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2.15
작품명: Sergei Rahmaninov Piano Concerto no. 3 in D minor op. 30
오케스트라: Turku Philharmonic Orchestra
지휘자: Christian Kluxen
협연자: Georgy Tchaidze (피아노)
공연일자: 2019.2.15.
공연장: 핀란드 뚜르꾸 콘서트홀
2월 중순. 한 줌 밖에 허락되지 않던 한겨울의 짧은 해가 점점 길어지지만 여전히 음산한 겨울바람이 살갗을 저미며 파고드는 시기. 가을 겨울 내내 마늘 아닌 바나나를 먹으며 미생에서 완생으로 거듭나려는 곰 마냥 부지런히 작성한 학위논문이 이제 막바지로 다다르고 있는 와중에, 지난여름 한 저널에 투고했던 학위논문에 들어갈 마지막 소논문은 무려 다섯 달 만에 익명의 리뷰어들이 쓴 논문심사평과 함께 반려되어 돌아와 버렸다. ‘왜 돌아왔니.’ 아무리 소리쳐 봐도 대답 없는 너…. 결국 집안일을 잽싸게 끝낸 일요일에 주어지는 선물 같은 오후 시간을 참기름 짜듯 짜내어 소풍 가듯 도시락을 싸들고 꼭대기 층 연구실을 향해 등반한다. 워라밸은 이 곳 북유럽에서도 대학의 가장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 처해있는 박사과정 학생들의 삶을 비웃듯이 스쳐간다.
나에게 위로가 될 단 하나의 음악을 찾아 본능적으로 콘서트 티켓 구매 웹서핑을 시작한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유영한다. 많이 해본 솜씨인 듯 그 움직임은 일사불란하면서도 부드럽게 이어지는 행위예술이 된다. 그동안 학생증을 제시하면 시립교향악단이나 공영방송이 운영하는 핀란드방송교향악단의 연주회를 일반 티켓의 거의 반값에 해당하는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핀란드 사회의 복지에 힘입어 예매 사이트를 뻔질나게 드나든 덕분이다.
‘그래. 라흐마니노프의 3번이라면 이 고단한 영혼을 달랠 수 있겠군.’
리무진의 세 배쯤 되어 보이는 중후한 체구의 저상 시내버스에 올라탄 나는 학생 요금 2.6유로를 사뿐하게 결제한다. 이윽고 대성당 정류장에 내린다. 머리에 닿을 듯이 무겁게 가라앉은 하늘 아래로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을 희번덕거리며 내밀고 있는 아우라강을 지나 눈이 단단하게 다져진 오르막길 위에서 나는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경보선수처럼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총총걸음으로 콘서트홀로 향한다. 전신운동 덕분에 보드카를 마신 것처럼 금세 달아오른 몸과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빨간 코를 한 채 로비의 검표원에게 3유로짜리 학생티켓을 당당하게 내민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은 대중적으로 더 사랑받는 2번보다 내가 더 애정하는 작품이다. 그는 미국 데뷔를 염두에 두고 블록버스터급 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1909년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의 기운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라흐마니노프가 늘 가슴에 품고 그리워했을 조국 러시아에 대한 심상과 풍경이 떠오른다. 무려 3만 개의 음표가 속주, 아르페지오, 엄청난 도약, 화려하다 못해 어지러운 코드로 악보 곳곳에 수놓아져 있는데 이것이 연주자의 기교와 음악성을 통해 펼쳐지는 순간, 광활한 대륙감성에 빠져들게 된다. 가령 점4분음표와 8분음표로 이루어진 패시지라던가 양손 모두 피아노의 저음부에서 고음부 사이를 훑으며 횡단하는 상행과 하행 옥타브로 점철된 패시지에서 나는 시베리아를 말달리거나 유라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달리는 환상에 젖곤 한다. 핀란드 헬싱키에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위성 지도로 살펴보곤 했던 시베리아 평원과 우랄산맥, 바이칼 호수, 그리고 ‘스크, 츠크’ 같은 이름으로 끝나는 장소를 떠올리기도 한다.
작품은 내림표가 하나만 붙어 있는 겸손한 라단조로 시작한다. 라흐마니노프는 오른손과 왼손이 유니즌*으로 1주제를 연주하는 27마디까지만 내게 그 겸손함을 유지한다. 그 뒤로는 눈으로 악보를 따라가는 것만도 벅찬 이 악마 같은 작품을 내가 직접 소리로 구현하기엔 어림도 없기에 나는 그저 그의 전주곡 op.23-5번의 일부를 더듬더듬 치면서 그 대륙감성을 어렴풋하게 느낄 뿐이다. 두 배 느린 템포로.
