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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Jan 15. 2023

집단주의와 개인주의, 그 황금비율을 찾아서

2014.3.24

선생님,

잘 지내고 계세요? 아니 안녕하세요? 

새로 옮겨가신 학교에서 중2 담임을 맡으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교사들에게는 정신없이 바쁜 3월인데 에너지 방전 상태를 매일 경험하고 계신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온갖 공문더미와 학기 초 업무에 파묻혀 수업 준비를 하실 시간이나 제대로 있을지, 아니 그것보다 저녁에 잠깐이라도 짬을 내어 건강을 돌보실 시간을 갖고 계시는지 걱정입니다. 


이곳은 맑은 날이 점점 많아지고 해가 부쩍 길어졌습니다. 춘분이었던 지난주 금요일에는 낮의 길이가 열두 시간 십이 분이 되어 이제 낮이 밤을 넘어섰어요. 겨울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일이 그렇게 힘이 들더니, 이젠 맑은 날이면 해 뜰 무렵에 눈이 저절로 떠집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하루가 다르게 우렁차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여름엔 아마도 이른 새벽부터 녀석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깨게 되겠지요. 하루에 대략 6분씩 낮의 길이가 길어지는 자연의 엄청난 변화를 저는 이런 식으로 경험합니다. 여기서 저는 시골 사람이 다 되었어요. 저녁 식사 후 산책길, 무심히 올려다본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무리들 속에서 아는 별자리가 있는지 눈으로 더듬어 보다가도 학교에서 한창 고생하고 계실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올해 초부터 저는 대학 건물 안의 작은 연구 공간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제 연구실 근처에 있는 동료들과 자주 점심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어요. 그중에서도 저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가벼운 산책과 광합성을 즐기는 네 명의 핀란드 남자 동료들과 함께 교육학과 건물에서 약간 떨어진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갑니다. 이 네 사람 중에 한 명은 박사과정 학생이고, 두 명은 연구원,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교수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나이와 직위의 차이가 있지만, 모두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스스럼없이 대합니다. 그래서 그냥 봐서는 누가 교수이고, 연구원이고 학생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작년 가을에 T교수님을 처음 뵈었던 때가 떠오르네요. 저는 그때 한국에서 온 지 일주일 밖에 지나지 않은 상태였는데, T를 처음으로 복도에서 마주친 순간 ‘Hello’와 동시에 고개를 숙였던 웃지 못할 기억이 있습니다.


서로의 호칭이나 직위를 부르지 않고 이름만을 부르는 이 문화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권위주의와 불평등을 철폐하고자 했던 유럽 68혁명의 정신이 북유럽에도 퍼지면서 대학사회에서도 직위를 드러내지 않고 이름만을 부르는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해요. 이곳에서는 자녀들이 부모의 새 배우자 혹은 새 애인에게도 새어머니, 새아버지 혹은 아줌마, 아저씨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릅니다. 초등학생들이 교장 선생님에게도 이름만을 부르는 모습을 볼 수 있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모에게도 어머니, 아버지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고 하네요. 서로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변화인 것 같지만 실은 저의 생활과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어요. 학문적인 대화를 나누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든 훨씬 생각이 자유로워진다는 걸 느낍니다. 저와 상대방은 동등한 개인이 됩니다. ‘내 생각이 맞을까, 틀릴까, 교수님은 내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라는 일종의 자기 검열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것이지요.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연구실로 돌아오는 길에 제가 T에게 “그렇다고 해서 핀란드 사람들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잖아요?”라고 말씀드리니, T는 “그럼. 우리는 호칭이나 대화에서 지위나 서열을 드러내지 않지만 서로를 존중하려고 해. 그게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이야.”라고 대답하시더군요. 그리고 한국어로 ‘Hi’가 뭐냐고 물으시길래, ‘안녕’이라고 하는데 당신은 저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에 제가 ‘안녕’이라고 말을 낮추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평소에 좀처럼 언성을 높이지 않는 핀란드 사람인 T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면서 “나는 결코 너보다 나이가 아주 많진 않아.”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이제 저보다 나이가 열 살, 스무 살 많은 연구원이나 교수들에게 영어의 ‘Hi’에 해당하는 ‘moi’와 함께 가볍게 손을 들어 인사하게 되었습니다. 7개월 전과 비교한다면 엄청난 변화지요.


