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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수필기장

운동이라는 이름의 구멍

상주작가 프로그램 과제 (주제:구멍)

by 계쓰홀릭

신이 나를 만들 때 깜박하고 빼먹은 게 있다면 그건 아마 운동신경일 것이다. (물론 다른 것들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말이다.)


피구는 무섭지만 발야구는 할 만해

초등학교 때 체육 시간마다 아이들이 “피구! 피구!” 외칠 때 함께 연호하지 못하는 아이가 바로 나였다. 피하는 것도 무섭고, 던지는 것도 – 혹시 내가 실수로 상대방에게 유리한 공을 줄까 봐 – 두려운 피구. 나는 차라리 국민체조를 외워서 음악에 맞춰 정확하고 반듯하게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5학년 때 선생님이 팀을 나눠주지 않고, 운동 잘하는 아이 둘을 대표로 세운 뒤 팀원을 선발하기로 할 때는 마지막까지 선택되지 못하는 한 명이 나였다. 내가 왕따여서 그렇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기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건 아니지만 마지막 두세 명쯤 남았을 때 느껴지는 시선은 좀 부끄러웠다. 친한 사이인데 팀의 전력을 위해 차마 나를 뽑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친구들에게 오히려 내가 더 미안해 두 손을 내저으며 “나 괜찮아~ 잘하는 애 뽑아!”라고 했다. 어쩌다 공 던지는 아이들의 목표물조차 되지 못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되었을 때는 친구들이 내 이름을 외쳐주는 것이 기분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운동 잘하는 애들은 체육 시간에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걸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체육 시간에 처음 접해본 발야구는 나에게 신세계였다. 공을 손으로 던지는 요령은 없었지만, 힘차게 뻥 찰 수는 있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차고 어디로 뛰어야 하는지 몰랐지만, 우리 팀의 리더 격인 남학생이 타자 옆에서 이러쿵저러쿵 조언을 해주어 그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룰을 익히게 되었다. 멋지게 홈런을 날릴 실력은 안되었지만, 수비들 사이 빈 공간을 노려서 뻥 찬 뒤 힘껏 뛰어 1루까지 도착하는 것은 할 만했다. 그 뒤로는 공이 날아가는 추세를 살핀 뒤 빠르게 뛸지 말지를 판단하는 것이 꽤나 스릴 있었다. 발야구계의 스타가 될 수는 없었지만, 우리 팀의 점수 중 1점 정도는 내가 꼬박꼬박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내가 찬 볼이 무조건 잡혀 아웃되었다면 나는 발야구에서도 구멍이었겠지만, 은근히 차근차근 점수를 내는 선수였기에 팀원 선발 중반에 뽑히는 기쁨도 컸다.

초등학교 때 잘 배운 덕분일까?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의 발야구 실력이 불꽃놀이처럼 폭발한 적이 있다. 여고에서 가장 친한 친구들과 몰려가 RCY(Red Cross of Youth, 청소년적십자연맹)라는 서클에 가입했는데, 인근 남고의 RCY 학생들과 연합해서 하는 행사가 종종 있었다. 일 년 중 하이라이트는 봄에 공공 운동장을 빌려서 하는 체육대회였다. 남녀가 혼합 팀으로 구성되어 짝피구도 하고, 이어달리기도 한 것 같은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발야구였다. 상대 팀과 실력이 비슷해서 공격과 수비를 반복하며 점수가 엎치락뒤치락하던 중인데, 하필 우리 팀 만루인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 공격수로 나갈 차례였다. 그런 청춘드라마 같은 장면은 나에게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공을 뻥 찼는데 놀랍게도 처음 공을 잡은 학생 손에서 공이 미끄러져 떨어진 뒤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우리 팀은 한꺼번에 4점을 내고 완벽하게 승리했다. 내가 홈으로 들어오는 길목 오른편에는 나를 응원하고 축하하는 손바닥들이 펼쳐져 있었다. 천천히 뛰어 들어가면서 그 손바닥들에 손뼉을 쳐주며 역전 승리 타자의 기쁨을 누렸다. 일생 팀의 구멍으로만 살 줄 알았던 내 인생에서 스포츠로 느꼈던 최고의 카타르시스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이후에는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안하다, 친구야!

