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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night Mar 12. 2023

신화가 음악이 되는 순간. 진짜 핀란드 노래를 들려줄게

2022. 1.28

작품명: J. Sibelius/ Karelia overture op.10 (까렐리아 서곡)

       J. Sibelius / Lemminkäinen suite op.22 (레민까이넨 모음곡)

오케스트라: KBS교향악단

지휘자: Pietari Inkinen (삐에따리 잉끼넨)

공연일자: 2022.1.28

공연장: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지난달 오미크론 변이가 한국으로 유입되면서 해외입국자에 대한 격리가 다시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KBS교향악단의 새 음악감독 삐에따리 잉끼넨의 입국이 불발되었다. 12월 24일로 예정되었던 그의 취임연주회가 취소되어 난 아쉽게 공연 티켓을 취소해야 했다. 해가 바뀌고 오미크론은 더욱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그는 무사히 내한했고, 드디어 그의 취임 연주회가 열렸다. 아무리 직업이라지만 오늘의 연주회를 위해 열흘간 집콕 생활을 감내했을 잉끼넨과의 만남을 앞둔 이 순간, 마치 핀란드에 두고 온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것 같다. 3호선 남부터미널역에 내려 예술의 전당으로 향하는 걸음마다 감사함과 설렘을 담아 꾹꾹 눌러본다. 까렐리아 서곡과 레민까이넨 모음곡. 둘 다 한국에서는 잘 연주되지 않았던 곡들이다. 이번 연주회의 주제는 ‘Identity’. 핀란드의 국민 작곡가 시벨리우스의 곡으로 자신의 문화 DNA를 드러내면서도 취임무대에서부터 시벨리우스의 작품 중 한국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선택함으로써 현재 서울시향의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오스모 밴스케나 그간 내한공연에서 시벨리우스의 주요 작품들을 선보였던 세계적인 핀란드 출신 지휘자들과 차별성을 보여주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듯하다. 


지인들은 이 날 레퍼토리를 두고 다들 공연기획자가 된 것 마냥 생각을 쏟아냈다. 정체성이라는 주제에 좀 더 부합하기 위해 아브제예바와의 협연으로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대신 시벨리우스의 다른 작품을 연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앵콜곡으로 ‘핀란디아’ 대신 까렐리아 모음곡 중에서 한 악장을 연주했더라면 맨 처음 연주한 까렐리아 서곡과 이어지면서 정체성을 드러내기 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다들 오랫동안 비어있던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게 된 이 젊은 지휘자가 악단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 보였다. 또한 최근 몇 년간 핀란드 출신 지휘자들의 내한 공연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핀란드 음악에 대한 국내 클래식 팬들의 관심과 이해의 폭도 점점 깊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관객들의 기대가 그러했듯, 그의 선택 또한 대중적인 시벨리우스를 비켜갔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까렐리아’와 ‘신화’였다. 


까렐리아는 핀란드만을 중심으로 핀란드와 러시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역으로, 숲과 호수, 그리고 신화와 전설이 넘실대는 땅이다. 19세기말 제정 러시아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시벨리우스가 핀란드의 민속음악과 신화의 중심인 까렐리아에 주목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한편, 강대국 옆에 위치한 지정학적 운명으로 인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한 편이 되어야 했던 핀란드는 패전 직후 배상금의 명목으로 까렐리아 지방의 대부분을 러시아에 넘겨주어야 했다. 졸지에 고향을 잃은 까렐리아 주민들은 살 곳을 찾아 핀란드 전역으로 흩어져야 했기에 핀란드 사람들에겐 아픈 현대사가 스며들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자면 지금은 중국 영토가 되어버린 만주 지역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로부터 백 년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시벨리우스가 까렐리아와 신화를 통해 담아내려 했던 시대정신은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하는 세월의 무상함 속에서 희석되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급속한 세계화와 기술 혁명의 기류를 타고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글로벌 문화 산업의 위세에 눌려 지역의 독특한 신화와 옛이야기들은 젊은 세대 사이에서 그 존재감이 줄어들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조상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던 이야기는 여전히 공동체의 무의식 어딘가에 문화적 유전자로 남아 있는 걸까. 대선배 시벨리우스가 그랬듯이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과 가까이 있으며 아픈 현대사의 현장이기도 한 까렐리아를 취임연주회의 소재로 삼아 진짜 핀란드 노래를 들려주겠다고, 신화가 음악이 되는 순간을 느껴보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지휘자가 무대 위에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 첫 무대에서 만큼은 서구 클래식 음악의 중심인 독일이 아니라 지역의 음악을 선보인 그의 선택은 영리하고 적절했다. 그곳은 세계인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아왔던 파리나 런던이나 뉴욕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토속적이고 독창적인 미학을 지닌 곳이다. 이 지역에서 유래한 까르얄란 삐라까(Karjalan Piirakka, 까렐리안 파이)처럼 말이다. 나뭇잎 모양의 귀리 반죽으로 만든 틀 안에 밥이 들어가 있는 이 신박한 음식은 평소 빵 아니면 밥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의 이분법적 사고를 통렬하게 깨뜨려주었고, 유학 시절 내내 나의 아침 식사를 책임져주기도 했다. 