이처럼 핀란드는 직위와 계급, 나이가 서로 다른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권력의 차이가 상대적으로 작은 사회입니다. 대학을 예로 말씀드리자면, 제가 있는 교육학과의 이사회(board meeting)에는 교수뿐만 아니라 연구원과 박사과정 학생도 반드시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지요. 이 회의에서 장학금 지급이나 학생 선발과 같은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학과장이 이사회의 결정을 거부한 적이 없었다고 하니 실질적인 결정권을 이사회가 지니고 있는 셈이에요. 


그리고 지난여름, 저는 헬싱키에서 시민과 공권력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직접 느낄 수 있었어요. 시청사와 대통령궁 바로 앞은 도로라서 버스, 트램, 그리고 걸어 다니는 시민들로 늘 북적거립니다. 그 길 건너편에는 까우빠또리(광장에 펼쳐진 시장)와 항구가 있고, 까우빠또리 바로 옆에는 헬싱키 시민들이 즐겨 찾는 도심 속 휴식처인 에스플란디 공원이 있지요. 8월 말 에스플란디 공원에서는 매일 저녁마다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저는 이 나라의 국민총소득이 아닌, 이런 탈권위가 만들어낸 상상력이 많이 부러웠어요. 우리는 지금껏 대통령이 수행원 없이 광장에 펼쳐진 포장마차에서 일상적으로 커피를 마신다거나, 성소수자인 대통령 후보가 파트너를 데리고 선거유세를 하며 결국 결선 후보까지 올라간다던가, 대통령궁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공원에서 시민들이 엠프를 틀어놓고 공연을 벌이는 모습 따위를 함부로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요. 찬란한 여름의 끝자락을 부여잡으려는 듯 헬싱키 시민들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박수를 치더군요. 함께 몸을 들썩이며 노래를 흥얼거리던 저는 문득 음악 소리가 대통령궁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심각한 표정으로 대통령궁을 한 번, 그리고 무대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면서 혼자 중얼거렸지요. ‘이 사람들, 참 잘하는 짓이다…’ 


그런데 사회구성원들 사이에 나타나는 권력의 차이는 개인주의 또는 집단주의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어요. 구성원 사이에 권력 격차가 큰 사회에서는 개인주의보다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고, 권력 격차가 낮은 사회에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더 강하다고 하네요. 예외도 있겠지만요. 개인주의-집단주의 차원에서 보았을 때, 세금을 통한 소득 재분배라던가 나이, 성별, 인종이나 직위에 구애받지 않고 시민으로서 사회의 주된 의사결정에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힘써 온  북유럽 국가들은 미국, 영국, 호주와 같은 영미권 국가들보다는 집단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해요. 또, 남유럽, 중동, 중남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서는 개인주의 성향이 훨씬 강한 편이고요. 한편,  개인주의 성향이 제일 강한 영미권 국가들보다도 구성원 사이의 권력 격차가 낮은 것이 북유럽 국가들의 특징이라고 해요.**


핀란드 역시 여느 사람 사는 곳과 마찬가지로 집단주의 문화와 개인주의 문화가 혼재되어 있긴 하지만,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이나 학생들로부터 사람들이 낯을 가리고 개인적이다, 외로움이 사무치게 만드는 사회다, 내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는 문화가 없다는 오해 아닌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한국이나 인도, 남미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 보기에 핀란드는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쉽게 친구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아니지요. 핀란드 사람들은 무거운 짐이 있어도 혼자 들 수 있다면 도움을 요청하기보다는 스스로 해결하고 말기 때문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겐 쌀쌀맞은 개인주의 문화권이라는 인상을 주곤 합니다. 생경한 개인주의 문화와 어두운 겨울 날씨에 적응하지 못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니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요. 그런데 인상적인 건 그 핀란드 사람들은 국가 대표 기업인 노키아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매각되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자신과 타인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 많게는 절반에 달하는 수입을 세금으로 내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일상생활 속에서 보더라도 지갑이나 우산같이 잃어버린 물건을 다시 찾을 확률이 한국에 비해 굉장히 높은 사회입니다. 학생식당 앞에서든 백화점이나 시립 도서관 앞에서든 늘 육중한 유리문을 잡아주어서 제가 핀란드어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도 수줍은 듯 아무 말이 없지만 팔 근육만큼은 타인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원리가 북유럽 사회에도 침투해서인지 이곳 핀란드도 예전만큼은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속도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 앞에서도 점잖게 차를 세워 보행자나 자전거족들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운전자들이 더 많고요. 