내가 운동에 재능이 없다는 건 진작 알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100m 달리기 기록이 20초를 넘겨도, 철봉에 오래 매달리기를 못해 1초 이내에 떨어져도, 다 나의 체력장 등급에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나로 인해 피해 보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는 고등학교에 가서 나타났다. 배구공을 ‘언더핸드’로 친구와 번갈아 주고받는 게 체육 수행평가 종목이었는데, 지지리도 운동을 못하는 나의 파트너가 우리 반의 자타공인 ‘체육 여신’이었던 것이다. 친구는 고맙게도 나를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불러내서 개인 교습을 해주었으나 자타공인 ‘체육 구멍’인 나를 구제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부분의 체육 수행 평가에서 C나 B를 받았기 때문에 지필 평가로 나머지를 채워도 체육 등수가 전교 300등을 넘어가는 ‘체육 열등생’이었다. 하지만 항상 체육 실기 A에 지필까지 잘 봐서 체육 하나만은 1등급 에이스였던 친구가 나 때문에 발목이 잡혀 정말 미안했다. 매점에서 간식도 사다 줘 가며 두고두고 미안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친구가 제발 그만 미안해하라고 해서 사과를 멈추었다.

내 안의 스키를 발견하다

대학에 와서 내가 극도의 외향형 인간임을 알게 되었다. 새로운 관계 맺기에 심취해 사진 동아리, 천체 관측 동아리에 이어 스키부까지 가입하자 주위에서는 조금 의아해했다.

“스키를 탄다고? 네가?”

사실 그 시작은 스키 캠프였다. 아니, 어떤 소문이었다. 체육교육과의 교양 수업 중 ‘스키’ 수업이 있는데 3박 4일 정도의 스키 캠프에 참가해서 열심히 타면 대부분 A를 받을 수 있다는 소문 말이다. 학기 중 리포트와 출석의 압박이 매우 적은 과목이었기 때문에 수강 신청 경쟁도 꽤 치열했다. 1학년 때 처음 스키캠프를 가서 강사님의 눈에 든 이유는, 사실 내가 일곱 살 때 스키장에서 딱 반나절 정도 강습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엉금엉금 게걸음으로 올라가 겨우 10여 미터를 내려오는 첫 강습에서 강사님은 나의 과거를 눈치채셨다.

“어? 스키 타 본 적 있어요?”

“네... 근데 일곱 살 때라 다 잊어버렸어요.”

“아닌데, 잘 타는데? 원래 스키는 한 번 배우면 몸이 기억하거든요.”

내 몸이 그런 걸 기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후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때마다 강사님은 늘 나를 맨 앞에 세우셨다. 어쩌다 보니 초급반의 에이스가 된 나는 스키캠프 내내 자존감이 쑥쑥 올라갔다. 자연스럽게 해마다 스키캠프를 신청해서 따라다니다가 중상급반까지 올라갔다. 마지막날 함께 리프트를 탄 체대 교수님의 권유로 스키부에 가입까지 하게 되었다. 정작 스키부에 가입한 뒤로는 동기들보다 부족한 운동신경과 승부욕으로 인해 강사 자격증 시험에서 낙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제 어디 가서 스키 좀 탄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되었다.


인생 운동을 찾아서...

퇴근 후 짬이 나거나 휴직을 하거나... 나에게 조금이라도 잉여로운 시간이 생기면 내가 늘 기웃거리는 분야가 ‘운동’이다. 배드민턴, 탁구, 요가, 발레, 필라테스, 라인댄스 등 이것저것 안 해 본 것이 없지만 아직 ‘인생 운동’을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다. 요즘은 육아 휴직 중이라 무려 세 가지 운동을 하는 중이다. 동네 피트니스에서 주 2회 정도 하는 근력운동과 런데이 앱을 켜고 하는 달리기, 그리고 화요일과 목요일에 배우는 수영이다. 수영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두 달 정도 다닌 게 전부인데 이번에도 몸이 기억하는 모양인지 초급반에서 나름 ‘진도 빠른 젊은이’ 이미지를 얻게 되어 슬슬 재미를 붙이고 있다.


공부는 노력한 만큼의 성과가 조금씩 눈에 보이는데, 어쩐지 운동은 내게 그렇지 않았다. 잘할 자신이 없어서 애초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수행 평가나 학점으로 나의 운동 실력을 평가하는 사람은 없지만 나 스스로가 지금보다 더 잘하고 싶고 정복하고 싶은 것. 시간이 나면 좀 더 배워보고 싶어서 주변을 얼쩡거리게 되는 것. 가뜩이나 남들보다 취미가 많아 24시간이 바쁜 내게 늘 갈증을 느끼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운동’이다. 앞으로 내 삶을 더 풍요롭고 건강하게 만들어줄 나만의 인생 운동을 찾아서 나는 오늘도 ‘운린이’를 자처하며 진로 탐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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