Georgy Tchaidze 라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의자에 앉자마자 주저 없이 연주 사인을 보낸다. 마치 알파벳 자음 조각을 흩뿌려놓은 듯한 성을 지닌 러시아 출신 피아니스트. 어찌 읽어야 할지 난감하다. 이윽고 호쾌한 그의 타건이 선우예권의 그것과도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그러고 보니 둘 다 2017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결선 진출자들이지 뭔가. 바로 이 곡 라흐마니노프 3번으로 선우예권은 우승을 한 바 있다. 포르테에서 몸의 무게 중심을 앞으로 실어 등근육으로 강철 타건을 선보이는가 하면, 빠른 템포의 솔로 파트가 끝날 때마다 회전근개를 사용해 시원하게 양팔을 이완시키는 피아니스트를 보며 피아노는 남자의 악기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건반악기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해머로 현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찰현악기이기 때문이다.
피아노 솔로와 오케스트라가 반복해서 주도권을 주고받기 때문에 서로 맞추기 힘든 이 작품을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는 끊임없이 눈으로 사인을 교환하며 40분이 넘는 여정을 마쳐간다. 강렬한 피날레. ‘군더더기 없이, 하지만 숨 가쁘게’라는 악상기호가 붙어 있는 것 같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코다는 진정한 브라보 유발자다. 마지막 순간 얼굴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두 팔을 건반에서 힘차게 튕겨내는 솔리스트와 힘찬 총주로 호흡을 맞춘 오케스트라에게 박수가 쏟아진다. 대중음악 공연과는 달리 연주자가 오롯이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공연장 환경을 만들 의무가 관객들에게 주어지는 클래식 음악 연주회를 어렵거나 따분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비록 대중음악 콘서트처럼 관객과 음악가 사이의 소통이 활발한 건 아니지만 사실 연주 끝에 보내는 박수에는 그날의 연주에 대한 청중들의 평가와 그네들의 성향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청중 분류법에 의하면 핀란드 사람들은 독일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차분하게 시작된 박수 소리는 커튼콜을 거듭할수록 점점 커지더니 결국 피아니스트를 네 번이나 무대로 불러내고 마지막엔 기립박수로 마무리된다. 좋은 연주에선 미지근하게 시작된 박수를 점차 가열시켜 기립으로 보답하는, 점잖은 외면에 뜨거운 내면을 지닌 핀란드 청중들이다.
기립박수에 피아니스트는 다시 피아노 앞으로 다가가 앉는다. 앙코르곡의 제목을 알려주지 않은 채 연주를 시작한다.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12달)’ 중 한 곡인 것 같다. 강가의 얼음이 채 녹지 않은 늦겨울의 쓸쓸함이 느껴지는 멜로디 때문에 아마도 '2월'이 아닐까 짐작했는데 찾아보니 ‘6월’이다. 생각보다 멜랑콜리한 차이코프스키의 초여름에 허를 찔렸다. 그의 낭만적 우울증이 잘 표현된 곡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가 쓴 돈을 계산해 보았다. 왕복 버스비 5.2유로에 티켓값 3유로. 라흐마니노프부터 차이코프스키까지, 러시아 후기 낭만 피아니즘을 풀코스로 대접한 이 놀라운 구성이 한국 원화로 단돈 만천원이었다. 생각해 보면 서른이 넘은 나이에 홀로 핀란드에 와서 익숙치 않은 언어로 학위논문이라는 걸 쓰고 있는 내가 무탈하게 지난 가을, 겨울을 보내기 위해 바나나 뿐만 아니라 핀란드의 모든 문화 복지가 필요했다. 바나나의 향긋한 속살이 제공하는 탄수화물의 든든함 뿐만 아니라, 껍질을 벗겨내면 핑크빛 속살을 드러내는 바나나가 보여주는 되바라진 예술성을 감상할 미술 전시와 음악, 무용 공연이 필요했다 (연극은 핀란드 관객들 사이에서 혼자서만 웃지 못하는 군중 속의 고독을 종종 안겨 주었기에 제외하도록 한다). 그동안 학생을 위한 문화 복지라는 이름으로 착한 가격에 나의 정신적 허기를 보듬어 준 핀란드 사회를 학위논문의 앞쪽에 실리게 될 감사 인사의 호명 대상으로 적어본다. 학생증과 반값 티켓을 손에 쥐고 공연장과 미술관을 드나들며 위로와 재미, 그리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들을 테이크아웃 해오던 날들을 기억한다. 그렇게 미생에서 완생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힘을 얻는다.
* 악기 혹은 오케스트라 전체가 같은 음 또는 같은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
** 손열음. 2015. 하노버에서 온 편지. 중앙books.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청중’ 참고.
*** 커버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royaloperahouse/24331295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