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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Mar 10. 2023

한국어와 핀란드어, 소유에서 존재로 떠나는 시간 여행

2015. 1. 30

선생님,

2015년 새해가 시작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이번 방학에도 여러 지역으로 강의를 다니시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학기 중엔 바빠서 읽지 못하셨던 책을 읽으며 선생님다운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셨겠지요? 이곳은 1월 둘째 주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었어요. 깜깜한 아침에 일어나 낮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구름이 잔뜩 낀 우중충한 시간을 보내다가 그나마 구름 뒤에 숨은 햇빛마저 오후에 일찌감치 자취를 감추고 나면 하늘이 다시 깜깜해 지기를 반복하는 계절, 겨울 한가운데 있어요. 핀란드 사람들처럼 저도 겨울잠에서 실수로 깨어난 곰 마냥 피곤한 느낌이 가시질 않네요. 제 몸이 하루 종일 밤이라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요. 그래도 이제는 요령이 생겨서 비타민 D도 부지런히 챙겨 먹고 있어요. 작년에 큰맘 먹고 인공 햇빛을 발산하는 조명장치도 하나 장만했죠. 아침마다 책상 한켠에 놓인 이 친구 옆에 딱 붙어서 일을 하며 겨울철에 부족한 햇빛을 보충하고 있어요. 


기후위기가 북유럽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탓인지 이제 겨울도 예전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핀란드 사람들이 합니다. 제가 이곳에 처음 왔던 2009년만 해도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으면 그 눈이 햇빛이나 가로등 불빛을 반사시켜 주위가 환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는데, 이제 이곳 남핀란드는 기온이 0도 근처를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눈이 내려도 금방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으면서 온 거리가 아이스링크를 방불케 합니다. 뚜르꾸 시에서 인도에 세심하게 돌가루를 뿌려주고 있지만 병원에는 걷다가 넘어져 골절상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고요. 햇빛을 못 봐서 우울한 데다 눈까지 녹아버려 그 좋아하는 스키도 자주 못 타게 되었다고 핀란드 친구들이 투덜대네요. 저는 피곤한 것만 빼면 지내기 괜찮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이곳 문화에 적응하며 경험의 폭을 넓히고 다양성을 수용하려 노력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제 나름대로는 스스로를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핀란드에서 여러 일을 겪으며 실은 제가 별로 그렇지 못했다는 게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죠. 지금 생각해 보니 작년 가을에 문화 충격을 한창 겪을 때까지만 해도 제가 흑백논리에 가까운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핀란드에서는 이사를 가면 집 천장에 전등이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한국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도착한 저는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은 학생 주택의 천장 밑에서 사흘 밤을 불빛 없이 버텨야 했어요. 언젠가 핀란드 친구에게 이 얘길 했더니, 친구는 ‘그건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는 핀란드 문화에 따라 이사 온 사람이 원하는 모양의 조명을 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말했고, 저는 지지 않고 ‘핀란드 문화에는 입주자를 위해 어느 정도는 챙겨주는 배려가 부족한 것 같다’고 친구에게 말했다가 말다툼을 벌이게 된 것이죠. 다문화 시대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 있는 단일 민족이라는 정체성, 그리고 다양성보다 통일성을 강조해 온 한국의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티가 나지 않았을 제 안의 보수성을 인정한다는 건 보이지 않게 제 사고를 감싸고 있던 속껍질을 직접 벗겨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어요. 그렇게 박피 수술을 하고 나니 요즘에는 제가 가진 편협한 생각들을 좀 더 편하게 인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제는 정당 간에 생각의 차이가 어느 정도 존재해도 한 지붕 아래에서 연립내각을 구성하고, 커플이나 부부가 헤어진 다음에도 남남이 아닌 친구 사이로 지내곤 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면서 약간의 거리 속에서 서로의 다양성을 존중해 주려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삶의 방식을 또 하나 배웁니다. 전공 공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을 깨닫고 있는 셈입니다. 박사과정 유학을 가기로 결정하기 전 불안하고 고민도 많았던 제게 좋은 계기가 될 거라며 응원해 주셨던 선생님께 새삼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초록으로 뒤덮일 여름을 기다리며 겨울 내내 일에 몰두합니다. 아침에도 야근을 하게 되는 어둠의 계절에 야외 활동을 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스키를 탈 줄도 모르는 저 역시 이번 학기엔 저녁에 핀란드어 수업을 듣고 있어요. 석사과정 시절에도 핀란드어를 좀 배우긴 했지만, 일 년 반 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많이 잊어버린 핀란드어 문법을 다시 배우고 있어요. 다른 북유럽 국가의 언어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게르만어파인 것과 달리 핀란드어는 우랄어족에 속하는데요, 한국어처럼 어근 뒤에 다양한 접사를 붙여서 의미를 넓혀가는 교착어예요. 저는 요즘 핀란드어에서 다양한 격조사나 어미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의 인내심을 매일 존경하면서 지내요. 핀란드어처럼 시시때때로 변하는 한국 낱말을 공부해야 하는 그들 또한 얼마나 고생이 많을까 하면서 말이지요. 


