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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an 30. 2022

사십 살 인생 #010

사람은 나면 서울로

요즘은 입시 분위기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언뜻 듣기로 지방에서는 특목고를 가지 않으면 소위 말하는 in 서울이 어렵다고 한다. 내가 입시를 치르던 때는 지방에서도 여고에서 전교 5~10등 정도는 서울에 있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는' 대학에 합격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마저도 쉽지 않다고 한다.


학창 시절을 온전히 부산에서 보낸 나는 처음으로 '아 내가 사는 곳이 수도가 아니구나' 하고 느낀 게 초등학교 4학년 지역 교과서를 배울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부산의 생활'이었는데, 새 교과서를 나눠주던 날 갑자기 보통 교과서와 결이 아주 다른 느낌의 책을 하나 받고 이게 뭐지? 하고 궁금해서 열어보았더니... 부산은 제1의 항구도시이며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이다. 6.25 전쟁 당시 마지막까지 함락되지 않아 임시 수도였다. 해산물이 풍부하고 수출 수입업을 많이 한다며 '자갈치시장' '깡통시장' 사진도 실려있었다. 국어니 산수니 하는 과목을 배울 때 한 번도 '네가 사는 곳은 지방이고, 이름은 부산이야'라는 언급이 없었기 때문에 그 책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졌다.


서울에 사는 사촌들을 만났을 때 너무나 부드러운 말투로 'OO 이는 몇 학년이야?'라고 물으면 왠지 사투리 억양이 부끄러워 단답형으로 'O학년!'이라고만 대답하고 언니랑 키득거렸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산 창원에 사는 또래 조카들과 만났을 때는 '부산 고모는 왜 사투리를 안쓰노' 라는 말을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부산 사투리가 부드럽게 느껴졌던 것이었을까? 그리고 중학교 때 H.O.T. 가 데뷔하면서 나와 친구들은 본격적으로 지방살이에 대한 불평을 하기 시작했는데, 바로 SBS라는 서울 방송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그들이 나오는 재미있는 토크쇼를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기대하며 밤 11시까지 TV를 켜 두었는데 막상 그 토크쇼가 시작되려고 하면 갑자기 PSB라는 지역방송으로 바뀌며 지루한 어른들의 토론이나 지역의 골목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곤 했다. 친구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SBS에서 방영된 그 프로그램을 비디오로 녹화해와서 돌려보기도 하고, 나중에라도 다른 채널이나 홈페이지 등에서 재방송을 챙겨보기도 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이래저래 우리는 지방 사람이라는 열등감이 슬슬 커지던 고등학교 때, 국어시간에 알게 된 '표준어의 정의'는 우리를 더 분노케 했다. "먼데! 그럼 우리는 교양이 없단 말이가 뭐고!! 서울말만 한국말이가!?" 하며 울분을 토하던 우리. 그래도 왠지 모르게 조 발표 등을 할 때나 혼자 일어나서 교과서를 읽을 일이 있을 때, 중요한 공지사항이 있어 여러 명에게 전달할 때는 '간지러운' 서울말도 아니고, '투박한' 부산 사투리도 아닌 어중간한 무 억양의 말투를 쓰곤 했다. 우리가 늘 쓰는 사투리지만 앞에서 발표할 때까지 시원시원하게 써주는 아이들은 우리에게 큰 웃음을 선사해주었다. 이상하게 그 모습이 개그 프로그램의 한 코너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우리가 TV에서 보던 사투리, 그 투박하고 촌스러운 사투리가 교실에서처럼 공적인 자리에서 들려오면 갑자기 내 입에선 그런 말이 나올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보들보들한 서울말을 쓰는 아이들에 대한 평은 두 가지로 나뉘었는데 - 어렸을 때 서울에서 살았다거나 부모님이 모두 서울 사람인 경우에는 인정, 부산에서 쭉 살았는데 갑자기 서울말을 쓰기 시작했을 경우에는 '재수 없는 애'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대학을 서울로 갔을 때, 방학이라고 다시 부산에 내려와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여전히 사투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면 그렁그렁한 표정으로 "야, 니는 하나도 안변했데이~ OO 이는 3월부터 벌써 서울말 쓰드라. 재수 없게"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사투리는 우리에게 추억이자 의리였다. 스무 살 이후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 베이커리 등에서 알바를 하기 시작한 친구들은 끝만 묘하게 올리는 '간지러운' 부산식 서울말을 배우기도 했고, 대학에서 배운 서울말을 부산 S 백화점 알바 면접에서 사용했더니 면접관이 모두 얼굴을 들고 쳐다보며 "서울말 할 줄 아시네예? 그럼 인포에서 일하면 되겠네예" 해서 아주 편하게 인포에 앉아서 유니폼을 입고, 미모(도 한몫했을 것이지만)만 뽐냈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나는 철저하게 이중언어를 사용하는 바이링구얼이 되어버려서. 서울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서울말을 (부산 사람인 줄 몰랐다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음) 부산에서 알고 지낸 친구들과는 부산에서든 서울에서든 만나는 장소에 상관없이 부산 억양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서울에서 엄마랑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보면 다들 신기하게 귀 기울여 듣고 있을 정도였고, 간혹 "너 사투리 정말 잘 쓰는구나"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크게 웃으며 "나 원어민이잖아"라고 대답해주었다.


