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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10. 2022

사십 살 인생 #007

선생님의 딸로 살아가기

우리 집안은 유독 선생님이 많은 집안이다. 우선 엄마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35년 재직하셨고, 같은 단지에 살던 큰 이모가 아이를 셋이나 낳기 전에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자라서 교대를 나와 선생님이 되었는데, 내 친언니도 사범대를 나와 지리 선생님이 되었다. 나보다 몇 달 먼저 결혼한 언니의 시어머니께서 당시 신혼집 인근 초등학교에 재직 중이셨고, 그 후 결혼한 나의 남편이 초등학교 교사이다. 그리고 남편의 두 누나 - 나에게는 시누이 - 가 모두 같은 지역 초등학교 교사이고, 남편의 사촌동생도 인근 초등학교 교사이다. 나의 아이들 중 누구 하나 교대를 가겠다고 해도 이상하거나 의아할 것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다.

선생님이랑 목사님 자녀는 모 아니면 도야


나처럼 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재직 중인 많은 교사맘(워킹맘 대신 동료들이 쓰는 말)들은 자녀의 입학 시기를 앞두고 비슷한 고민을 한다. 내 아이를 데리고 다닐 것인가 휴직을 할 것인가. 다른 직장보다 육아휴직이나 출산휴가에 관대한 편인 이 곳에서 한 자녀당 쓸 수 있는 육아휴직은 3년에 육박한다. 법적으로 뿐 아니라 직장내 문화적으로도 두 아이 키우며 6년을 하는 것이 전혀 민폐이거나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건 아마도 1년 이상 휴직을 했을 때 대체 인력을 새로 뽑기가 편하고, 내가 다시 꼭 그 학교의 그 자리가 아니어도 복직을 신청했을 때 어디론가 새로 발령을 받기가 쉽기 때문에 시기만 잘 맞추면 학사일정에 큰 무리를 주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첫 아이가 올해 7세가 되었기에 내년에는 입학에 맞춰 1년간 휴직을 할 생각이다. 엄마가 일하셔서 학창시절 내내 빈 집에 문을 따고 들어왔던 기억, 무엇이든 혼자 알아서 해냈어야 했던 쓸쓸함을 우리 아이는 느끼지 않게 해주고 싶다 - 는 거창한 이유보다는, 아기가 너무 어렸을 때 휴직을 했어서 그때는 먹이고 씻기고 재우기 바빴는데 이제 진정한 의미의 육아휴직으로 아이가 처음으로 학교에 입학해서 보내는 그 시간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보살펴주고, 또 나만의 여유로운 오전 시간도 갖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 후에 내가 우리 아이와 같은 학교로 발령이 날지, 아니면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날지는 알 수가 없지만 각각 장단점이 비교적 명확하기 때문에 나는 '아이와 다르지만 너무 멀지는 않은' 학교로의 발령을 희망한다. 같은 학교에 다녔을 때 본의 아니게 - 각종 대회나 시험 등에서 아이가 좋은 결과를 냈을 때에 -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과 사춘기 아이가 나와의 등하교를 과연 달가워 해줄까에 대한 고민, 그리고 아이가 모범생일지 문제아일지 그것은 신(神)만이 아는 문제이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계속 육아가 이어지는 숨막히는 상황을 애초에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교사랑 목사 자식은 모 아니면 도' 라는 말이 있다. 부모가 도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보통 이상의 반듯함을 요구하는 직업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자녀들이 오히려 엇나가서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앞서 언급했든 '그 잘난' 광남초등학교 였어서 고경력의 선생님들이 많으셨다. 우리 엄마는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그 학교를 두고 꼭 멀리 있는 B급지, C급지 학교를 골라 다니셨다. 그 당시는 부모의 직업을 묻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흔해서, 나는 처음부터 '선생님의 딸' 로 모두에게 각인되었다. 친구들은 매달 봉투에 현금을 담아와서 '육성회비'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제출하고 도장을 받아가는데 나는 그 육성회비 봉투 자체가 없었다. 엄마가 선생님이어서 육성회비가 면제라고 했다. 친구들은 "우와 니는 학교 공짜로 다니나?" 해서 "어 뭐 그렇지" 했는데, 그것 말고도 몇가지 혜택을 더 들자면 엄마가 학교에서 얻어오는 '교사용' 전과와 문제집이었다. 엄마가 자꾸 문제집을 공짜로 가져온다고 하면 더 이상 아이들은 부러워하지 않았다. 아주 끔찍하다는 표정이었지. 하하.  엄마가 가져온 문제집을 모두 다 푸는 건 아니었다. 그 중 정답이 파랗게 인쇄되지 않은 문제집만 풀었다. 답이 적혀있으면 아무래도 생각이 그 답에 갇혀서 스스로 풀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교과서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에 숙제로 몇 장 풀어가려고 하면 아이들이 정답지처럼 활용하는 것이 바로 전과였다. 요즘은 전과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표준전과와 동아전과가 초등학교 전과의 양대산맥으로 학기초에 서점에 높이 쌓여있었다. 표지 디자인이 뭐가 더 예쁜지, 나중에는 그 두꺼운 책이 얼마나 분책이 잘 되어있는지, 아님 글씨가 큰지 작은지 등에 따라 아이들은 선호하는 출판사의 것을 구입했고 한두살 터울의 형제 자매가 있는 경우에는 대부분 물려받아 썼지만 운 나쁘게 중간에 교육과정이 바뀌면 그 전과는 물려쓸 수가 없었다. 나는 엄마 찬스로 두 출판사의 새 전과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좋았던 점은 숙제를 해 갈 때 두 전과의 모범답안을 모두 참고해서 새로운 답을 써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국어책 몇 쪽을 해오라고 숙제 내주신 다음날, 발표를 시키면 처음에는 모두가 손을 번쩍 들었었다. 철수가 발표하고 나면 절반의 손은 내려간다. 그리고 영희가 발표하고 나면 더 이상 손 드는 아이가 없다. 같은 종류의 전과를 보는 아이들이 완전히 똑같은 답을 적어왔기 때문에, 그 순간 빛나는 건 바로 나의 손이다. 친구들은 "또 다른 답이 있어?" 하는 눈으로 나를 돌아봤는데 그때의 뿌듯함은 아직도 기억이 날 정도이다.


