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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8. 2022

사십 살 인생 #005

꿈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다

내 어릴 적 꿈은 '간호사'였다. 사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섯 살 때 다녔던 유치원에서 엮어주신 작품집 맨 앞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초등학교 때 그 작품집을 열어보고 "응? 내 꿈이 간호사였다고?" 라며 깜짝 놀랄 만큼 생소한 장래희망이다. 돌이켜보면 유치원 때 내가 접했던 많지 않은 직업인 중 그나마 간호사 선생님들이 가장 예쁘고 상냥하고, 그리고 뜬금없지만 '손이 차갑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래서 여섯 살 때 선생님이 거기다가 뭘 쓸까? 하셨을 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간호사요'라고 한 것 아닐까 추측한다.


그 뒤로 나름 나의 장기를 발휘하면서 초등학교 때부터는 줄곧 '화가'가 장래희망이었다. 미술을 좋아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을 때 아는 직업이 화가 뿐이었을 거다. 고학년쯤 되면서 '디자이너'라는 조금 더 뽀대 나는 직업을 쓰기 시작했고, 중학교에 가서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웨딩드레스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직업탐방 수행평가 숙제 때문에 친구와 동네 웨딩드레스샵에 인터뷰를 한답시고 방문한 적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각양각색의 수행평가로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동시에 재미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해 주셨던 도덕 선생님이었는데, 그래서 온갖 기법의 다양한 학습지로 채워진 A4 클리어 파일을 우리는 다 한 권씩 가지고 있었다. 암튼 그 많은 수행평가 중 하나로 직업 인터뷰를 하러 갔는데, 직접 가서 본 웨딩드레스 디자이너라는 직업은 생각만큼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영화에서처럼 뽀대 나게 스케치만 휙 하면, 누가 알아서 만들어주는 줄 알았는데, 한 땀 한 땀 손으로 진주 구슬을 꿰고 있던 디자이너분의 모습을 보고 '헉 이거 정말 노가다군' 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와 같이 디자이너를 꿈꾸던 학원 친구가 - 그때는 학교에서 다른 반이어도 학원에서 두 시간 남짓 같은 반에서 수업을 들으면 또 친구관계를 꽤 깊게 맺곤 했었다 - 함께 다니자며 입시미술 학원에 나를 데려갔다. 거기 가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예체능 계열로 전향(?)한 언니 오빠들이 미대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고1 초반에 찾아온 우리는 가장 어린 축이었다. 간단하게 데생부터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 1학년 햇병아리인 우리들에겐 그러지 않았지만 입시생인 고3 선배들은 정해진 시간 안에 로봇처럼 착착 그려내지 못하면 손바닥을 맞기도 하고 곤장을 맞기도 하는 살벌한 입시 전쟁터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이 길은 내 길이 아니구나'라는 걸 느꼈던 것 같다. 입시미술학원 등록비가 꽤 비싼 데다가, 나는 갑자기 ㄷ여고에서 꽤나 좋은 등수를 받기 시작했고, 또 매일 미술학원을 다니려면 그동안 다니던 영어 수학 학원은 다닐 시간이 도저히 물리적으로 나오질 않았다. 아 이래서 큰 이모가 '미술 시키려면 처음부터 예고를 보내는 게 좋다' 고 하셨구나 하고 이해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미술 입시를 준비하려면 일찌감치 내신을 포기하고 실기에 뛰어들어야 하는데 그러기엔 공부 쪽에 미련이 너무 많이 남았던 나는 그래서 과감히 "엄마, 나 미술은 취미로 할게요"라고 선언하고 입시미술학원에서 발을 뺐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는 '이해찬 세대'라고 불리는, 공부 안 하는 세대였다. 공부 말고 뭐라도 하나만 잘하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기조로 교육과정과 입시에 큰 변화가 있었고 (정확히 어떤 식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야자도 모의고사도 금지된, 공부가 금지된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공립고등학교를 다녀서 교육청에서 하라는 대로 야자도 안 하고 모의고사도 안치고, 정해진 일과만 소화하고 하교하면 남천동과 광안리 일대에는 우리밖에 없었다. 중학생들은 우리보다 하교가 늦었고, 고등학교 선배들은 야자를 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뭐 하나 잘하는 게 뭔지 찾아볼 기회도 없이, 우리는 광안리 해변을 거닐고 패스트푸드점을 기웃거리며 여러 가지 고민을 나누고 또 우정을 쌓아갔다. 선생님들께서는 "느그가 광안리 상권 다 살리고 다니제? 광안리에 발 담그면 느그 수능 점수 1점씩 내려가는 거다"며 윽박지르셨지만, 그때 우리는 한 시간에 천 원이면 신나게 놀 수 있는 노래방, 당구장, PC방을 드나들며 행복한 추억 쌓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고2 겨울방학을 앞두고 첫 모의고사를 치렀다. 모의고사라는 걸 처음 쳐서 몰랐는데 희망 대학교와 과를 3 지망까지 쓰는 란이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공부를 하면서도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면서 더 큰 깨달음을 얻고 이해하는 타입이어서 그쯤부터 교사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영어가 나을까 수학이 나을까 고민하면서 그래도 뭔가 있어 보이는 S교대부터 1 지망에 넣어보고, 그 이후 지망은 서울에 있는 사립대의 약대나 수학교육과 등을 적었다. 앞서 말했듯 내신보다 큰 시험에 강했던 나는 모의고사마다 S교대는 안정권으로 나왔다. 모의고사를 다 믿을 수야 없겠지만 그래서 나는 S교대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겠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왜 교대 가고 싶냐고 아빠가 물어보셨을 때 "응 아빠 나는 그냥 가늘~고 길~게 안정된 삶을 살고 싶어요. 너무 깊이 공부하지 않고, 방학 때는 나 하고 싶은 것도 하면서요. 평생 치열한 경쟁에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막 웃으시더니 조금은 허탈한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래. 그거 참 좋은 대답인데 말이다. 아빠는 그걸 사십이 넘어서 깨달았는데 열여덟 살인 니가 그렇게 말하니 아쉽네" 그래서 내가 말했던 것 같다. "아빠는 사십이 되어서 깨달은 것을 나는 벌써 깨달았으니 얼마나 다행이에요?" 하고 말이다.


