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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5. 2022

사십 살 인생 #002

유년기

비교적 어릴 적 기억을 많이 하는 편이다. 지인들이 듣고 소름 끼쳐하는 지점은, '첫 돌 기념' 사진을 찍던 날의 기억이다. 비록 딱 한 장면이지만, 어른들이 어린 나를 어떤 높은 곳에 세워두고는 웃는 얼굴로 멀어지던 기억과 그래서 조금 두려웠던 느낌. 여기다 날 세워두다니! 하는 배신감 등이 떠오르는데 이상하게 어른들은 즐거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인지 나의 '첫 돌 기념' 사진 속에서 돌쟁이 아기는 빨간 의자 위에 울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서있다. 사진을 보고 자라서 그때의 기억이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조금 남아있던 기억이 사진으로 인해 더욱 공고해진 것인지 전후 사정은 알 수 없지만 나는 그것이 최초의 기억이라 생각된다. 아니면 더 최초의 기억일지도 모르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내가 누워서 (이 대목에서 다들 설마? 라며 무섭다고 소리 지른다) 젖병을 빨고 있고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이는 장면이다. 다행스럽게도 젖병에 담긴 것은 분유가 아니라 보리차 같은 물이었던 것 같은데 - 그래서 돌 이전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 - 이것은 사진으로도 남아 있지 않은 장면이라 꿈인지 생시인지 정확한 구분이 어렵다.


니 그때 일곱 살 반으로 월반했다 아니가


나는 네 살까지는 아마도 앞서 말한 뚱뚱한 할머니와 집에서 뒹굴거리며 지냈을 것이고, 다섯 살부터 보육기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삼익비치아파트에는 A상가와 B상가가 있었는데 내가 처음 다녔던 기관은 B상가에 있는 남천 미술학원 유치부였다. 요즘으로 치면 영유의 미술학원 버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때는 미술학원이나 피아노 학원에서 낮에 학원 시설을 이용해 유치부를 운영했었는데 다섯 살 때 다니던 그곳에서는 물감 뿌리고 찰흙에 손바닥을 찍고 또 코카콜라 공장이나 고구마 농장 등으로 견학도 다녔던 것 같다.


여섯 살이 되기 전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던 큰 이모가 우리 집에 오셔서 엄마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이모는 아마도 요즘 말로 '금손'이었는데 원하는 유치원에 가서 기가 막히게 제비뽑기를 잘해서 합격을 얻어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큰언니인 이모와 이런저런 상의를 했던 것 같은데 다섯 살인 나를 불러놓고 "니 하나님한테 기도하는 분도 유치원 갈래, 아니면 부처님한테 절하는 옥련 유치원 갈래?" 하셨다. 부모님 따라 절에 종종 가봤던 나는 고민 끝에 "절 유치원"이라 답했고 그 결과 부산에서 매우 큰 규모로 운영되고 있던 옥련 선원 산하 옥련 유치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여섯 살인 내 눈에도 하얀 타이즈에 네이비색 주름 스커트 원복을 입은 내 모습이 꽤 예뻤던 것 같고, 유치원 규모가 커서 셔틀에서 내린 다음 내 교실인 '무궁화반'을 찾아 들어가기까지는 꽤나 긴장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유치원 교실 안에서 이뤄지는 여러 가지 활동을 다 따라가기에 다소 버겁고 시간이 부족했던 기억이 많이 나고, 같은 반 친구들이 모두 나를 귀여워하거나 보살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친구라고 믿었던 어떤 여자아이가 나중에 알고 보니 내 친구의 사촌언니였는데, 친구가 그 여자 아이한테 '언니'라고 부르니 내 입에서는 쉽게 언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아 당혹스러웠다. 요즘 말로 족보가 꼬인 것이다. 한글 쓰는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고역이었는데, 8칸 공책에서 4칸을 차지하는 정사각형의 그림을 붙인 다음 글자를 따라 써야 하는 건데 나는 도저히 그 그림을 어디서 구해와야 하는지 알지 못했고, 누구에게 물어볼 용기도 없어서 옆에서 쓰고 있는 친구의 공책을 보고 대충 그림을 베껴그리고 글자도 베껴 썼다. 검사받을 차례가 되면 혼날 것 같아서 공책을 들고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녔는데, 결국엔 내 공책에 그림이 붙어있지 않은 것이 발각되어 선생님이 풀로 예전 그림까지 다 붙여주셨다. 그러면서도 '어쩜 이걸 다 그릴 생각을 했냐'는 칭찬인지 꾸중인지 모를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거기서 나는 뭔가 다 쓰거나 그리지 못해서 책상에 앉아서 마무리를 짓고 있는데 다른 친구들은 과제를 마치고 우르르 몰려가 선생님이 읽어주시는 그림책을 듣고 해서 스스로 부진아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척 소심하게 지낸 일 년이었다. - 나중에 스키장에서 스무살 무렵 오랜만에 재회한 초등 동창생도, 지금은 내 친구의 남편이 된 S대 공대 친구도, 유치원 때 잠시 부산에 살다가 원주로 이사 갔다는 교대 동기 녀석 K도 모두 같은 유치원을 나왔다고 하니 당시 그 유치원의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에 K는 빠른84여서 5세 반을 다녔고, 나머지 둘은 제 나이대로 6세 반을 다녔다고 하니, 우리는 언젠가 다시 친구로 만날 운명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족을 붙이자면 대학 후배들과 S대 미팅을 주선할 때 나왔던 후배 R은 이후에 K와 결혼하게 되고, S대 미팅에 참석했던 그 친구는 또 다른 내 교대 친구 L과 친구에서 부부로 발전했다. R과 L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한 적이 없어서 모르는 채 선후배로 지내고 있을 것이다. -


일곱 살이 되면서 나는 집에서 무척 가까운 A상가에 있는 들장미-음악학원 내의 유치반인- 유치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곱 살 여자 친구들을 여럿 만나고, 다섯 살 여섯 살 동생들과 합반 생활을 하면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나대는 일 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즐겁게 하고, 담임선생님을 엄마라 부르며 스킨십도 서슴지 않았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내 성격에 다소 무리를 하는 오버스러운 일 년이었던 것 같다.

이건 나중에 초등학생 무렵 알게 된 사실인데, 여섯 살 때 다녔던 그 옥련 유치원에서 나는 일곱 살 친구들과 같은 반이었다는 사실이다. "니가 그때 가위질도 잘하고 연필도 잘 잡는다고 일곱 살 반으로 월반해서 들어갔다 아이가" 하는 엄마의 설명에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무척 귀여워하며 친구들에게 "얘 너무 귀엽지 않냐" 고 소개해주고, 또 자유놀이시간에 뒷마당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볼에다 뽀뽀를 해주고, 또 온천인지 어딘지로 1박 2일 캠프를 갔을 때 항상 내 옆에서 밥도 같이 먹고 비행기도 조종해주던 그 남자 친구는 '오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렴풋이 연하보다는 연상의 이성에게서 받는 귀여움을 즐겼던 것 아닐까? 하하하. 하지만 어쨌거나 그 뒤로 나는 조기 입학이나 월반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갖게 되었다. 대단한 천재가 아닌 이상 또래들과 지내는 것이 아이에게 가장 큰 정서적 안정감을 준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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