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때, 잘 쉴 것
색감이 참 좋다. 선명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다.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으며 붓의 터치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벨벳 재질의 드레스일까? 실크 소재일까? 저 옷을 입고 오늘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 아름다운 밤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우아한 파티를 열었을까? 대낮부터 신나게 한바탕 파티를 즐겼을까? 무도회장에서 열정적으로 춤을 췄을까? 여러 사람과 웃고 떠들며 담소를 나눴을까? 와인 한잔한다는 게 몇 잔이 되어버렸을까?
여러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여 제일 신나는 척했지만, 주거니 받거니 말하는 것도 맞장구치는 것도 지쳐 도망 나오고 싶지는 않았을까? 내색은 못 했지만 사실 기가 빨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많은 사람이 모이는 연례행사, 파티는 참여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가기 전에 어떤 옷을 입을지 고민부터 시작해 차려입고 꾸미는데 준비시간도 꽤 걸렸겠다. 지금의 화려한 옷차림이 말해준다. 그럼 무도회장에 도착해 파티를 시작할 때부터 피곤했겠는데? 그걸 시작으로 어느 순간 급피로해져 집으로 겨우 기어들어 왔을까? 이런 큰 약속, 거사가 있는 날에는 그전부터 마음의 준비와 체력 비축을 단단히 해두어야겠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 이 여인처럼 신발 벗을 기운 하나 없는 상태가 되기 십상이니.
근데 손에 쥐고 있는 건 뭘까? 책일까? 수첩일까? 설마 저렇게 힘든 상태로 책을 읽었을까? 해야 할 일이 적힌 수첩일까?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억지로 두 눈 뜨고 잡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깜빡 잠이 들어 손에서 놓칠 것 같다. 마치 내가 자기 전 휴대폰을 들고 영상을 보다, 손에서 놓쳐 얼굴에 맞고는 아파하는 것처럼. 혹시 재밌는 이야기나 가십거리가 잔뜩 적힌 수첩은 아닐까? 오늘 무도회장에서 수집해온 고급 정보일까? 피곤한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저러다 떨어뜨려 수첩 모서리에 다리를 찧을까 걱정되는걸.
그럼 무도회가 끝난 뒤 이렇게 소파에 누운 이 여인은 뒤에 무엇을 할까? 연체동물처럼 축 늘어져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걸 보니 “잠깐만. 아주 잠깐만.” 하다가 이대로 잠들겠는데? 맥을 못 추다 겨우 정신 차리고 모든 여자들이 싫어한다는 화장 지우기를 할 수 있을까? 대신 화장 지워주는 사람도 로봇도 없는데 어쩔 수 없다. 셀프로 옷도 갈아입고 뒷정리도 해야 한다. 이 여인은 자석처럼 소파에 붙어있는데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그래도 여인이 누워 있는 녹색 소파가 한결 편안해 보여 다행이다. 푹신한 소파에 온몸을 맡겨 손발까지 축 늘어뜨리고 누워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역시 집이 최고다. 왠지 내 모습 같은걸?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받은 그림일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왠지 웃음을 자아낸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보니.
평소 무엇을 하며, 어떻게 쉬는가? 평온한 주말 늦은 아침, 알람 소리 없이, 그냥 아무 이유 없이 갑작스레 눈이 떠졌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 때문이었을까? 밖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에? 배꼽시계가 신호를 줬나? 부스스 흐트러진 머리에 뻑뻑하게 건조해 겨우 뜬 눈으로 맞이하는 아침. 기지개를 켜며 오늘은 진짜 충분히 오래 잤구나! 왠지 뿌듯하다. 이제야 피로가 가심을 느낀다. 다들 아침을 어떻게 시작하는지가 그날 하루를 결정한다는데. 시간이 금인데 벌써 하루가 이만큼이나 지나가 버렸네. 어떡하지? 그래도 조금만 더 잘까? 조금만 더 누워있을까? 진짜 조금만? 나 오늘 해야 할 거 많나? 당장 해야 하는 거 있나?
아니야. 그냥 쭉 자. 잠은 안 와도 누워있자. 푹신푹신 보들보들 편하니 이렇게 좋은데. 밥보다는 누워있는 게 좋다. 누워서 영상을 보다 너무 배고플 때 이불 밖으로 나와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다. 먹는 것도 노는 것도 좋지만 쉬는 것도 중요하다.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쉬어도 좋지만, 아무것도 안 해도 좋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쉰다. 나도 혼자서 충전할 시간이 꼭 필요하다. 평일에 달리기 위해서 주말에는 잠시 쉬어 가야지.
그림 속 여인이 안타깝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신발조차 벗지 못하고 불편한 자세로 소파에 걸쳐 누워있는 걸까? “저기요! 구두 벗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가서 편하게 누우세요.” 하긴, <무도회가 끝난 후>니까 정말 무도회장에서 집으로 막 돌아온 상태겠지? 정리할 정신도 없나 보다. 아무 힘도 정신도 없다. 나자빠져 푹 쉬고 싶으면 저럴 수 있지. 빛나는 화려한 드레스와 아름답게 꾸민 얼굴 뒤 감춰졌던 진짜 모습, 남겨진 모습이 보인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무대 위에서 내려온 스타들의 삶 같기도 하다.