한국은 흔히 ‘우리가 남이냐’라는 구호로 압축되는 것처럼 함께 먹고 마시며 공동체 정신을 공유하는 집단주의 문화권으로 분류되곤 합니다. 하지만 깊숙이 들여다보면 매일의 일상이 만인의 만인에 대한 경쟁으로 점철되는, 각자도생의 생존법칙이 철저하게 적용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 사회이기도 합니다. 이런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가 가진 에너지를 자신 혹은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타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일에 온전히 쏟아야 합니다. 제가 2012년에 석사과정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역문화충격을 겪으며 만들어낸 지수(index)가 있는데요, 이른바  ‘문 잡아주는 사람’과 ‘횡단보도에서 멈추는 운전자’ 지수입니다. 한국에서는 뒤에 오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타인을 위해 문을 잡아주는 수고를 들이지 않습니다. 바로 뒤에 누군가가 오는데도 그냥 놓아버린 육중한 유리문은 앞뒤로 요란한 진동을 일으키며 뒷사람의 안경이나 이마를 위협합니다. 또, 횡단보도에서 한참을 서 있어도 질주하는 차량의 꼬리가 끊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보행자 신호가 들어온 횡단보도에서도 주행하는 차들을 바라보며 저는 고속도로 한가운데 내던져진 한 마리 야생동물이 된 것만 같은 깊은 슬픔과 분노를 느끼곤 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저녁 회식이 잡히고 나와 친하지도 않은 직장 동료의 길·흉사 소식이 계좌번호와 함께 친절하게 날아드는 집단주의 사회에서 저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심지어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수많은 개인 사이의 끊어진 고리를 보았습니다.  


한국과 핀란드 그 사이 어딘가에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황금 비율을 이리저리 모색하고 있는 저는 문화와 국경을 넘나드는 유목민입니다. 돌이켜보면, 핀란드에 처음 왔을 때 경험하는 모든 것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던 경탄의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낯선 이에게 쉽게 다가서지 않는 핀란드인들의 개인주의적인 성향과 날씨에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도 분명 있었지요. 그런데, 애초에 핀란드 사회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이라는 것이 저의 성향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이곳 문화에 순조롭게 적응하며 제 정체성과 핀란드 사회의 가치관을 통합시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에 다시 돌아가서는 역문화충격도 겪어내야만 했어요. 그리고 다시 핀란드로 갈 것을 결정한 다음에는, 어느 곳에도 영구적이고 안락한 제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채 현대판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이겨내야만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 입고 싶은 옷, 예쁜 그릇을 보아도 그것을 보관할 공간이 마땅치 않아 소유하지 못하는 제 처지가 서글펐던 적도 있었지만, 이젠 조금,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자유인지 알게 되었어요. 앞으로 저는 이곳 북유럽 사회와 문화를 좀 더 차분하게 응시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판하기도 하며, 모국에서 역문화충격을 느껴야 하는 처지도 이방인의 자의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창의성의 원천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려 합니다. 드러나지 않은 존재의 깊은 부분까지 응시하면서 질적인 이해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조금이나마 깊어지고 짙어진 시선으로 바깥세상을 들여다보게 될 날은 과연 언제쯤일까요.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동료들이 흥얼거렸던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귓가에 맴돕니다. 그 바람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절로 들게 할 만큼 햇살은 눈부시고 바람은 부드러운 나날입니다. 북유럽의 햇살과 바람을 한 줌 집어 편지와 함께 보내드립니다. 아무쪼록 새 학기에 건강 잘 챙기시고, 선생님 반 아이들과 소중한 만남 이어나가시길 멀리서 기원합니다. 


2014. 3. 24 

J 드림



* 커버 출처: Gwydion M. Williams   2010_07_09 Individualism | The Unique Man On His Own | Flickr

** Hofstede, G., G. J. Hofstede, and M. Minkov. 2014. 세계의 문화와 조직: 정신의 소프트웨어 (제3판). 학지사. 128-131쪽 참고.

*** 핀란드는 2014년 공공사회복지 부문의 지출이 국내총생산(GDP)의 31퍼센트를 차지해서 OECD 국가 중 7위에 들었다. 한국의 경우 공공사회복지부문의 지출이 점차 늘어나고는 있으나 2014년을 기준으로 볼 때 공공사회복지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4 퍼센트로 여전히 OECD 회원국 중에서 최하위를 기록했다. 

   신동면. 2015. OECD 국가들의 부문별 공공사회복지지출 결정요인 분석. 국회예산정책처 연구용역보고서. 29쪽 참고. 

   한정수. 2015. 부문별 사회복지지출 수준 국제비교평가. 국회예산정책처. 사업평가 15-02(통권337호). 79-84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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