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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11. 2022

사십 살 인생 #008

생일잔치의 역사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며 본격적인 사회생활이 시작되었다. 적응은 아이에게만 아니라 엄마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다. 나는 복직을 계획하고 있어서 돌이 채 안된 아이를 만 0세 반에 보내게 되었는데, 집 근처에 있던 국세청 직장 어린이집에 운 좋게 당첨(?)이 되어 2월에 아기띠를 하고 오리엔테이션에 갔었다. 아이와 함께 온 엄마는 뜻밖에도 나 하나뿐이었는데, 나는 당연히 3월부터 - 5월생인 - 딸아이와 함께 등원해서 적응시킬 계획이었는데 다른 집 아이들은 너무 어려서(?) 4월부터 보내기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등 하원하며 아이 친구 엄마들도 사귀고 싶은 마음이었던 나는 내심 실망했지만, 똘똘한 첫째를 믿고 등원을 시작했다.


아이가 생활하는 교실은 작지만 아기자기했고, 젊고 예쁜 선생님 두 분이서 우리 아이와만 눈을 마주치며 까르르까르르~ 리액션을 해주셔서 아이는 금방 적응했다. 일 이주만에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면서 엄마와의 분리가 저절로 시작되었고, 4월부터는 현관에서 바이바이 하고 헤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4월부터 등원한 다른 엄마들과는 나중에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는데, 이미 잘 적응되어서 울지도 않고 잘 노는 우리 아이가 신기했다고 하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5월에 처음 맞는 생일을 어린이집에서 어찌 보낼까 걱정이었는데, 당시 그 어린이집은 생일에 관해서는 부모의 손을 전혀 빌리지 않는 곳이어서 편했다. 그 달의 생일자를 모두 모아 꽤 성대한 잔치를 하는데, 케이크와 떡 과일 등을 모두 원에서 넉넉히 준비해주어서 나는 아이의 반 친구들에게 나눠줄 답례품도 준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신 생일인 친구에게 잔칫날에 맞추어 작은 인형 열쇠고리를 손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그중 한 아이가 6살이 되도록 꼬질꼬질해진 그 인형을 달고 다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선생님, 오늘 제 생일이다요?


생일은 누구에게나 의미 있고 소중한 날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무슨 계절을 좋아하느냐 물으면 대체로 자기 생일이 있는 계절을 꼽는다. 나 역시도 사실 봄이나 가을을 좋아했지만, 그래서 내 생일이 무더운 여름인 것이 내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계절에 곧잘 여름을 썼던 것 같다. 물놀이를 할 수 있다, 수박을 먹을 수 있다 등의 이유를 대면서. 1학년 담임을 하면 일 년 내내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 "선생님 오늘 제 생일이다요?" 아니면 "선생님 저 다음 주 목요일 생일이에요" "선생님 오늘 우리 아빠 생일이에요" "선생님 지난 주말에 우리 할머니 생일이었어요"... 등 가족의 생일에 관한 말이기도 하고, 보통은 크리스마스와 어린이날만큼 자기의 생일을 중요시 여긴다. 세 날의 공통점은 바로 공식적으로 좋은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겠지.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의 생일잔치는 이러했다. 생일이 속한 주의 토요일 오후를 D- day로 잡고, 일이 주 전부터 작은 쪽지에 초대장을 손으로 적어서 만들어 나눠준다. 받는 친구 이름과 생일잔치의 장소/날짜/시각 등이 적혀있는 쪽지인데 그것을 받느냐 못 받느냐로 희비가 엇갈리기도 했다. 인기 많은 친구들은 아주 큰 장소에서 여러 반 친구들을 불러서 서양식 - 초대받은 이들이 다 서로를 알지는 못하는 - 파티를 하기도 했고, 그러면 반에서 절반쯤 초대를 받는데 초대받지 못한 아이들은 왠지 머쓱해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박빙의 인기쟁이인 두 명이 본의 아니게 같은 날 생일파티를 해서 동시에 초대받은 아이에게 고민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때는 문구점에 생일 선물을 사러 가면 필통, 연필, 지우개, 자 등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선물세트를 많이들 샀는데 포장지 무늬와 선물의 크기만 봐도 그 생일잔치에 똑같은 선물이 여러 개 들어왔다는 것은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과 3학년 때 연이어 같은 반이었던 남학생의 생일파티에 홍일점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2학년 때 학급 연극에서 황진사와 황진사 부인을 맡았던 인연으로 그 집 어머니께서 나를 초대하라고 압박을 넣으셨을 것 같다) 남자아이들이 모두 그 큰 집에서 어찌나 시끄럽게 떠들고 뛰어놀던지, 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식탁에서 그 집 어머니와 담소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나름 예쁘게 꾸미고 싶어서 엄마 화장대에 있던 화장품 중 연보라색 섀도를 살짝 열어 볼에 바르고 갔던 기억도! 우리 언니는 그것을 눈치채고 두고두고 놀렸었지.