나는 고3 내내 모의고사 시험지에 늘 1 지망으로 S교대를 적어냈다. 그리고 교대 가려면 모든 과목을 잘해야 한다길래, 마지막까지 가정이나 윤리 등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나는 역사가 완전 쥐약이어서 사탐은 4등급인 날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국사는 12문제 중 4문제만 맞은 최악의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두고는 EBS에 접속해서 가장 유명한 국사선생님의 특강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었다. 자연계였던 나는 수학 문제만 풀면 잠이 다 달아나고 신나는데, 역사문제집은 왜 그렇게 졸렸는지... 어느 여름날은 보충학습 시간에 할아버지 역사 선생님의 특강을 모두가 엎드려 자는 자세로 듣고 있었다. 평소 점잖으신 선생님께서 그날은 참기 어려우셨는지, 1분단 맨 앞자리 친구부터 문제집을 낚아채 어디까지 풀어져 있는지 확인하셨다. 그리고 텅 빈 문제집을 확인하시고는 그 문제집을 돌돌 말아 친구들의 머리를 내리치셨다. 펑 펑 내리치는 소리에 하나 둘 잠에서 깨고 급히 답이라도 적으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모두 다 결국엔 머리를 내어드렸다. 도미노처럼 하나씩 선생님께 맞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가장 앞장서서 해드뱅잉을 하고 있던 반장이란 녀석 - 바로 나란 놈 - 가장 괘씸하게 생각했던 내가 지금 강의 중이셨던 부분보다 더 뒷부분까지 풀어져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눈을 크게 뜨고 두 번 정도 더 들춰보시고는 문제집을 던지고 (때리지 않으셨다) 다음 친구에게 넘어가셨다. 아이들은 반장인 나에게 특혜가 주어졌다고 생각했는지 나중에 내 문제집을 확인했는데 정말로 미리 다 풀어져있어서 황당해했다. 그만큼 나에게 역사는 간절한 과목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친구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던 것 같다. 노력한 만큼 수능에서 성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역사를 다룬 드라마를 보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조선시대 왕의 순서를 외우지 못하고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했던 단체의 이름을 구별하지 못한다. 역사는 여전히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제대로 역사 공부를 해서 한국사 관련 자격증이라도 따면 이 트라우마가 없어지려나 모를 일이다.


