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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7. 2022

사십 살 인생 #004

이인자의 삶

세 살 터울의 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다 영재다 하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엄마 말로는, 낱말카드 같은 걸 사뒀더니 어느 날 혼자 ㄱㄴㄷ을 깨우쳐서 글자를 읽었다고 하고, 아빠 친구 아이들이 가나다라를 읽기 시작했을 때 천자문을 알아서, 절에 붙어있는 간판들을 읽었다고 한다. 그리고 피아노를 몇 년 배웠더니 학원 원장 선생님이 '피아노 전공을 시켜보자'며 탐내는 학생이 되어있었고, 중학교 때부터는 전교 1, 2등을 하기도 하고 체력장에서 만점을 받기도 하며 우리 집안의 자랑스러운 엘리트 딸이 되어갔다.


반면에 나는 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긴 했으나 운동에는 재주가 없었고, 초등학교 때 공부를 곧잘 하기는 했지만 부산에서 나름 잘 나갔던 '남천여중'에 진학한 뒤로는 전교 몇 등은커녕 반에서 5등 안에도 들지 못하는 정도의 중위권 학생이었다.


언니 있는 사람? 아, 니가 ㅇㅇ이 동생이가?


언니가 막 졸업한 남천여중에 뒤따라 입학한 나는 1학년 교실에 들어오는 과목별 선생님마다 반가워하며 우리 언니를 아신다는 사실이 기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반편성고사 성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서 반에서 두세명 안에 들었었던 나는 으쓱해하며 'ㅇㅇ이 동생'이라는 딱지를 흔쾌히 달았으나, 그 후 이어진 내신에서는 그다지 두각을 드러내지 않았다. 반장선거에서도 몇 표 얻지 못해 '선도위원'이 된 나는 그 뒤로 점점 선생님들의 뇌리에서 잊혀 간 ㅇㅇ이 동생이 되었다.

그 잘난 광남 국민학교를 나온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여중에 진학했지만, 근처에 있던 동명의 초등학교 출신 친구들이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다. 그리고 동창들 중 일부는 당시 신도시로 새로운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던 해운대로 많이들 빠져나갔고, 또 집안에서 어느 정도 밀어주는 예체능 쪽 재능 보유자들은 일찌감치 진로를 예체능으로 잡고 예술중학교에 진학한 상태이기도 했다. 블링블링한 동창생들에 비해 다소 수더분했던 나는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수더분한 새로운 친구들이 편하고 좋았다. 그리고 그 아이들과 친해진 다음에는 "니도 광남 출신이가?" 하며 놀라워하는 모습이 웃기기도 했다. 이유는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꼭 자기네랑 같은 남천 국민학교 출신인 것만 같은 그런 익숙한 모습, 흔한 얼굴의 소유자였고 또 럭셔리함과는 거리가 멀었겠지.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이미지 또한 좋았다. "알고 보면 부자 아니가?" 하는 오해를 즐기기도 했다.


초등학교에서는 3학년부터 6학년까지 학기별로 총 8번의 반장선거를 치렀는데 희한하게도 나는 선거 때마다 반장보다 한두표 모자란 '여자 부반장' 이 되었었다. 요즘처럼 남자 회장, 여자  회장, 남자 부회장, 여자 부회장을 뽑는 형식이었다면 내가 여자 반장이었을 거라는 상상을 하긴 하지만.. 그 당시 우리 학교 제도는 가장 많은 표를 얻은 1인이 성별에 상관없이 반장이고 그 뒤로 많은 표 순으로 부반장 둘이 남, 여로 선발되고 그 뒤로는 총학생체미 (총무부 학습부 생활부 체육부 미화부) 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희한하게도 2학기에 또 선거를 하면 재 출마가 가능했는데, 1학기 때 임원이었던 다른 아이들은 떨어져도 나는 당선이 되었다. 그것도 또 '여자 부반장'으로... 그래서 1학기 때 학급 일을 해보았던 나에 대한 담임 선생님의 신뢰도가 높아서 나는 자연스럽게 2학기에도 갖가지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부반장이었다. 딱 한번, 5학년 2학기 때 전학 온 예쁘고 당찬 여자 친구에게 밀려 그 학기에는 총무부장을 맡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부반장으로 장기집권을 한 덕분인지 많은 동창생들은 내가 반장이었다고 기억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만년 여자부 반장이었고,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 선도부장 학습 부장 같은 작은 업무를 맡았는데...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언니보다 뒤에 있는 둘째 딸, 매번 임원 선거에서도 두 번째 세 번째 자리를 맡는 이인자의 삶이 가끔은 속상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래서 속편 하다 생각하며 살았던 것 같다.

