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5
한 때 이런 아파트 광고 문구가 있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의 브랜드나 집의 가격이 계층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얘기였다. 한편, 프랑스나 영국 같은 유럽 사회, 심지어 미국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 문화 예술적 소양, 시사 비평지 구독 여부,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분노와 참여도 등을 계층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고 했다. 일 년 내내 통찰력을 키우는 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쓰지 않아도,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한 실천을 하지 않아도, 브랜드 아파트에 살면서 내 가족에게 유기농 제품을 사다 먹이고, 어디든 원하면 자가용으로 움직이며, 해외여행을 가는 게 중산층의 기준인 한국을 한동안 떠나 핀란드로 향하는 내 마음속엔 여러 궁금증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과연 핀란드에서는 어떤 기준으로 계층을 구분하고 있을까? 복지국가 핀란드에도 사회 계층과 불평등은 존재할 테니.’ 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은 내게 공연장은 좋은 자료 수집 장소가 되었다.
때는 2017년. 핀란드가 독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일 년 내내 다양한 행사가 열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심지어 영국 BBC 방송이 주최하는 음악 축제인 프롬스(Proms)에서도 시벨리우스의 교향시 ‘핀란디아’를 연주했는데 BBC합창단이 핀란드어로 합창을 부르는 정성을 더해가며 축하의 의미를 전하기도 했다. 시벨리우스를 국민음악가로 대하는 핀란드인의 마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별하다. 나의 절친 A는 시벨리우스가 자신의 고향인 하멘린나에서 태어났으며 심지어 자기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선배라는 것을 늘 강조했다. 어이가 없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얼굴도 못 보고 한참 전에 돌아가신 선배님을 저렇게도 우려먹는구나 싶었다. 어쨌거나 핀란드에 와서 시벨리우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다른 고전 음악가들이 작곡한 작품들을 공연장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종종 누리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A에게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연주회에 가는 것이 취미라는 것을 고백했다.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A의 단골 먹잇감이 되었다. 성당을 다니셨던 부모님이 유아 세례를 받게 했고 어린 시절 내내 미사에서 성가대의 오르간 반주를 했기 때문에 클래식 음악에 익숙해져 어쩔 수 없었다(?)는 장황한 부연 설명까지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A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여러 개의 별명을 만들어 주었다. cultural posh (문화 상류층), granny (할머니) 등등.
문화 상류층이 별명으로 채택된 이유는 이렇다. 가난한 박사과정 학생이니 분명 경제적 상류층은 아닌데, 핀란드방송교향악단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들으러 뚜르꾸에서 헬싱키까지 가는 건 분명 문화 상류층의 생활양식이라는 거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그의 저서 ‘구별짓기’에서 상류계급, 중간계급, 노동계급의 취향을 세밀하게 구분하여 분석하고 있는데, 음악을 예로 들어보면 상류계급은 다양한 클래식 음악 작품과 작곡가를 알고 있으며 바흐의 피아노 평균율을 선호한다. 또한, 중간계급은 조지 거슈인의 랩소디 인 블루 혹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처럼 낭만성이 가득한 작품들을, 노동계급은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같은 경음악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핀란드는 한국에 비해 평등과 실용 중심 문화가 강한 곳이다. 공사장에서 막 나온 듯한 옷차림의 건설 노동자가 대학의 구내식당에서 학생, 교수들과 한 공간에서 식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내 지도교수님은 청바지 차림에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시는 날이 많고, 직장인 밴드에서 전자 기타를 연주하신다. 음악 교육도 예외가 아니어서 종합학교(1-9학년, 우리나라의 초등학교·중학교)에서는 고전음악뿐만 아니라 대중음악도 비중 있게 다룬다. 음악실에는 기타, 전자 기타, 드럼 등이 구비되어 있으며 초등학생들이 기타를 잡고 코드를 배우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나라에서 틈날 때마다 피아노를 치고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다니는 나의 생활양식이 다분히 귀족적(?)으로 비쳤을 수 있다.
