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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6. 2022

사십 살 인생 #003

학창시절

서두에서 언급했던 그 잘난 '광남국민학교' 에 입학했다. 지금은 초등학교가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6학년일 때부터 내년에는 초등학교로 바뀐다는 뉴스가 있었고, 우리는 모두 안타까워하며 마지막 '국민학교' 졸업앨범을 가진 세대가 되었다. 그때도 직감했었다. 우리는 국민학교를 졸업한 구시대 사람이 되고, 우리보다 한 살 어린 후배들은 국민학교를 5년이나 다녔지만 그 기억은 다 지우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신시대의 사람이 되리라는 것을.


아빠, 끝났다. 가자.

국민학교 입학식 때 우리 엄마는 너무 바빠서 (아마도 다른 학교의 1학년 담임이었던 것 같다) 오지 못했고, 회사 다니던 아빠가 오전에 휴가를 내고 펜탁스 카메라를 목에 걸고 내 손을 잡고 입학식에 가주었다. 이미 집으로 배달되어 온 초록색 이름표를 달고 - 우리 땐 그 이름표에 손수건을 다는 아이는 없었다. 코 흘리던 시대는 아니라는 말이다- 운동장에 가니 저기 초록색 푯말이 보였고 '1-5'라고 적혀있었다. 보호자인 아빠에게 내가 갈 곳은 저기라 말하고 줄을 섰다. 남자 담임선생님이셨고, 남자 여자 각각 한줄로 서서 교실에 따라 들어갔다. 선생님의 성함을 크게 칠판에 적으시고 간단한 안내를 해주시고, 칠판에 알림장이라며 뭔가를 적으셨다. 내 기억에 '종합장, 빨간 색연필, 크레파스' 정도였던 것 같은데 창 밖을 보니 다른 엄마들은 다 뭔가를 끄적이는데 우리아빤 그러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서 나도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어 적었더 것 같다. 그리고 집에 가라길래 복도로 나가서 "아빠, 끝났다. 가자" 라고 했다고 한다. 아빠는 입학식에 오면서 내내 작은딸이 학교에 가기에 너무 모자란 애 같고 어린 것 같아서 운동장에서 울면서 돌아오면 그냥 집에 데리고 가야겠다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그 딸이 입학식이 끝났으니 집에 그만 가자고 하는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으신 모양이다. 내가 청소년이 되고도 약주 한잔 걸치고 돌아오시는 저녁에는 그 이야기를 종종 하셨으니 말이다.


엄마는 내 입학식 복장으로 백화점에서 갈색 원피스와 스타킹 그리고 빨간 가죽 구두를 사주셨는데, 그게 당시 친구들이 좋아했던 샬랄라 원피스와 반짝 구두같은 스타일이 아니라 너무나도 엄마 취향이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큰 소리로 no라고 말하지 못했던 나는 "예쁘다"고 입을 모아 말하는 엄마와 점원의 꼬임에 넘어가 그대로 사서 입고 갔는데, 지금 와서 그때 사진을 보면 현재에 입고 있어도 촌스럽지 않은 그런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엄마의 고상한 취향이 몇 십년 뒤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라기 보다는 크게 유행을 타지 않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입학식 이후로도 나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숙제나 준비물을 챙기고 스스로 밤에 가방도 챙겨놓고, 밀린 일기는 새벽에라도 일어나서 쓰고 등교하는 - 본의아니게 - 독립적인 어린이로 자라났다.