까렐리아 서곡이 시작된다. Allegro Moderato(조금 빠르게)로 시작된 곡은 느려지다 빨라지기를 반복하며 나아간다. 4분의 4박자로 흥겹게 진행되는 선율에 나는 어느새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리고 있다. 헬싱키에서 출발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하는 Allegro(빠르게)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까렐리아 지역을 관통하여 지나갈 때의 흥분과 설렘이, 내 몸에 기억되어 있던 그때의 감흥이 자연스레 되새김된다. 음악은 이렇게 몸에 각인된 느낌을 순식간에 소환한다. 


인터미션 후 레민까이넨 모음곡 연주가 시작되었다. 유학 시절 핀란드 친구들이 걸핏하면 내게 읽어봤냐고 물어보던 바로 그 서사시를 배경으로 만든 음악이다. 시벨리우스는 까렐리아 지역에서 구전되어 오던 신화를 집대성한 서사시 ‘깔레발라’에서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어 작품을 만들곤 했다. 오늘 연주된 레민까이넨 모음곡은 전체 깔레발라 중에서도 레민까이넨이라는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시 몇 편을 모티브로 하여 만든 네 개의 곡으로 이루어진 교향시이다. 민족 서사시, 건국신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으나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서민들의 일상생활에 대해 묘사하고 있는 것이 깔레발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제국이 없는 역사를 오랜 세월 이어오다 1917년 마침내 공화국을 세운 핀란드 사람들의 이야기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민까이넨 역시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로 잘생긴 얼굴을 믿고 여색을 밝히며 오만하고 무모하다. ‘성적인 강렬한 사랑’이라는 어원을 지닌 자신의 이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그는 남자들이 전쟁터로 떠난 섬의 모든 여인들과 잠자리를 함께 하고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운 킬리키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유혹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충실한 배우자가 되기 위해 레민까이넨은 전쟁에 나가지 않기로, 킬리키는 다른 남자와 춤추지 않기로 약속한다. 하지만 킬리키는 결국 춤바람을 잠재우지 못하고, 레민까이넨 역시 본성을 참지 않고 집을 뛰쳐나가 뽀흐욜라의 공주에게 구혼하러 간다. 결혼 승낙을 받아내기 위해 첫 번째와 두 번째 과제를 가뿐하게 성공한 그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할 장소로 향한다. 스틱스 강을 건너 하데스의 세계에 다다르는 오르페우스처럼, 아버지를 구할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향하는 바리데기 공주처럼, 그 역시 급류가 넘실대는 죽음의 강을 건너 투오넬라에 당도한다. 레민까이넨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업은 투오넬라의 흑조를 활로 쏘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많은 남성 영웅들이 그러하듯, 그는 오만함으로 나대다가 이 마지막 과업을 성공시키지 못하고 암살당한다. 하지만 ‘엄마 찬스’를 통해 부활하고, 결국 무사히 귀환한다.* 신화 속 영웅 이야기의 전형적인 플롯이라 할 수 있는 험난한 여정과 시련, 귀환으로 이어지는 서사 구조,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판타지 요소를 고루 갖춘 이 서사시는 단지 오래전 이야기로만 머물지 않는다. 깔레발라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여인 ‘아이노’는 지금도 핀란드 여성들의 이름으로 흔히 쓰인다.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절대반지’의 모티브가 된 마법 맷돌 ‘삼뽀’는 은행으로, 북쪽 나라를 뜻하는 ‘뽀흐욜라’는 보험 회사로, 그리고 ‘깔레발라’는 대표적인 장신구 브랜드로 핀란드인들의 현재와 함께 하고 있다. 