아무튼 나는 - 남들이 보기엔 무척 순탄하게 - 나름대로 고군분투 끝에 S교대에 합격했다. 수시 지원도 했었는데 당시 최종 커트라인이 무려 수능 1등급이었던 콧대 높은 S교대여서 면접만 보고 떨어졌다. 나는 자연계여서 인문계 친구들보다 상대적으로 좋은 등급 받기가 어려웠는데, 그래서 2등급임이 뻔히 예상되는 상태였지만 내가 그렇게 가고 싶던 S교대가 서울 어디에 붙어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이나 해보자 하는 심경으로 면접을 보러 갔었다. 교대역에 내리자마자 바닥에 깔린 빙판길이 어찌나 미끄럽던지.. 그리고 그 길을 서울 아이들은 어찌나 잘 걸어가던지.. (나중에 생각해보면 다 서울 아이들은 아니었을 테지만)

'내가 여기를 정시로 꼭 다시 와서 붙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정시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날 밤, 친구들과 경성대 앞 맥주집에서 치맥을 먹고 있었는데 개통한 지 얼마 안 된 핸드폰으로 엄마가 전화를 걸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합격을 전해주셨고 (발표날보다 하루 먼저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했다) 나는 눈물이 조금 났던 것 같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절친 관계를 유지하던 내 베프들은 맥주집이 떠나가라 큰 목소리로 합격을 축하해주고, 일면식도 없는 주변 사람들에게 내 자랑을 해주었다.


교대에서 4년을 충실하게 놀고(?), 임용고사 공부에 인생 최고의 전력투구를 한 끝에 나는 스물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교사가 되었다. 당시 첫 근무지였던 초등학교에는 한국 문화에 무척 관심이 많던 또래 원어민이 있었는데, (H.O.T. 의 강타를 너무 좋아해서 군입대 현장에까지 찾아간 열렬한 팬이었다. 연예가중계에 잠시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었는데 요즘은 어디서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원어민 동생) 오후에 선생님 중 희망자 몇 명을 모아서 30여분 영어회화 소모임을 했었다. 재능기부 차원의 수업이었지만 나름 주제를 정하고 대화거리를 준비해서 가곤 했는데, 어느 날 주제가 'my dream'이었고, 나는 위에서 풀어놓은 나의 꿈 이야기를 간단하게 (한국어로는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 있는데 영어로는 매우 심플했다. 놀랍게도) 소개했다. 그랬더니 그 원어민 선생님이 "그럼 너는 꿈을 다 이룬 거네"라고 말해주었다.

Teachers can be everything you wanted to be


선생님은 아이들을 간단히 치료해주기도 하고 (간호사), 그림도 그려주고 (화가), 영어 선생님이나 수학 선생님 중 고민했다고 했는데 결국 그것을 다 가르치게 되었으니, 그리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은 게 최종 꿈이었으니 나는 그 꿈들을 다 이루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 물론 영어였지만 나는 대강 다 알아들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내가 되고 싶던 것을 결국 다 이룬 셈이구나 하고 그때 아주 기분 좋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요즘은 취미로 재봉틀을 해서 아이들 옷도 지어주고 하니 디자이너가 되고 싶던 꿈까지 이룬 셈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나는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남편이 보기에 조금 무서울 정도의 '긍정 회로'를 돌려서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어른들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아이들 대상으로 진로교육을 시작할 때 꼭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너희가 지금은 어려서 진로가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 정하기 어렵겠지만,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면 언젠가 그 길을 향해 조금씩 가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선생님(나)처럼, 원하는 것을 찾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면 고맙게도 아이들이 약간씩 알아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어준다.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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