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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09. 2022

사십 살 인생 #006

봉사활동

중학교 때부터 학교에서 난데없이 봉사활동이란 걸 해오라고 했다. 다른 선진국 아이들처럼 봉사활동을 많이 하면 그걸로 대학도 갈 수 있고, 취업에도 유리하니 일 년에 몇 시간씩 의무적으로 채워오라는 내용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막막해하던 중, 같은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진학한 친구 T가 제안을 해왔다. 의사인 아버지가 일하시는 모 대학 병원에 가서 여름 방학 동안 같이 봉사활동을 하자고. 도장은 아빠가 찍어주실 거라고. 흔쾌히 오케이 했는데, 그 뒤로도 몇 명이 더 함께하고 싶어 해서 방학 중 봉사활동 멤버는 네 명 정도로 늘었다.


봉사활동을 가기로 한 날, T의 아버지께서는 친히 승용차로 우리 모두를 태워 당신 직장에 내려주셨고 우리는 거기서 봉사활동 담당자분께 약간의 안내를 듣고 흩어져서 차트 정리 등 간단한 활동을 했던 것 같다. 손으로 쓴 차트들이 가나다 순으로 꽂혀있는 큰 서고 같은 곳이었는데 촘촘히 살펴보다 보니 순서에 맞지 않는 것도 꽤 발견되어서 바로잡는 기쁨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병원 장부에도 이름을 쓰고, 병원에서 떼어주는 서류에 직인을 받아서 그 해의 봉사활동을 며칠에 걸쳐 다 채울 수 있었다. 그 후 T는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서울로 이사를 가버려서 의사 찬스는 여기까지였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집 근처 동사무소(주민센터)에 가서 다짜고짜 “봉사활동하러 왔는데요” 하는 방식이 먹혔다. 거기는 삼삼오오 나처럼 봉사활동을 하러 온 학생들이 있었고, 거기서도 사무실 뒤편 주민등록 장부 같은 것을 정리하는 일이나 봉투에 뭔가 넣고 붙이고 하는 일을 했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줄 만한 봉사활동 거리가 그렇게 많지 않아서 공무원들이 별로 우리를 반기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나는 친구들과 어떤 서클에 들어갈까 하고 함께 들어갈 만한 곳을 찾아 기웃거리다가 RCY라는 봉사 동아리에 지원했다. 영자신문부나 과학모형부 같은 곳은 필기시험에 면접까지 있어서 당락이 갈릴 수 있기 때문에 피했다. 주말에 같이 봉사활동이나 다니면 되겠다 싶어 지원한 그곳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날라리 집단’이었다. 그냥 지원만 하면 다 받아준다기에 점심 시간에 나가 본 등나무 벤치에는 교복을 타이트하게 줄여 입고 노란 빗자루 - 염색과 탈색을 반복해서 상한 상태의 - 머리를 하고 눈썹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언니, 아니 선배님들이 기다리고 계셨다. 어랏, 나랑 내 친구들은 그렇게 노는 축이 아닌데 어쩌지 하는 고민도 잠시였고, 나와 함께 가입한 다른 동기들은 점점 그 언니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갔다. “RED CROSS OF YOUTH” 청소년 적십자 단체라는 뜻인데, 당시 우리 동아리를 지도하시던 남자 선생님은 사실 별다른 특기가 없어서 RCY를 맡으신 것 같았고 CA시간에도 출첵만 하시고 교실을 비우셨다. 그럼 그 시간 동안 2학년 선배님들은 우리에게 몇 대 원칙과 선서 같은 것을 교육하고, 언제까지 외우지 못하면 오티(모여서 혼나는 것을 말했음)다.. 만나면 90도로 인사해라 등 주의사항을 일러주셨다. 나는 다행히 그런 것을 잘 외웠고, 또 선배님들께 깍듯하게 인사하는 것을 잘했기 때문에 RCY에 어울리지 않는 후배라고 미움받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시험 기간에 다 같이 각자 공부를 하고 있으면 “오 우리 OO이가 RCY의 희망이야” 하며 추켜 세워 주기도 해서 (비아냥거린 것인데 못알아들었는지도 모르지만) 기분이 좋았으니 말이다. RCY에서 다 같이 무슨 활동을 나갔다 오면 거기서 주는 봉사활동 확인서 등을 받아서 학교에 제출하는 재미도 쏠쏠했고, 2학년이 되면 나도 저렇게 무게 잡고 후배들을 훈육해야 하나 하는 걱정도 슬그머니 들었다.