대신 언니가 잘하는 영역 말고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보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던 것 같다. 그놈의 피아노는 아무리 열심히 다녀도 재미를 못 붙이겠던데 그 대신 나는 미술학원이랑 서예학원을 참 좋아했다. 언니는 중학교 때 다른 과목은 거의 만점이었는데 희한하게 미술에서 자꾸 1점 정도가 깎여서 무척 속상해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리고 운동신경이 없는 건지 학교에서 달리기를 하면 늘 조에서 꼴찌를 도맡아 했고 중학교에서도 체력장은 거의 5등급 정도였는데, 대학교 이후 스키를 배우면서 겨울 스포츠에 푹 빠져 십여 년을 시즌방 멤버들과 어울려 지냈다. 친구와 해외여행을 가면 스카이다이빙도 하고, 놀이동산에 가면 꼭 최고 난이도의 롤러코스터를 줄 서서 타는 익스트림한 나의 취향은 우리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나만 가지고 있다.


중학교에서 'ㅇㅇ이 동생'이라는 이름에 슬슬 부담을 느꼈던 나는 자연스럽게 동네 친구들이 가장 많이 진학하는 ㄷ여고에 가서 선생님들의 많은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엘리트가 많았던 남천여중에서는 - 교육청 고사를 보면 부산시 전체 1등을 도맡아 하던 여중이었다. 2위인 중학교와는 평균 1점가량이 차이 났던 것으로 들었다 - 반에서 딱 7등 정도 하는 평범한 성적이었는데 웬일인지 ㄷ여고에 가서는 반편성고사부터 전교 4등인지 하는 성적이 나왔고, 학급에서도 내신은 그다지 볼 것 없었지만 모의고사 등에서는 꽤나 좋은 성적이 나오곤 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암기에 약해서 도덕이나 역사, 체육 필기, 음악 필기 등에서 자꾸 점수를 깎아 먹고, 대신 국어 수학 영어 등 주지교과는 특별히 따로 시간 내어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은 점수를 받았는데 그 덕에 수능에서는 별로 불리하지 않은 타입이었고 큰 시험에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성적 빨 인지 몰라도 나는 ㄷ여고에서는 2학년과 3학년 때 연달아 학급회장이 되었다. 초등학교 때와는 달리 고등학교에서의 학급회장은 명예직보다 봉사직에 가까웠다. 학급 대표로서 친구들의 의견을 모아 담임선생님께 전달하기도 하고, 교무실에서 전하라는 내용을 전하기도 하면서 나는 그런 약간의 책임감이 있는 위치에 무척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대학교에 가서도 과대표나 과학생회장 등을 어쩌다 맡게 되었을 때 큰 부담감 없이 '그냥 하면 되지 뭐 큰일 나겠어' 하는 마인드로 한 학기씩 또는 일 년씩 퀘스트를 수행하며 조금씩 성장해갔다. 유치원 때나 초등학교 때의 나는 다소 소심한 편이어서 선생님이나 친척 어른들과는 사사로운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웠고,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하고 친구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곤 했었다. 그런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이전의 나를 잘 모르는 새로운 그룹으로 나아가면서 조금씩 그런 답답한 점을 개선하고 이미지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더니 점점 하고 싶은 말은 어느 정도 하는 성격이 되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초등학교 때 동창들은 나를 그렇게까지 소심한 캐릭터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막 나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하고 사는 모습이었다고 하니, 나 자신에 대한 나의 기록도 100% 믿을 것은 못 되는 모양이다. 이인자의 삶을 살던 내가 이제 와서 일인자가 되었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실제로 일인자가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어딜 가나 요즘 말로 인싸력은 발휘하는 편이다. 인싸력의 근원은 나의 비상한(?) 기억력과 스토리텔링에 있다. 연애 초반 그리고 신혼 초에 우리 남편은 나랑 이야기하다 말고 "너 그러지 말고 글을 써"라고 조언해주곤 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건 마치 무슨 독재권력자의 위인전을 읽는 것처럼 허황되고, 자기애로 가득 찬 어린 시절 성장기라며- 그런데 또 듣다 보면 재밌기도 하고, 너의 친구들 스토리를 듣다 보면 인간관계가 마치 삼국지와 같다며 - 그런 것을 수다 떠는데 다 소모하지 말고 글로 남겨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노트북을 펴고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셈이다. 스무 살부터 삼십 대 초반까지 어딜 가나 핵인싸의 삶을 추구했던 나는 결혼하고 아이 둘이나 낳고 키우면서 휴직과 복직을 반복했더니 지금 근무지에서는 빼박 앗싸이다. 코로나로 다른 학년 선생님들 얼굴은 2년째 아예 뵌 적도 없고 성함도 학년도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내 학급 운영하기도 바쁘고, 육아시간에 맞춰 퇴근하려면 진득하게 앉아서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인싸의 삶으로 돌아갈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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