A의 사회학적(!) 놀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논문 스트레스가 쌓일 때마다 꿋꿋하게 공연장을 드나들며 상류계급(?)의 문화생활을 즐겼다. 지자체에 소속된 시립교향악단이나 공영방송이 운영하는 핀란드방송교향악단의 연주회에서 핀란드 문화복지정책의 일환으로 대개 일반가격의 절반에 가까운 가격으로 제공하는 학생티켓을 도랑에서 연어를 낚아채는 곰처럼 건져 올린 덕분이었다. 나는 사회학자의 안구를 장착한 채 중간 휴식시간만 되면 콘서트홀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핀란드 관객들은 일터나 학교에 갈 때보다 좀 더 신경 쓴 옷차림으로 공연장에 나타났다. 여성들은 드레스를 입고 구두를 신거나 남성들은 재킷을 입고 오는 식이었다. 물론 청바지 차림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짜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보러 헬싱키에 있는 오페라 하우스로 향했다. 박사과정 수업이 마치자마자 아침에 입고 나왔던 청바지에 셔츠, 스니커즈 차림 그대로 기차를 탔다. 헬싱키에 도착해 오페라 하우스에 도착한 순간, 관객들의 옷차림을 본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 콘서트홀에서 보던 관객들의 옷차림에 비해 무척이나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이 많았다. 치맛단이 바닥에 닿는 노란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여자,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벨벳 재킷과 명품 구두를 신은 남자, 그리고 턱시도를 입고 온 남자 관객까지. 심지어 로비 한쪽 구석에서는 나름 셀럽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샴페인잔을 손에 들고 파티를 즐기고 있었는데, 다른 관객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공항에 가면 볼 수 있는 파란색 띠로 울타리를 쳐놓고 있었다. 그리고 오페라는 공연 시간이 길어 중간휴식 시간에 저녁을 대신할 뭔가를 먹어줘야 한다. 오페라하우스 안에 있는 카페에서도 와인 같은 음료와 간단한 음식을 팔긴 하지만 오페라에 온 관객들의 옷차림이 표방하는 계급의 품격에 상응하는 가격표가 붙은 그것들을 고를 마음이 없었던 나는 다른 전략을 쓰기로 했다. 가게에서 미리 구입해 둔 미니 와인과 샌드위치 하나를 야무지게 챙겨 온 것이다. 2막이 끝나고 휴식시간이 되었다. 로비는 글라스 와인과 케잌 한 조각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우아하게 한 입 오물거리며 담소를 나누는 무리들로 가득했다. 그 상류층(?) 무리들 사이에서 나는 가방을 열어젖힌 다음 비닐봉지에 꽁꽁 싸서 공수해 온 와인을 꺼내 마시고 샌드위치를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배를 채운 나는 계속해서 로비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사회 전반에 평등주의가 강하게 흐르고 있는 핀란드에서도 유독 오페라 공연장에서는 계급의식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할머니가 별명이 된 내막은 이렇다. 클래식 음악은 주로 나이 든 세대의 취향이라는 거다. 핀란드 (영국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들었다)의 클래식 음악 연주회에 가보면 대부분의 관객이 고령층이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고령의 연금생활자들이 국가에서 지원하는 50%가량의 공연할인혜택을 받아 문화생활을 하고 친구들과 와인 한 잔 하러 오는 곳이 클래식 공연장이다. 핀란드 전역에서 여름 내내 이어지는 페스티벌에도 예외는 없었다. 내가 쿠흐모 실내악 페스티벌과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보청기를 끼고 앉아 계시는 어르신들 틈바구니에서 클래식 공연을 보는 동안, A를 비롯한 다른 젊은이들은 플로우(Flow) 페스티벌, 일미오(Ilmiö) 페스티벌, H2Ö 페스티벌 등에서 찬란한 여름을 즐기느라 바쁜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렇게 핀란드 어르신들에 둘러싸여 공연을 보던 어느 날, 핀란드방송교향악단과 조성진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오호라. 같은 교육학과 박사과정에 있는 핀란드 친구까지 관객으로 섭외하는 데 성공한 나는 의기양양하게 헬싱키로 달려갔다. 그날 공연에는 나이가 지긋한 관객뿐만 아니라 젊은 아시아인의 모습을 한 관객들도 제법 보였는데 대부분이 헬싱키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이거나 교포인 것 같았다. 공연 후에는 사인회도 열렸다. 유럽인의 시각에서 보면 자신들의 전통음악을 배워 국제무대에서 이름을 알린 한국의 젊은 클래식 연주자가 팬덤을 형성하고, 유럽 어느 도시에서 사인회를 열고 있는 모습이 매우 신기했을 것이다. 사실 한국에서 열리는 클래식 공연을 찾는 관객들은 유럽에 비해 평균적으로 훨씬 젊은 편이다. 한국에서 내한 공연을 하지 않은 비한국인 클래식 연주자들은 있어도 한 번만 다녀가는 연주자들은 없다는 농담도 있을 정도로 한국의 관객들이 보여주는 열정적인 반응은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국에 공연하러 오고 싶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공연이 끝나고 돌고래의 하이톤을 능가하는 탄성과 힘이 넘치는 박수를 보내는 젊은 관객들이 뿜어내는 열기는 유럽의 공연장에서는 느끼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선우예권, 손열음, 양인모 같은 한국의 스타 연주자들이 주도하는 클래식 콘서트의 티켓 파워 뒤에는 한국의 젊은 관객들이 있다.
