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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4. 2022

사십 살 인생 #001

부산에서 20년 서울에서 20년 - 사십 살에 내 인생 돌아보기 프로젝트

오늘로 한국 나이 사십 살, 마흔 살이 되었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도 또 아직 젊다고도 보이는 이 애매한 나이가 된 첫날인 2022년 1월 1일 저녁, 두서없는 내 인생 돌아보기를 시작해본다.


1983년 6월 마지막 날 밤 11시 57분, 부산 침례 병원(얼마 전 경영난에 문을 닫았다고 들었다)에서 차녀로 태어났다. 부모님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몇 분만 늦었어도 7월 1일 생이었을" 나는 그래서 친구들에게 내 생일을 이야기할 때 '한 해의 딱 중간에 태어났다' 고 설명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자라면서 꽤 많은 저장식품들의 유통기한이 6월 30일인 것을 발견했다. 참치캔이나 깡통 햄 같은 음식들은 대체로 6월 30일까지 거나 12월 31일까지여서 내 생일이 곳곳에 있다며 반갑다 생각하며 살았는데 철저히 나를 우주의 중심이라 여기며 사는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나고 자란 동네는 내내 '남천동'이었다. 당시에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던 워킹맘이었던 엄마는 언니와 나를 아주 어린 시절부터 '파출부 할머니' 손에 맡기고 일하러 나가셨다. 그때는 파출부 할머니라고 부르고 별다른 호칭도 없었는데 요즘은 시터 선생님, 이모님, 등 하원 도우미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언니의 유년기를 책임지신 할머니는 '뼤뼤마른 할머니' 셨고, 어떤 사정으로 그만두시면서 나의 유년기를 책임지신 '뚱뚱한 할머니'가 다시 채용되셨다. 나는 뚱뚱한 할머니가 처음 오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전 할머니와 정이 듬뿍 들었던 언니는 빼빼 할머니가 가시는 마지막 모습을 제대로 배웅하려 하지도 않았고, 새로 오신 할머니를 반갑게 맞이하지 않고 거부했다. 그래서 어른들이 다소 당혹감을 느끼셨는데 더 어린 나는 빼빼 할머니 생각은 많이 나지 않고, 뚱뚱한 할머니 품에 안겨 낮잠도 자고 해 주시는 반찬도 맛있게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그리고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뚱뚱한 할머니께서는 삼시세끼 밥과 반찬을 해주시고 엄마가 몇 박 며칠 야근을 가시는 때에는 집에서 잠도 주무시고 가셨다. 그런 날에 유난히 과묵하던 아빠와 할머니 사이에서 흐르던 어색한 공기가 아직도 생각난다. 할머니는 평소보다 훨씬 옷도 갖춰 입으시고, 늘 누워서 TV 보던 거실에도 잘 나오지 않으셨던 기억. 지금 생각해보면 하루 종일 두 아이를 봐주시며 가끔은 야근도 하시고, 음식까지 다 해주시던 그 할머니들의 월급을 지불하는데 우리 엄마의 월급이 거의 다 사용되었을 것만 같다. 그리고 CCTV도 없고, 시터 구하는 사이트도 없던 그 시절 좋은 분을 구하기 위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수소문을 했을 것이며, 그분들께 믿고 맡기면서도 산후 한두 달 만에 일터로 나갔어야 했을 그 마음을 생각하면 30여 년 차이나는 워킹맘 후배로써 짠하고도 존경하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마,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어?


남천동 출신, 광남초등학교 출신인 내 친구들이 좋아하는 영화 대사이다. 영화 속에서 경찰서에 잡혀온 주인공이 경찰서장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남천동에서 같이 사우나도 가고 저녁도 먹고 그랬다고 허세를 부리는 장면인데, 우리가 자라던 시절 부산에서 '남천동'이라는 동네가 가지고 있던 위상을 보여주는 듯해서 우리는 이 문장을 인용하거나 인스타에서 써먹기를 좋아한다. 한 친구의 인스타에서 #남천동키드 라는 말도 보고 남편에게 보여주니 웃기다는 반응이었는데, 우리가 어렸을 때 남천동은 그런 동네였다.

택시 타고 "삼익비치아파트요" 하면 꼭 돌아오는 반응 : "와이구야, 좋은 동네 사시네예"

매주 운동장에서 교장선생님이 하시던 말씀 : "부산에서 제-일 좋은 국민학교, 부산 최- 고의 명문 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진학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이 하는 말 : "광남 출신 애들은 싸가지가 없다 아니가"

돌이켜보면 우리 학교는 일 년 내내 바쁜 학교였다. 해양탐구 연구학교에 수영부에 방송부가 빠방 하게 있었고, 보이스카우트, 걸스카우트, 아람단, 해양소년단에 이어 우주소년단까지.. 없는 단체가 없고, 일 년 내내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대청소 및 공개수업을 하느라 바쁘신 선생님들. 그리고 "부산 최-초로" 급식 선도학교를 한다면서 급식실과 급식차 등을 갖추느라 대대적으로 부모님들을 대상으로 기부금을 걷어 모으던 모습까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고 보니 그런 학교가 꼭 좋은 학교는 아닌 것 같지만, 돌이켜보면 학교에 젊은 선생님이 거의 없었는데 나중에 듣기로 광남 국민학교는 웬만한 점수로는 가기 힘든 A급지의 학교였던 것이었다. (지역마다 선생님들이 발령받는 방식이 다른데 서울은 급지 개념이 없이 주소로 가는 것이라 다른 지역보다 훨씬 마음이 편한 축에 든다.) 당시에는 심심치 않게 촌지도 주고받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더 많이 선호하셨던 것 아닐까. 어린 우리들이었지만 촌지로 인해 친구들에 대한 마음의 온도가 급격히 오르락내리락했던 선생님들을 기억한다. 좋은 선생님들이 훨씬 많으셨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선생님들에 관한 에피소드가 더 친구들의 머릿속에 많이 남아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요즘 시각으로 보면 남천동은 '좋은 학군지'였다. 광남국민학교는 초품아인 비치아파트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였고, 걸어 다닐 만한 거리에 좋은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학원 또한 굳이 서면까지 가지 않아도 동네 뒷골목에 즐비했고, 멀리서 여기까지 셔틀을 타고 다니는 대형 입시 학원도 있었으며, 황령산과 광안리를 배산임수의 형태로 둘러싸고 있는 풍광 좋은 동네였다. 토요일에는 시간표를 '체체체체'로 붙여두고, 학급 전체가 광안리 바닷가로 나가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모래성을 쌓고 씨름을 하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운동화를 손에 들고 맨발로 아파트 단지로 하교하던 꿈같은 장면도 생생하다. 전교생이 참여하는 광안리 마라톤 대회도 있었고, 부산에서 내로라하는 수영선수들을 배출하던 수영부 역시 우리들의 자랑이었다. 그땐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모르고 그냥 어른들이 '좋은 동네다' 하시니 좋은 동네인가 보다- 사실 나는 속으로 다른 동네에서도 어른들이 다 똑같이 말씀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하며 자랐는데 어른이 된 지금 전 세계 및 전국 곳곳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우리가 그때 얼마나 좋은 환경에서, 부모님들이 만들어두신 큰 온실 속에서 컸는지 그때는 잘 몰랐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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