고학년이 되고 나서 생일잔치 자리에는 부모님 없이 아이들만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때 잠시 유행했던 것은 유명한 패스트푸드점 2층을 일부 생일잔치로 빌려서, 1인당 1개씩 버거 세트를 시켜주고 부모님은 빠지고 아이들만 놀게 하는 것이었다. 신용카드를 가지고 와서 직접 결제하는 친구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생일잔치에는 아르바이트생 언니 오빠들이 악기 등을 가지고 올라와 축하노래도 불러주고, 피에로 아저씨가 풍선을 불어 간단한 답례품도 나눠주었다. 그 당시 광안리 해변부터 우리 초등학교 후문에 이르기까지의 길가에는 KFC, 파파이스, 맥도널드, 웬디스, 롯데리아 등 없는 버거집이 없었기 때문에 입맛에 맞게 골라서 파티를 열면 되었을 텐데 후문에서 가장 가까운 KFC는 생일이라고 특별히 해주는 것은 없었지만 하교 후 접근성과 맛이 좋았고 바닷가 쪽에 있는 맥도널드는 바다 뷰와 서비스가 좋았다. 특히 맥도널드만의 특색 있는 서비스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라 내려가 음식 조리실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음식을 어느 정도 먹고 나면, 안내에 따라 1층 주방으로 들어가서 패티가 구워지는 모습, 냉동 감자가 튀겨지는 모습 등을 구경하다가 업소용 대형 냉장고 안에까지 들어가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곳은 입구가 두꺼운 비닐 커튼으로 한번 더 막혀있었는데 그걸 걷고 들어가면 아주 진한 양파 향이 코를 찔렀다. 어린이들이 모두 들어가면 갑자기 -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 문이 뒤에서 닫히고, 냉장고 내부엔 저절로 어둠이 찾아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꺄아~"하고 비명을 지르면 몇 분 후 다시 냉장고 문이 열렸는데 우리는 모두 웬만한 귀신의 집에 다녀온 것처럼 들떠서 나왔다. 소리 지르는 과정에서 어딘가에 긁혀 부상을 입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것을 문제 삼는 엄마는 없었다. 요즘 같았으면 우선 위생상의 문제와 아동학대에 준하는 듯한 이벤트 내용 (냉장고에 가두다니), 그리고 보호자가 동반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당장 오늘 저녁 8시 뉴스에 보도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트라우마와 공포를 안겨주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심리 치료까지 요구하는 부모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그 주방에 내려갈 때부터 이미 냉장고에 갇힐 것을 기대하며 기꺼이 갇히기도 했다.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면서 말이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자기 생일은 꼭 방학 때 있다면서 아쉬운 소리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내 생일은 여름방학식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냥 그런가 보다 했었다. 그런데 내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보니 내 생일은 딱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아쉬움이 생겼다. 한창 시험칠 때라 떠들썩하게 놀기도 뭣하고, 그런데도 생일에 맞춰 굳이 선물을 사주는 친구들에게도 미안했고, 선물을 사러 다녔을 친구들도 바쁜 시간을 쪼개 외출했을 테니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쯤에는 자기 생일이 너무 학기 초라 서로 서먹서먹할 때라서 선물을 많이 못 받는다는 친구들이 아쉬운 소리를 했던 것 같다. 실제로 3,4월이 생일인 아이들은 이전 반 친구들에게 뿌려둔 것이 있어서인지 복도에 나가 과거의 친구들에게 선물을 받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그때는 여러 팬시점 중 가장 대세였던 아트박스가 유행이어서 거기서 물건을 골라오는 경우가 많았다. 루니툰스 쿠션이나, 파자마 시스터즈 머그컵, 무릎담요, 필통 등이 단골 선물 메뉴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생일은 나에게 가장 먹먹했던 생일이었다. 생일 몇 주 전부터 기말고사 기간이라 독서실에서 주말에도 시험공부를 하던 나는 점심을 먹으러 집에 갈까 하고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었는데 언니가 받아서, 집에 오지 말고 사 먹고 오라고 했던 어느 일요일 - 엄마는 많은 양의 하혈로 쓰러져서 구급차로 병원에 실려가셨다. 그날 엄마는 자궁에 혹이 있어서 자궁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으셨고 며칠 입원을 하게 되었었다. 나는 그래서 조금 슬픈 마음을 안고 매일 등교했고, 시험도 쳤고, 시험기간 중 내 생일이었던 하루는 아침부터 친구들로부터 이런저런 선물을 많이 받게 되었다. 학교 마치고 엄마 병원에 잠시 들르느라 그 선물을 주렁주렁 들고 들어갔는데, 퀭한 모습의 엄마가 "맞다! 오늘 니 생일 이제 참" 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던 것 같다. 엄마한테 서운하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아픈 와중에 이제라도 딸 생일을 알아차려줘서 뭔가 그동안 꾹 참았던 슬프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터져 나왔던 것 같다.


결혼을 하고 나니 가족의 생일은 명절처럼 핑계 삼아 다 같이 모이는 행사날이기도 하고, 나처럼 지방이 친정인 경우는 생신마다 찾아뵐 수가 없어서 그냥 서로 계좌이체로 퉁치고 카톡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로 간소화되었다. 코로나로 요즘은 친구들도 만날 수가 없고 조금 친한 사이에는 카톡 선물하기로 케이크나 간단한 배달 음식을 보내주는 정도가 되었는데 그나마도 요즘은 괜히 쓸데없이 케이크만 주고받는 것 같아 점점 안 하게 되는 것 같다. 어느 날 광고에서 "케이크만 세 개라고 왜 말을 못 하니" 하는 노래가 나와서 혼자 소리 내어 웃은 적도 있다. 요즘 아이들에게 앞서 말한 맥도널드 생일파티 냉장고 사건을 이야기했더니 먼 세상 이야기처럼 넋을 잃고 듣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6.25 전쟁 이야기를 듣는 표정이 저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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