나는 이렇게 한국 사회의 젊은 세대가 참여하는 클래식 공연문화에서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이라는 이분법이 흐려질 가능성을 엿본다. 이들이 서양의 클래식 음악만 고수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친숙한 장르의 음악이 서양 클래식 음악이라고 보기는 당연히 어렵다. 하지만 이들은 힙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대중 음악가와 클래식 음악가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연 (예를 들어 선우예권X권진아의 커튼콜)이라던가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된 옐로우 라운지처럼 클럽에서 열리는 보다 자유로운 형식의 클래식 공연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게임 덕후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오케스트라 음악도 있다. 메이플스토리,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 등장하는 음악이 롯데콘서트홀에 웅장하게 울려 퍼진다. 자, 이쯤 되면 무엇이 고급예술이고 대중예술인지 혼란스러워진다. 브루디외가 이야기했던 전통적 구별 짓기에 의한 예술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알렉산더는 적어도 미국에서는 ‘고급’ 예술부터 ‘대중’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을 즐기고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전통적인 의미의 문화 상류층을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고급예술인가 하는 것은 순수한 미학적 문제라기보다 오히려 사회, 정치적 문제이다. 자본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 형식이 다른 사람들이 향유하는 예술 형식보다 우월하다’라는 주장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고급예술이라고 생각하는 오페라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1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평범한 사람들도 즐기던 예술이자 오락이었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사이의 명확한 구분도 없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미국 보스턴 초기 정착민들의 후손으로 사회 지도층이었던 브라민(Boston Brahmins)은 뒤늦게 이주하여 세를 늘려가는 잉글랜드 계 미국인들에게 주도권을 넘겨줄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보스턴 미술관과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설립하고 ‘고급’ 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자신들이 상류층이라는 이미지를 공고히 하는데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예법’을 장착하고 ‘신성화’ 작업(예를 들어 공연 내내 조용히 앉아 있다가 끝날 때에만 박수 치기, 적절한 복장 갖추기 등)을 거친 ‘고급’ 예술이 탄생했고 결국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내 취향은 누구의 것일까. 물론 자크 라캉의 말처럼 나는 타자, 그러니까 내 주변의 중요한 타인과 이 사회에서 내가 속해 있는 계급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사회적 질서라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취향을 그 틀에 가둘 것인지. 아니면 좀 더 자유로워질 것인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루브르 박물관이나 프라도 미술관에서 어마어마한 경호 시스템의 보호 속에 화려한 프레임을 두르고 있는 작품은 고급 예술이고 영국 서민들이 사는 동네의 담벼락이나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의 분리장벽에 그려진 뱅크시(Banksy)의 스프레이 벽화는 그보다 급이 낮은 예술일까. 기득권층이 정해놓은 기존의 질서를 넘어 예술 사이의 담장을 허물고 확장해 나갈 젊은 세대들의 활약을 기대해 본다. 물론, 인간의 모든 창작 행위가 예술은 아니다. 예술과 상품, 예술과 진부함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는 관객들의 사회학적, 예술적 통찰력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우리는 삶의 공간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마주치며 살아갈까. ‘팰리스’와 ‘힐즈’에 사는 사람들은 자가용을 타고 별다방 리저브로 향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을 빠져나와 빽다방 혹은 무인커피점의 커피 한 잔으로 이 여름을 나고 있을 것이다. 소득 수준과 연령대에 따라 너무나 질서 정연하게 분리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인 채로 살아가는 대한민국에서 인류의 종다양성은 갈수록 줄어들고 이는 사회 생태계의 면역력을 위협한다. 버스 운전을 하는 청년이 의사로 일하는 여성의 옆자리에 우연히 앉게 되고, 음악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시작된 인연이 연애와 결혼으로 이어지는 상상을 잠깐 해본다. 또, 나이 많은 시민들과 청년들이 공연장에 왔다가 서로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 한국에서도 이제 청소년, 청년 할인이나 경로 우대라는 이름으로 티켓을 할인해 주는 공연이 제법 있다. 하지만 청소년, 청년 할인의 경우 만 24세까지로 연령을 제한하고 있고, 초·중·고등학생들에게만 할인혜택을 제공하는 공연들도 많다. 스물네 살이 넘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경제활동을 시작하지 않은 청년들은 문화 복지의 혜택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는 점이 아쉽다. 핀란드에서는 나이게 관계없이 대학(원) 학생증을 제시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것처럼 경제적 약자층이 큰 부담 없이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사회적 배려가 확대되었으면 한다. 공연이 끝난 후, 그들이 예술에 대한 감동과 더불어 그 사회가 제공한 문화복지 덕택에 따뜻해진 마음을 안고 집에 돌아가면 좋겠다. 그리고 나중에 또 다른 경제적 약자들을 위해 기꺼이 세금을 내는 시민이 되면 좋겠다. 우리에게 예술이, 공연장이 다양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게 하는 교차로가 되면 좋겠다.
* 1970년대 프랑스 사회를 기준으로 한 분석임을 감안해야 한다. 삐에르 부르디외 1979(2006),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최종철 옮김. 새물결.
** 빅토리아 D. 알렉산더 2003(2010). 예술사회학. 최샛별, 한준, 김은하 옮김. 살림
*** 위와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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