부산에서 자라며 느낀 소외감은 단지 사투리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가끔 들어보던 라디오에서는 달달한 말투의 연예인 DJ들이 사연을 읽어줄 때 OO구에 사시는 누구누구 씨라고 해주는데 부산이나 울산은 구까지 읽어주지 않는 것.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눈이 내리네 어쩌네 하며 '하얀 겨울' '화이트' 같은 노래를 틀어대는데, 살면서 한 번도 함박눈 내지는 쌓인 눈을 본 적이 없는 우리는 마치 아프리카에 사는 아이들처럼 '눈'에 관한 사연에서 이질감을 느끼곤 했다. 딱 한번! 고등학교 3학년 되기 직전인 겨울방학 자율학습을 하던 어느 날, 부산에서 몇십 년 (몇 백 년 일지도 모른다)만이라고 떠들썩하게 보도될 만큼 오랜만에 펑펑 함박눈이 내리고 길거리에 눈이 쌓인 적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가 놀아라!" 하셨고, 우리는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을 껴입고 - 사실 항상 그렇게 입고 있었지만 - 온갖 비닐봉지와 박스를 대동해서 여고의 운동장 내려가는 비탈길에서 썰매를 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산 중턱이라 경사가 심해서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뒤로 미끄러져서 내려오더니 차끼리 '콩' 하고 부딪히는 장면을 목격했다. 처음 보는 충돌사고라 나도 놀라서 쳐다보았는데, 차에서 내린 부산 시민들은 서로 하하 웃으며 '괜찮습니다. 살다보니 별 일이 다 있네요. 조심하세요~' 하며 즐겁게 대응했다. 하지만 내리는 날만 좋았고, 그 뒤로 쌓인 눈이나 언 눈에 대한 경험치가 0인 우리들은 무척 난감했다. 부산에는 제설장비가 없어서 이웃 도시에서 빌려오기 바빴고, 제설에 필요한 염화칼슘 등도 애초에 없었던 터라 눈을 치우는데 오래 걸렸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꽁꽁 언 데다 눈으로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본 적이 없어서 많이들 벌러덩 넘어지고 다치고 그랬었다.


당시에 옥상에 올라가 나와 같은 또래의 청소년들이 세상을 향해 소리 지르는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는데, 그때 그 방송을 보면서 같은 십 대인데 어쩜 저렇게 말을 잘하나 감탄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은 제주도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 갔는데, 옥상에 올라간 친구가 이런 말을 했었다. "말은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낸다는데, 우리는 대학 가는 거 서울로 가는 게 목표가 아니야! 우리는 '뭍으로' 가는 게 목표야" 아! 그랬겠구나. 부산에 사는 내가 답답한 것 이상으로 섬에 사는 친구들은 더 큰 곳을 향한 갈증이 있었겠구나! 하고 깨달은 순간이었다. 그런데 마흔이 되고 보니, 서울이나 경기나 부산이나 제주나.. 다들 원하는 곳에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하니 사람 사는데 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집값이 조금 문제이긴 한데, 부동산에 대한 가치만 차치한다면 같은 수입으로 지방에서 여유롭게 사는 것도 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하고 서울에서 아이들 키우면서 나중에 성인이 된 다음 아이들을 독립시키게 될지 어찌 될지 알 수 없지만 나중에라도 우리 부부는 서울을 벗어나 삶의 질을 높여볼까 하는 꿈을 꾸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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