동아리마다 그 당시에는 인근 남고의 같은 동아리 멤버들과 미팅 비슷한 - 대면식이라고 부르던 - 행사를 잡기도 했었는데, 그날은 몰라보게 예쁜 모습으로 단장한 선배님들을 보는 재미도 있었다. 예쁘고 성격도 좋은 선배님들은 팬심으로 흠모하는 동기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가장 즐겁게 기억하는 행사는 체육대회였는데, 운동신경이 지지리도 없던 내가 그날 따라 발야구에서 만루홈런을 치는 바람에 홈으로 들어오는 길에 여러 ‘오빠야’들이 손을 내밀어줘서 내 손으로 다다다 내리치며 여유롭게 들어왔던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떠오른다. 지금 생각해보니 다들 예쁘게 입고 와서 적당히 하는 발야구였는데 나 혼자 너무 열심히 한 건 아니었는지?


알씨와이 오래했지만 니 같은 학생은 처음본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RCY 담당 선생님이 바뀌셨는데, 이 분은 몇십 년간 RCY를 맡으신 분이라고 하셨다. 그동안 방치되다시피 한 우리 동아리를 진정한 봉사동아리로 만드시려는 걸까? 하고 내심 기대했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부르셨다.

“ㅇㅇ아, 선생님이 알씨와이를 몇십 년 했는데 학교마다 분위기는 비슷하그든? 근데 니 같은 학생은 처음 본다. 교무실에 알아보니 다들 좋게 말씀하시더라. 그래서 말인데 이번 적십자의 날에 니를 모범 단원으로 추천할테니 표창장 좀 받아볼래?”

이미 자체 투표와 선배님들의 임명으로 뽑힌 회장이 있었던 터라 그 친구는 어쩌냐 여쭈니 봉사단체 회장들은 졸업식 때 대표로 표창장을 받게 되어있으니 중복이라 상관없다고 하셨다.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흔쾌히 좋다고 했고 혼자 버스 타고 사직구장에 가서 그 표창장이라는 것을 수령해왔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학생부에 외부 상장으로 한 줄 기록되어 대학 입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나는 또 하나의 외부 상장을 얼떨결에 받은 적이 있는데, 그건 바로 고1 때 부산 전체의 1학년 학급 임원들을 모아 몇 박 몇 일로 길게 합숙처럼 들어간 임원 수련회 에서 였다. 그 수련회는 부산시교육청에서 대대적으로 진행하는 행사였던 모양이다. 한복까지 준비물로 챙겨 산골짜기 깊은 수련원까지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부산 전체의 각종 고등학교에서 온 1학년 임원들이 모여있었다. 조별로 학교가 마구 섞이기 때문에 룸메이트도 조원도 모두 초면인 다른 구의 동갑내기 친구들로 구성된 그곳에서 우리는 리더십 트레이닝이라는 명목 아래 강연도 듣고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조별로 토론학습 같은 것도 했다. 중학교 이후 내외하고 지내던 초등학교 동창들이 임원이랍시고 뽑혀 온 걸 보니 키도 커지고 여드름도 듬성듬성 난 꼴이 우스웠다. 서로 인사도 안 하고 괜히 곁눈질하다 어깨만 부딪히며 어이쿠 하고 지나가는 유치한 꼴이라니! 암튼 그곳에서 난데없이 첫날 진행된 조원 투표에서 나는 당당히 부조장이 되었고 (여기에서 까지 나는 이인자력을 발휘했다) 조장은 어딜 가나 인원점검 및 점호를 맡은 대신 부조장인 나는 매번 식사 때마다 우리 조의 식탁을 닦는 행주질 + 마지막에 식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웃긴 건 그 결과로 마지막 날 주는 선행상인지 봉사상인지는 부조장에게 주고 봉사시간까지 줬다는 것이다. 행주질까지 할 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거기서 나는 매일 열심히 행주질을 하고 빨아 널어댄 결과로 봉사활동 시간과 외부 표창장을 얻어 대학입시에 또 한걸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총점으로 보면 미미한 차이지만, 보통의 아이들이 외부에서 표창장을 받을 기회가 많지는 않기 때문에 나에겐 특별한 두 줄이었다. 사교육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외부 상장 중 수학경시나 미술대회 등은 인정이 되지 않고 오로지 표창장만 인정되던 때였다.


생각해보니 RCY에서는 내가 회장도 아니었고, 학급 임원으로 간 수련회도 부반장으로써 참석한 것이었고, 거기서도 조에서 부조장이있는데 어찌 이인자에게 자꾸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던 것일까?

이러니 이상하게 나에게만 행운이 자꾸 찾아오는 느낌, 온 우주가 나를 도와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가 있을런지. 물론 당시에는 그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원하던 대학에 원서를 쓸 때에는 이게 다 운명인 것만 같고, 운을 다 여기다 쓴 건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누구 머리에서 나온 입시정책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사활동을 잘하면 대학에 보내준다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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