지금 나도 이렇진 않은가? 한 해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 같다. 몸만 지치고 마음만은 여전히 열정으로 들끓는다고 하면 애석하게도 그건 아니다. 몸이 지치면 마음도 지치게 되어있고 마음 써야 할 일이 많다 보니 처음과 같지는 않다. 분명 아팠던 구석도 지친 구석도 있다. 기력이 쇠해졌다. 항상 에너지 넘치는 아이들과 고군분투하며 우당탕탕 학급살이를 하니 넘치던 에너지가 남아나질 않는다. 분명 아이들만큼 에너지가 넘쳤는데 어떤 순간도 곧잘 넘겼었는데 처음의 힘찬 파이팅이 점차 짠내 나는 웃음이 된 건 아닐까? 갈수록 체력이 소진됨을 느낀다. 영양제를 마구 먹고 있지만 예전보다 더 오래 자야 피로가 풀리고 더 오래 쉬어야 할 것 같다. 또 날은 왜 이렇게 추운지. 매서운 추위에 밖을 나가기가 무섭다. 움츠러드는 계절이다. 나도 겨울잠을 자고 싶다.
일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와 누운 나의 모습을 누가 훔쳐본 것같이 똑같다.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도 종종 혼자 있고 싶다 느끼고 외롭다가도 혼자가 편하다. 여러 모임, 사람들과의 짧은 만남 후에 돌아오면, 나를 맞이하는 적막한 집 안의 공기가 쓸쓸한 것도 같고 고요히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낯설기도 하지만, 내 집에서 나는 가장 편안하다. 그래, 이렇게 조용한 날도 있어야지. 나는 매일 아이들의 외침에 파묻혀 살다 보니 이런 조용하고 잠잠한 평화가 이제 좋아졌다. 큰 데시벨에 노출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집에서는 빵빵한 볼륨보단 잔잔하게 듣고 말은 아끼게 되었다. 내 집이 가장 좋다. 좋은 곳 가서 재밌는 거 보고 맛있는 거 먹고 신나는 거 하다가도 집에는 돌아와야지. 역시 집이 출발지고 종착지다. 침대에 파묻혀 뒹굴뒹굴하다 스르르 잠들어 오랫동안 푹 자고 일어나면 좋겠다. 이야. 상상만 해도 좋은걸?
스페인 화가 라몬 카사스는 초상화가로서 자화상도 이렇게 그렸다. 19세기 후반 바르셀로나 미술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그는 1897년 ‘네 마리의 고양이들(Els Quatre Gats)’이라는 카페에서 피카소를 비롯한 당대 유명한 건축가, 시인, 음악가 등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모임을 했고 여기서 피카소의 개인전을 열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문을 닫았었지만, 다시 열어 아직도 ‘네 마리 고양이’ 레스토랑이 있다는 걸 보니 참 신기하다. 스페인에 가본 적이 없는데, 다음에 간다면 바르셀로나에서는 꼭 여기에 가봐야겠다. 문 앞에 떡하니 자리한 피카소의 그림도, 안을 장식한 라몬 카사스의 그림도 보고 싶다.
이 그림을 보고 웃음이 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보니 나도 이 여인과 같은 상태인 것 같다. 지친 거야? 그럼 안 되는데.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데? 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제때 잘 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거 아니야? 나는 잘 쉬고 있을까? 잘 쉰다는 건 어떤 걸까?
나는 요즘 집에 돌아오면 몹시 피곤하다. 지친다는 게 이런 걸까? 힘에 부칠 때도 벅찰 때도 있다. 머리가 지끈 아파 움직이기 힘든 날이 많다. 그래서일까? 당장 해결해야 할 일인데도 미뤄두고만 싶어진다. 아무 생각을 하기 싫다. 아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다. 냅다 누워버린다. 누워서 유튜브 쇼츠 영상을 아무 생각 없이 무의미하게 슥슥 넘기며 본다. 내가 이걸 보고 싶어 보는 걸까? 그냥 눈 뜨고 있어 이게 보이는 걸까? 마음의 짐을 느끼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이 양심의 가책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미뤄두고 있다는 걸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원래는 미리미리는 아니더라도 닥치면 빠릿빠릿하게 잘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때의 능률이 아닌 것 같다. 이럴 시간에 얼른 자리 잡고 앉아 시작해야지. 나는 지금 내가 쉬고 싶어서 이러나 싶다. 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같은 SNS를 계속 보고 있는 건 사실 휴식이 아니다. 그저 그 순간 아무 생각하지 않고 잠깐 잊고 싶어 찾았던 도피처는 맞지만 진정한 휴식이라 느낀 적은 없다. 그럼 내가 휴식이라 느낄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나에게 길고 긴 동면의 휴식이 주어진다면 무얼 하며 쉬고 싶나? 며칠은 시간 개념 없이 푹 자고 싶다. 아주 오랜 시간 자다 일어나 이렇게나 오래 잤나 깜짝 놀랄 만큼. 나는 원래도 잠이 많아 잠을 푹 자야 완전히 배터리가 회복되니. 잠에서 깨면 괜찮을 거라고 아님 어쩜 꿈에서라도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 모른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본다. 자고 일어나면 훨씬 개운하고 활력이 도니 이제 훌쩍 떠나고 싶다. 가족과도 좋고 친구와도 좋고 혼자서도 좋다. 아니다. 시간이 많지? 그럼 여러 번 여행을 가야겠다. 처음에는 누군가와 함께 떠나고 마지막 여행은 혼자서 떠났다 돌아와야지. 원래도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지 않고 나를 위한 혼자만의 여행에서 압박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 아무 계획 없이 떠나야지. 어디로 갈지는 정해야 하나? 가다가 마음 바뀌면 또 다른 곳으로 갈지 몰라. 원래도 자주 바뀌는 게 내 마음인데 뭘. 여행이니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뒷걱정은 넣어두고 그냥 훌쩍 떠나보는 거야.
훨훨 날아가듯, 날듯이.
글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현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