광남국민학교에는 부잣집 아이들이 많아서 어쩌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면 항상 맛있는 간식이 가득하고, 아빠는 의사이거나 사장님이셨고, 운전기사가 있는 집도 가사 도우미 이모님들이 계신 집도 많았다. 그래서 3학년 이후로 방과 후에는 혼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던 나를 불러다가 간식도 챙겨주고, 같이 숙제도 하고 가라 하시고, 저녁까지 먹고 가라고 엄마한테 전화해주마 하는 집이 많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집은 그렇게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엄마가 선생님이시라고 이야기하면 그것 만으로도 - 특이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 무시당하지는 않는 기분이어서 은근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내가 엄마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당시 우리학교에는 '학급자랑'이라는 특이한 행사가 있었다. 일년에 딱 한번! 우리반 아이들의 갖은 장기를 모아서 한시간 가량의 프로그램을 짜서 연습하면, 정해진 날짜의 오후 방과후에 방송담당선생님이 우리 교실에 찾아와서 비디오로 찍어가셨다. 촬영 시간은 NG여부에 따라 짧게 끝나기도 하고 하염없이 길어지기도 했는데, 찍고 나서 몇 주 뒤에는 전교에 방영되는 교내방송으로 볼 수 있었다. 교실 안 작은 브라운관으로 보는 우리반의 모습은 어설프기 짝이 없고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쥐죽은듯이 감상했던 그 분위기가 기억이 난다. 반면 다른반의 모습은 - 특히나 다른 학년의 모습은 - 별로 관심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해당 반의 학급자랑은 원하는 사람에게 일정 비용을 받고 판매하기까지 했었다. 나는 당시로썬 드물게 비디오가 없는 집이었어서 그 비디오를 구입하진 않았는데, 그 자료를 아직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다면 한 번 구해서 보고싶다는 생각이 든다. 레파토리는 뻔했다. 주로 반장 부반장이 안내멘트를 하며 시작했고, 전체의 합창이나 리코더 합주로 클로징 했다. 중간에는 아이들의 어설픈 연극, 그리고 수영부 아이들의 메달자랑(웃음 포인트는 수영복을 입고 나와서 메달을 목에 걸고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으며 멋쩍게 웃는 장면이다), 그외 예체능에 특기가 있는 친구들의 독주나 독창 등으로 구성되었던 것 같다. 칠판에는 몽당 분필을 옆으로 눕혀 굵은 글씨로 6-7 등 해당 학급을 표시하고, 미술에 재능 있는 아이들이 나와서 색분필로 꾸몄다. 교사가 되어보니 해마다 학급자랑으로 많은 선생님들이 골머리를 앓았을 것 같고, 당시 젊은 선생님이 맡으셨던 방송반 업무는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고단하고 과중한 업무였던 것 같다.


바닷가에 인접한 학교라는 특성 때문인지 '해양탐구연구학교'라는 타이틀도 몇 년간 달고 있었는데 그래서 인지 중앙현관과 과학실은 약품냄새가 코를 찌르는 여러 해양 생물들의 박제(?)가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학교 안에서 담력훈련을 할 때에 가장 큰 공포심을 자극하는 소품이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런 대규모의 전시품을 가진 학교는 요즘도 흔치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아마 선생님들이 사전에 제작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나의 바다'라는 워크북 교재도 있었다. 바다와 관련된 여러 가지 활동들로 구성된 그 워크북을 열심히 하면 상도 받을 수 있고,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이 전시회에서 잘 된 작품 몇 개를 들춰보며 감탄하셨던 기억도 난다. 우리 학교 친구들은 탐구생활 외에도 '나의 바다'라는 교재에 글씨와 그림을 채워넣느라 꽤나 고생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도 다 선생님들의 업무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힘들게 일하셨던 당시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지금은 대부분 현직에서 물러나 계시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자부심을 당시 선생님들도 느끼지 않으셨을까.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급식'이라는 것도 당시로썬 획기적인 사업이었다. 부산 최초의 급식학교로 선정은 되었는데 예산은 부족했으니 가정통신문을 통해 대대적인 모금 활동이 이루어졌다. (요즘같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 몇십만원씩 몇백만원씩 기여금을 냈고, 내지 않은 집에 대해선 담임선생님들이 꾸준히 언급하며 압박을 주셨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런 모금 기간을 거쳐 5,6학년에 우선 급식이 실시되었는데 나는 그 덕분에 아주 운좋게 도시락을 안가지고 다닌 세대가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서는 처음 1년만 도시락을 가지고 다니고 또 중학교 2학년부터는 급식을 실시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는 집에 가면 혼자 있는 나의 사정을 아시고는 당시 5학년 담임이셨던 것 같은데 (나는 4학년이 되었을 때다) 점심 시간에 들렀다 가라더니, 교실 한켠에서 급식을 먹고 가게 해주셨다. 나는 쑥스러워서 여러번 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어린 나를 보며 당신의 딸아이 생각이 나셨던 것인지 어땠는지 ... 나를 챙겨주려 하셨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여러모로 요란스럽고, 유별나고, 치맛바람 펄럭이던 학교인 광남국민학교는 앞으로의 내 삶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나의 모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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