엄마는 방학이 시작될 즈음, 다음 학기 수학 문제집을 한 권 가져와서 '던져' 주셨다. 방학 동안 혼자 몇 쪽씩 풀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도 수학을 조금 좋아했던 모양인지, 엄마가 가져온 그 문제집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이틀에 한 단원 정도씩 풀어나갔다. 그 때의 엄마는 방학이지만 연수며 당직 등으로 바쁘셨고, 취미로 서예도 배우고 나중에는 대학원도 다니셨어서 곁에 꼭 붙어 앉아 공부를 봐주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답지는 따로 뜯어 놓았지만 사실 엄마 화장대 서랍에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문제집을 열면 차시마다 바뀌는 타이틀이 있고, 네모칸 안에 그 차시에 해당되는 설명이 조금 있고, 그것을 이해하고 나면 그 아래에 있는 문제들을 푸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마지막 응용문제를 모르겠거나 틀리면 풀이를 보고 혼자 이해하기도 하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빨간 색연필로 별표를 해두면 나중에 엄마가 설명해주셨다. 그럼 나는 혼자 고민했던 부분이 있었기에 "아~"하고 막힌 곳이 뚫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그렇게 한 단원씩 퀘스트를 깨듯 풀어나가다 보면 결국 마지막 단원은 '여러가지 문제' 였다. 그동안 이전 단원에서 배운 내용들이 총 망라되어 응용 문제를 풀도록 하는 단원이었는데 요즘은 '문제 푸는 방법 찾기' 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단원을 풀 때쯤 되면 개학이 임박이라 나는 밀린 일기와 독후감 등을 해치우느라 바빠서 결국 예습을 다 마치지 못하고 다음 학기를 맞이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엄마가 눈을 살짝 흘기며 "니 이거 안풀면 똥 누고 똥 안닦은 거 안같나?" 하셨는데 나는 천연덕스레 말했던 것 같다.

 엄마, 그거는 남겨놔야 학교에 가서 공부 시간에 재미가 있지


교대에서 공부하던 시절, 독일에서는 선행이 절대 금지라며 '선행학습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의 학습권을 빼앗는 것이다' 라는 인식이 확고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누군가 먼저 답을 말해버리면 나머지 아이들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말이다. 나도 일부 그 생각에 동의하기는 하지만, 학교 현실에서 보면 약간의 선행이 그렇게 해롭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집에서 문제집을 한 권 미리 풀고 가서 수학 시간에 자신감도 있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아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요즘은 학원에서 어찌나 빠른 속도로 선행을 하는지 초1인 아이가 초3 수학을 푸는 것도 빠른 편이 아니라고 한다. 아이들이 그 개념을 제대로 꼭꼭 씹어 알고 넘어가는 것인지 염려스럽다. 이래놓고 나중에 내 아이에게 나도 선행을 많이 시킬지 모르니 함부로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선생님의 딸로 살아온 나는, 중학교 부터는 그 혜택 으로 부터 멀어졌지만 때로는 엄마가 나와 같은 학교를 다녀주지 않는 것이 내심 서운했었다. 왜냐하면 같은 학교에 선생님인 엄마를 둔 아이들이 친구들과 트러블이 생겼을 때 쪼르르 엄마에게 달려가 이르고, 기세등등하게 그 빽을 사용하는 것을 몇 번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엄마 빽' 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위화감으로 작용했던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언니와 내가 그런 빽 없이 튼튼하고 아름다운 야생화처럼 자라나길 바라셨을까? 그런 큰 그림을 그리셨던 것일까? 세상 쿨한 우리 엄마의 성격상 그렇게까지 멀리 내다보셨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암튼 결과적으로 나는 그 당시에는 그런 엄마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요즘의 교사맘들은 '교사인 내가 워킹맘으로 살면서 언제 이렇게 아이를 위해 시간을 내주고 엄마가 근처에 있다는 안정감을 줄 수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저학년까지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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