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31
선생님, 잘 지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파견 근무 때문에 많이 바쁘실 것 같아요. 교육청 근처의 나무에도 단풍이 곱게 들었겠죠?
이곳은 가을이 깊고 깊어 겨울이 멀지 않은 늦가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비해 한 달 정도 계절이 앞서가고 있는 것 같아요. 줄기의 뽀얗고 하얀 껍질과 연푸른 빛 나뭇잎으로 여름 햇살을 황홀하게 반사시키던 자작나무들은 이제 처연한 가을비에 노란 잎들을 남김없이 떨구어내고 있습니다. 여름 내내 수영복만 걸친 채 잔디밭에 누워 햇살보다 더 환하고 투명한 웃음소리를 공기 중에 띄워 보내던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마치 무언가에 취한 듯한 몽롱함과 흥분이 감지되곤 했었는데, 이제 그 밝음 대신 약간의 창백함과 우울한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는 듯합니다. 이제는 핀란드 사람들이 왜 그렇게 무언가에 홀린 듯 여름을 즐기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여름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겠지요.
지난주에는 제가 있는 교육학과에서 세미나를 했는데, 이틀에 걸친 세미나가 끝나고 저녁 파티에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었지요. 행사나 대화가 아무래도 대부분 핀란드어로 이루어지다 보니 저처럼 외국에서 온 학생들이나 연구원들은 많이 참석하지 않았어요. 저는 여느 때처럼 핀란드 동료들 사이에 끼어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 대로, 때로는 통역을 부탁한다는 뜻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화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와인을 마시면서 핀란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던 제게 핀란드인 동료 O가 다가와 말을 걸었어요. 언어 장벽과 문화의 차이 때문에 이렇게 핀란드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어울리는 외국인들을 많이 보지 못했는데 제가 핀란드인들과 섞이려고 다가서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본인도 중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용기와 끈기를 필요로 하는 건지 잘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실 어른이 되어 다른 나라로 건너와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문화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문화 사이의 충돌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재구성해 나간다는 건 말 그대로 껍질을 벗는 고통이 따르는 과정인 것 같아요. 이건 분명 편협한 인식의 한계를 깨고 자아를 확장해 나가는 놀라운 경험임에 틀림없지만, 평소에 핀란드 사회의 가치관과 제 가치관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던 저로서도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더군요. 특히나 요즘 비교 교육과 비교 문화라는 주제에 집중했던 탓인지, 저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개의 정체성이 내면에서 충돌하는 것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개인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하는 핀란드의 개인주의 문화를 좋아하는 한국인. 모여서 함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모든 것을 개인의 자율성으로 남겨 놓기보다는 어느 정도는 타인을 위해 ‘내가 알아서’ 해주는 것을 배려로 생각하는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가 그립기도 한 핀란드 장기 체류자. 대충 짐작이 되시나요? 이 가을에 저는 마치 카우치에 누워 정신 분석을 받는 사람이 된 것 마냥 잔뜩 예민해져 있었지요. 더 힘든 건 이런 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더라도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고서는 제 심정을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이해받지 못할 때 생기는 외로움 또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요.
그러던 참에 O가 ‘그것이 얼마나 용기와 인내를 필요로 하는 건지 내가 잘 안다’ 고 말을 건네자 서러웠던 제 마음이 누그러졌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이 동양(비서구권)에 대해 동경, 환상, 무시, 혐오 등의 형태로 갖게 되는 권위 있고 일반화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더 나아가서는 비서구인들이 서구 세계에 대해 가지는 동경이나 혐오감과도 관련이 있는데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자아’가 ‘타자’를 규정할 때 흔히 작동하는 생각과 감정의 틀이라고 생각해요.* 이 과정에서 자아는 타자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흑백논리에 따라 극단적으로 묘사하기 마련이지요. 마치 자아와 타자 사이의 차이가 비교과정에서 생기는 상대적인 특성이 아니라 절대불변의 본성인 것처럼 말이에요. 이를테면 ‘동아시아 국가의 교육방식은 서구의 그것과는 달리 철저히 시험과 암기 위주의 방식이라서 창의성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다’며 동화 속 착한 신데렐라와 못된 언니들처럼 묘사하는 것 말이지요. 그리고 자아가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타자에게 투사하는 형태로 오리엔탈리즘이 나타나기도 하는데요. 여행을 하다 보면 인도인들이나 티베트인들을 명상과 불교 철학이 삶과 하나가 된 영적인 사람들로 신비화하는 여행자들을 만날 때가 있지요. 그리고 동양이라는 지리적 장소를 신비롭고 매혹적이지만 이성과 합리성을 통해 구원받아야 할 여성에 비유하기도 하고, 오페라나 영화에서 남성에게 순종적이고 심지어 자신을 버린 남자를 잊지 못해 목숨까지 버리는 동양인 여성 주인공을 그리기도 하는데 이것이 과거 제국주의 사회가 부정하고 싶었던 내면의 ‘여성성’을 비서구 사회에 투사해 온 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겠네요.