1악장에서 까렐리아 민속춤의 흥겨움과 레민까이넨과 섬처녀들의 육체적 욕망으로 넘실대던 음악은 2악장에 이르러 검은 물과 급류로 둘러싸인 죽음의 강을 유유히 떠다니는 투오넬라의 흑조를 노래한다. 악보가 존재한다고 해도, 핀란드 출신 지휘자의 음향 조탁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접해 본 적이 없는 핀란드 까렐리아의 자연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추상성이 강한 소리만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오케스트라에게 큰 부담이자 과제였을 것이다. 그것도 새로운 음악감독을 만나 함께 만든 첫 무대여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산함과 정적이 감도는 죽음의 강을 유영하는 투오넬라의 흑조를 묘사한 잉글리시 호른과 첼로의 열연이 돋보였던 연주였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으면 특히 현이 만들어내는 소리에서 국토의 십 분의 일을 덮고 있는 핀란드 호수의 시리도록 푸른 물빛이 떠오른다. 시벨리우스도 호수의 물빛을 소리로 표현하려고 했던 걸까. 암튼 지극히 지역적인 그의 음악은 이제 ‘클래식’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찾아와 눈앞에 짙고 푸른 동핀란드의 풍광을 선사한다. 


서양 클래식 음악의 중심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북유럽의 핀란드에서 온 지휘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악단의 음악감독이 되어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려주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핀란드의 주요 수출품에 자일리톨과 무민뿐만 아니라 지휘자를 추가해야 한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로 전 세계의 주요 악단에서 핀란드 출신 지휘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문가들은 제도와 넓은 저변, 그리고 사회적 분위기를 그 이유로 꼽는다. 핀란드에서는 1993년에 제정된 극장과 오케스트라 지원법을 통해 국가와 지자체가 오케스트라 전체 예산의 70퍼센트가 넘는 금액을 지원하면서도 운영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고 있다. 또한, 인구 550만 명의 나라에 전문 관현악단만 서른한 개가 되고 2018년 한 해 동안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관람한 관객 수가 전체 인구의 5분의 1 이상이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오케스트라 연주자들과 지휘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리고 젊은 세대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알아봐 주는 문화 덕택에 2, 30대가 정치 지도자로 당선되는 것처럼 무명의 젊은 지휘자가 유명 악단의 음악감독을 맡기도 한다. 거기에다 실습 위주의 지휘 교수법으로 유명한 시벨리우스 음악원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의 힘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개별 레슨이 필수인 음대 수업조차도 공교육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국 학생들에게는 모두 무상교육(세금)으로 제공된다.*** 나는 이런 배경에 더해 기초예술교육의 힘을 강조하고 싶다. 핀란드에서는 초중등학교의 정규교육과정에 포함된 음악교육뿐만 아니라 교내외 방과 후 클럽과 공공예술센터, 그리고 사설 기관 등에서 진행되는 기초예술교육을 통해 음악적 역량을 키울 수 있다. 이 기초예술교육은 사실 재정의 대부분을 국가와 지자체가 담당하고 학생이 부담하는 비용이 적기 때문에 공교육에 가까운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위바스뀔라 시의 한 예술학교에서는 4세부터 성인까지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데 주당 1회 한 시간 수업을 기준으로 한 학기(17회) 수강 비용이 85유로(11만 원)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풀뿌리처럼 핀란드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초예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한 학생들이 2017년 기준으로 모두 13만 명이었다고 하니 음악과 함께 하는 삶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평생 벗 삼을 수 있는 악기를 부담 없는 비용으로 배울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하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예술가의 길을 머릿속에 감히 그려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예술교육을 시민이 누려야 할 공공복지 또는 교육복지로 바라보는 문화 속에서 오늘의 삐에따리 잉끼넨을 비롯한 세계적인 지휘자들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음악감독이 되어 한국의 관객에게 인사하는 첫 무대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기 위해 잉끼넨은 까렐리아라는 개성 넘치는 장소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핀란드인들이 켜켜이 쌓아 올린 이야기를 선택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시간과 공간이 함께 온다는 것이다. 잉끼넨을 통해 그를 만든 사회와 문화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더욱 깊어지고 편견은 얇아지기를, 아는 만큼 더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본다. 

 


* 엘리아스 뢴로트. 2011. 칼레발라. 서미석 옮김. 물레.

** Association of Finnish Symphony Orchestras. 2018. Fact and Figures 2018. 2023년 10월 10일 접속. https://www.sinfoniaorkesterit.fi/en/statistics/ 

*** 현재까지는 자국민들과 유럽 연합 및 유럽경제지역(EU/EEA) 국가 학생들에게 대학교육을 포함한 모든 공교육이 무상(세금)으로 제공되고 있다. 하지만 2017년부터 EU 바깥에서 온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대학 등록금을 받기 시작하는 등 점차적으로 영미식 고등교육 재정모델을 따라가려는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더 자세한 논의는 https://brunch.co.kr/@strangerji/387 을 참조할 것. 

**** 김상훈. 2018. 핀란드의 정규 교육과정 내 예술교육 실시 현황. 교육정책네트워크 해외교육동향 기획기사. 2023년 8월 16일 접속. https://edpolicy.kedi.re.kr/frt/boardList.do?strCurMenuId=10091

***** 커버 출처: https://snl.no/Kaleva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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