십수 년째 이어온 연례행사가 되었다. 김밥집의 매실 장아찌는 나름 유명한 밑반찬이었고, 부산물로 얻는 매실 액기스는 여름 음료로, 또 식초와 설탕 대신 사용하는 발효 양념으로도 쓰임새가 좋았다. 마침 매실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던 때였다.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따로 적지 않았다. 대신 먹을 만큼, 쓸 만큼을 넣었다. 부족하지 않게. 나중에 막내가 말했다. 엄마 사랑은 택배였다고.
자식의 삶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뒷받침하려는, 책임지는 존재로서의 가장 큰 사랑이었다. 말은 많지 않았다. 대신 박스는 늘 묵직했다.
김밥집은 무난하게 돌아갔다. 아이들은 모두 제 몫의 삶을 살고 있었고, 더 이상 손을 보태줄 일도 없었다. 하루가 끝나고 가판대를 정리하다가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 무엇을 향해 가야 할까. 그 질문은 급하지 않았고, 매대 위에서 천천히 식어갔다.
아이들이 크는 동안 하지 못한 말들과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어른이 되었고, 그녀는 어느새 할 일이 사라진 사람처럼 서 있었다.바쁜 시간은 끝났지만, 비어 있는 시간은 아직 낯설었다. 놀이터에서 손주들이 그네를 타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 아이들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내 이름으로 된 집이 필요하겠구나.’
그 생각이 오래 남았다.
뒷바라지하는 엄마의 자리는 끝났다. 이제는 생각나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을 짓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녀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쯤은 남아있기를 바랐다.
매실나무를 심어야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해마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나무. 김밥을 말며 모은 천 원짜리 지폐들이 머릿속에서 천천히 매실밭이 되어갔다.
매실로 돈을 벌어 바닷가에 집을 짓자. 누군가를 부양하기 위한 집이 아니라,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집.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이제는 그녀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었다.
사람 좋은 택배기사가 성큼 들어온다.
“오늘은 뭐 부치요? 고사리믄 좋겄네. 거, 아줌마네 김치는 맨날 세통씩이라, 너무 무거워서 팔이 떨어져불 것 같단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