제가 핀란드에 처음 왔던 2009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핀란드 교육현장을 직접 보기 위해 오신 한국 분들과 나눈 대화를 돌이켜 보고, 한국에서 출판된 핀란드 교육에 대한 책과 기사들을 되살펴 보았어요. 그러면서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핀란드 교육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스며들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동안 한국에서 영향력 있는 교육 전문가들과 언론이 일반적으로 내세웠던 핀란드 교육과 사회에 대한 이미지는 ‘경쟁 대신 협력을 통한 배움’, ‘능력별 반편성 교육 금지를 비롯한 평등 교육’, ’신자유주의와는 전혀 거리가 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등이었지요. 그런데 제가 논문이나 책을 읽고 또 실제로 생활하면서 관찰해 보니 위에서 묘사된 이미지들은 과장된 측면이 있어요.
핀란드 교육이 한국 교육에 비해 시험과 입시에 의한 경쟁이 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업 방식이 학생들 사이의 협력을 촉진하는 방식이라고 단언하기는 힘들어 보여요. 제가 핀란드에서 여러 학교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교사가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명을 하거나 학생들의 특성에 맞추어 일대일로 지도하는 장면을 훨씬 흔하게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곳 핀란드에서도 사실상의 능력별 반편성을 하는 학교들이 있다고 해요. 예를 들어 핀란드의 여러 대도시에서는 특정 과목에 중점을 두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급을 개설한 종합학교들이 있고요, 이런 학교를 선택해서 자녀를 입학시키는 학부모들도 있어요.** 아무래도 학생들의 가정 형편과 그에 따른 학업 능력에 따라 학생들을 구별하고 분리시킬 소지가 있는 정책이라고 봐야겠죠. 핀란드 사회라고 해서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교육시장화의 흐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랍니다.
어쩌면 인간이기에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그것을 가진(가졌다고 믿는) 타자를 동경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겠지요. 그래서 이제는 경제 성장보다 삶의 질을 중시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한국 사람들이 좋은 교육과 좋은 사회에 대한 열망을 핀란드라는 타자에게 투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봐요. 다만, 선생님도 말씀하셨듯이 오리엔탈리즘에서 비롯되는 동경심이나 자기 비하는 자신의 장점을 보지 못하게 하지요. 또, 우리 사회와 다른 사회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이분법적인 비교와 대조를 통해 지나친 일반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교육이라는 복잡한 사회 현상을 너무 단순한 이야기로 왜곡해버릴 위험이 크다는 말씀에 저도 동의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자작나무에도 이제 이파리가 거의 남지 않았어요. 섬세한 사람들은 나무들이 스스로 잎을 떨어뜨리는 작은 죽음을 통해 겨울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마음 깊이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저 또한 어른이 다 되어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통합하는 지난한 여정 속에서 국가와 문화권이라는 경계를 오가며 허우적거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가을이 훅 지나가버렸네요. 그래도 이번 가을은 저에게 사람이란 무릇, 한국인, 핀란드인, 집단주의, 개인주의 그 어느 틀로도 규정될 필요가 없고, 규정될 수도 없는 다면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그것이 낭만적인 환상이든 부정적인 편견이든 일단 선입견을 부여해 놓고 나면 그 사람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규정하고 판단할 수 있으니 편하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어떤 선입견도 씌우지 않고 하나하나 새롭게 알아가려고 노력하듯이, 제가 핀란드 교육과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에도 그런 애정을 담고 싶어요. 자신이 부여한 환상에 집착하거나 실망하는 대신,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존중하고 서로를 성장시키는 관계를 만들어 간다는 것. 그것이 연애든, 비교연구든, 여행이든 참 어렵지만 말이에요.
얼마 전 친구들과 함께 각자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토요일 저녁 한 때를 즐겁게 보냈습니다. 직접 구운 바게뜨와 팬케잌, 그리고 정성 들여 끓인 버섯 수프 같은 다문화 집밥에도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힘이 있더군요. 저도 한국 가을에 비해 더욱 변화가 심한 핀란드의 가을을 타며 힘들어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말과 음식으로 온기를 전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환절기라 그런지 감기 환자들이 이곳에도 많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또 소식 전할께요.
시월의 마지막 날,
뚜르꾸에서 J 드림
* Said, E. (1978) 2014.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옮김 (개정증보판). 교보문고. 48-58, 350-359, 625-628쪽 참고.
** Berisha, A-K., and P. Seppänen. 2017. “Pupil Selection Segments Urban Comprehensive Schooling in Finland: Composition of School Classes in Pupils’ School Performance, Gender, and Ethnicity.” Scandinavian Journal of Education Research 61(2): 240−254. 243-244쪽 참고.
Simola, H., J. Kauko, J. Varjo, M. Kalalahti, and F. Sahlström. 2017. Dynamics in Education Politics and the Finnish PISA Miracle. Oxford Research Encyclopedia of Education. Retrieved from http://education.oxfordre.com/view/10.1093/acrefore/9780190264093.001.0001/acrefore-9780190264093-e-16?rskey=eD0yeA&result=1 69-83쪽 참고.
*** 사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thomashawk/8877485547 (사진:Thomas Hawk)
**** 커버 출처: Eugène Delacroix, 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 1834, oil on canvas, 180 × 229 cm (Musée du Louvre) https://www.flickr.com/photos/profzucker/51238086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