아침에 일어나 인터넷의 파란 창을 열어젖힌 다음 한국어와 핀란드어로 된 뉴스를 읽고, 오전과 오후에는 주로 영어로 글을 읽거나 쓰고, 저녁에는 핀란드어 수업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와 한국에서 가져온 책으로 머리를 식히는 저는 이 세 언어가 지배하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세 가지 언어가 혼재하는 삶을 살다 보니 각 언어권에서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이나 문법이 그 언어를 사용하던 사회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방식을 반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를 들어 영어의 ‘have’ 동사를 생각해 볼께요. 핀란드에서는 ‘I have money.’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Minulla on rahaa.’라는 말을 쓰는데요, 우리말로 옮기면 ‘나한테 돈이 있어.’라는 문장이 되거든요. 이 두 문장을 영어로 직역하게 되면, ‘At me, there is money.’가 되지요. 이건 분명 소유의 개념과는 좀 다른, 그러니까 내 곁에 돈이 존재한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언제부턴가 핀란드어와 한국어의 이 두 문장 역시 실질적으로는 소유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어요. 에리히 프롬이 말하기를 지구상에는 ‘나는 __을 가지고 있다.’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소유의 표현이 없는 언어가 더 많다고 해요. 한국어와 핀란드어가 바로 그 예가 되겠지요. 그런데 인류가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을 기능적으로 소유하는 삶에서 벗어나 점점 사유 재산을 축적하는 삶의 방식을 따르게 되면서, 언어도 원래는 없었거나 희미했던 소유의 개념을 그 안에 반영하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비록 지금은 그 의미가 퇴색했을지 몰라도 어떤 대상을 소유가 아닌 존재의 방식으로 표현하는 이 두 언어를 접하면서 많은 것을 느낍니다그 어떤 물건이나 사람도 지금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내가 그것을 소유한다는 ‘I have’라는 표현이 얼마나 오만하고 어리석은가를 말이지요핀란드어를 배우고 다시 한국어를 살펴보면서 인류가 존재의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는 것이 보편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깨닫고 난 후 돌아본 제 삶은 온갖 소유가 만들어 낸 중력에 짓눌려 무겁고 남루합니다물론 소유의 방식으로 길들여져 온 삶을 쉽게 바꿀 수는 없겠지만요즘은 제 곁에 머무는 사람이나 물건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존재 자체에 감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또 하나 인상적인 건 핀란드어에 미래시제가 없다는 점이에요. 대신 현재시제로 현재와 미래 모두를 표현하지요. 핀란드어에도 완료 시제가 있긴 하지만, 시제가 열두 개나 있는 영어에 비해서는 시제를 그다지 분석적으로 규정하진 않는 셈이지요. 한국어도 영어권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퍽이나 재미있는 언어예요. 한 문장 안에 시제가 뒤죽박죽이 된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뱉잖아요. 예를 들어 ‘너 내일 지각하면 죽었어!’ 라고요. (‘너 내일 지각할 거라면 죽을 거야!’라고 말하진 않죠.) 이런 말을 처음 접한 영국, 미국 사람들의 뇌에서는 아마 벼락이 치지 않을까요. 과거완료-과거-현재완료-현재-미래-미래완료라는 일직선의 시간 위에서 사고하고 말하는 그들에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SF소설 마냥 도깨비 화자가 시간을 넘나드는 한국어는 곤혹스러움 그 자체일 거예요.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하니 제가 영어로 논문을 쓰며 겪었던 시련도 이제 이해가 됩니다. 영문 교정 서비스 해주시는 분이 제가 쓴 문장의 동사 부분에 빨간 줄을 쫙 그어서 고쳐주셨을 때 내 소중한 문장을 왜 이렇게 이상한 시제로 고쳐놨냐며 한동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런데 이젠 어느 언어권 할 것 없이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아직 오지 않은 ‘미래(未來)’에 현재가 저당 잡히는 시대를 살고 있지요. 시간은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자원이기 때문에 ‘플래너’와 ‘캘린더’로 철저하게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버렸고요. 자연의 일부로서 ‘순환’의 개념으로 시간을 생각했던 인류는 산업혁명과 과학 기술의 발전 속에서 제도화된 ‘직선’의 시간 개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시간과 문명에 서열을 매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시간은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제일 중요한 자본이 되어 불안을 선사합니다. 철저한 시간 관리를 통한 자기 계발, 계속 앞으로 도망치기 때문에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과 같은 이 시대의 생활양식은 직선적인 시간관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영어의 우세 속에서 더욱 강화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박사과정에서 영어로 교육학을 공부하는 저이지만, 학문 세계에서든 일상에서든 영어라는 언어가 누리는 지나친 권력으로 인해 나타나는 문화 제국주의를 염려하고 경계합니다. 그동안 핀란드어가 배우기에 어렵고, 전공 공부와 병행하기에 벅차다는 이유로 일상생활에서도 영어에 너무 의존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많이 서툴긴 하지만 동료들과 간단한 일상 대화는 핀란드어로 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랄 언어와 유럽 언어의 특징을 모두 지닌 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통해 핀란드의 문화를 좀 더 알아가려고 해요. 그것이 한국과 핀란드 학교와 교육을 들여다보는 제 논문 연구에도 좀 더 진정성 있게 다가서는 길이 될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한국에서는 새 학기가 시작되겠네요. 선생님께서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시든 그 일이 한국의 학생들이 좀 더 민주적인 학교와 사회의 시민으로 살아가는 일에 의미 있는 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 편지 드릴께요. 


Jossain Suomen ja Korean välissä (핀란드와 한국 그 사이 어딘가에서),

J 드림


*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차경아 옮김. 까치. 43쪽 참고.

** Masemann, V. L. 2013. “Culture and Education.” In Comparative Education : The Dialectic of the Global and the Local, edited by R. F. Arnove, C. A. Torres, and S. Franz, 108–124.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113-115쪽 참고.

*** 커버 출처: https://pixn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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