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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13. 2022

사십 살 인생 #009

니 내 좋아하나?

우리 어렸을 때는 왜 그렇게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을 괴롭히고, 또 여자아이들은 그런 남자아이들을 쫓아다니며 등짝 스매싱을 날리고 그랬는지 모르겠다. 나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원피스를 제법 입고 갔었는데 그때마다 꼭 치마를 들추며 '아이스케끼'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이 너무 유치해서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도 쓰지 않고, 울지도 않았다. 그냥 눈으로 레이저를 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재미가 없었는지 나를 괴롭히거나 놀리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으면 와서 끊고 간다거나 하는 아이들은 내가 고무줄놀이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에 나랑 상관이 없었고, 지우개를 조각내어 던진다거나 머리카락을 당겨놓고 모른 척하는 정도의 장난꾸러기들에게는 내가 너무 당당하게 "니 내 좋아하나? 우리 엄마가 내 괴롭히는 애들은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거라던데" 했기 때문에 진절머리를 치며 달아났다.


걔가 우리 딸을 좋아해서 그러는 갑다

요즘에는 이런 식의 교육이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옛날에 우리 엄마가 이렇게 말해줬을 때는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아! 그렇구나!! 관심이 없으면 아예 괴롭히지도 않겠구나! 하는 큰 (잘못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남자아이들이 아무 관심 없는 아이들은 건드리지도 않는 것 같기도 하고, 괴롭혔을 때 으앙 하고 울거나 바로 달려가 선생님께 일러버리는 아이들에게는 재밌어서 더 그러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다소 진심으로 "니가 내 좋아하는가 보지" 해버린 것이다. 그랬더니 정말로 남자아이들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그 후로 고학년이 되어가면서는 정말로 친하게 동성 친구처럼 웃으며 장난을 치는 사이가 되긴 했지만 썸을 타거나 러브라인이 되거나 앙숙이 되는 등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그런 관계가 나에게는 없었다. 나중에 동창 모임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그 당시 많은 아이들이 나를 '누나'처럼 생각했다는 것이다. 나름 만년 여자 부반장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살았는데 누구 하나 "내가 사실 니 좋아했었는데"라고 말해주지 않다니 정말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남동생도 없는데 누나라니!!

지금은 미국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동창 C군이 말해준 에피소드는 이렇다.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황령산으로 소풍을 갔는데, 남학생 몇 명이 나무를 타기 시작했다. C군도 재밌어 보여서 따라 올라갔는데 사실 떨어지거나 나무가 부러질까 봐 무서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많은 여학생들이 멋지다고 환호하며 응원(?)을 해서, "ㅇㅇ아 저쪽 저기까지 올라가 봐" 하고 있어서 차마 돌아올 수가 없었는데... 부반장인 내가 나타나서 "ㅇㅇ아, 위험하다. 내려온다"라고 말해주었단다. C군은 "아, 안 되겠다 계선생이 내려오라고 하네.. 어쩔 수 없지" 하며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래서 내가 든든한 누나 같았다나 뭐라나. 초등학교 시절의 많은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있는 나이지만 사실 이 소풍 사건은 기억나지 않는데, 친구의 묘사가 매우 생생하고 내 성품상 그런 말을 했을 법도 해서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무척 즐겁게 듣고 머릿속에 저장해두었다. 6학년 때 매일 맨 뒤에 앉아서 만화책만 보던 K군은 위로 누나가 둘인데, 실제로 내가 둘째 누나랑 닮았다고도 하고 (내가 본 적은 없어서 잘 모르겠다) 또 내가 초등학교 선생님이라고 하면 오랜만에 보는 동창들도 별로 놀라워하지 않는다. 이유를 물으니 대답은 이러했다. "니는 그때부터 벌써 선생님 같았다 아니가"


부산에서 여중 여고를 다니다 보면 자연스럽게 초등학교 때 알고 지내던 남자 동창들과는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곤 했다. 학원이나 독서실에서 어쩌다 마주쳐도 모른 척 하기 일쑤였고, 누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면 그게 나한테 하는 말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못 들은 척 지나가버리기도 했다. 그렇게 사춘기를 보낸 내가 서울로 대학을 왔더니 엄청나게 다정한 남학생들이 오며 가며 건네는 안부인사가 어찌나 다정하게 느껴지던지.. 대학 입학 기념으로 엄마가 사주신 치마에 스타킹을 입고 학교에 가면, 만나는 남학생마다 오늘 예쁘다고 데이트 가냐고 남자 친구 생겼냐고 물어봐주고... 어쩌다 학관까지 같이 걸어갈 일이 생기면 지나가는 다른 아이들이 씨씨냐고 물어보고 그럼 또 그 친구는 "잘 어울리지?" 하고 되물어주고. 엠티 다녀오는 기차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학생은 어깨를 꼭 기대 붙이며 "널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라는 간지러운 멘트를 날리기도 했다. 오리엔테이션에서 나에게 번호를 물어보던 동기는 "난 예쁜 여자 번호만 저장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이 동기들은 현재 모두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는 멀쩡한 초등교사들이다. 하하하. 하지만 그때 나의 대학 입학 에피소드 및 서울 원정기를 들어주던 내 고향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외쳤다.


야! 금마가 니 좋아하네! 이건 백 프로 썸이다!

엄마도 그렇고 친구들도 그렇고 나에게 계속 이렇게 말해주어서 나는 결혼 적령기였다고 생각되는 삼십 대 초중반 유일하게 솔로였던 11개월을 아주 즐겁게 보낼 수 있었다. 함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많은 오빠들 및 남사친들과 한껏 가까워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동안 나를 좋아해 줘서 고마워 난 이제 이 썸을 정리하고 한 오빠를 선택할 거야"라고 비장하게 선언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폭소를 참지 못하고 크게 웃어버렸지만, 그리고 이상하게 아쉽다며 그동안 썸인 줄도 몰랐는데 자기들이 차인 거냐며 센스 있게 받아쳐주고는 나의 새 출발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결혼하는 그날까지 나는 엄청난 인기녀였다고 행복한 착각을 하게 해 준 나의 엄마와 절친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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