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과제 - 봄의 추억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태어나고 자라던 시절의 고향 동네는 부산에서 꽤나 유명한 곳이었다.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던, 바다를 매립해 만든 땅에 지은 아파트라는 것과 지어질 당시에만 해도 그만한 고층아파트가 없었다는 것 때문에 어디에서나 택시를 타고 “남천동 비치아파트요."라고 목적지를 말하면 언제나 기사님들은 “좋은 동네 사시네요.”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비치아파트의 ‘비치’가 영어로 해변이라는 뜻인지도 몰랐던 유년기의 나는 우리 동네 아파트 단지의 봄을 가장 좋아했다. 봄에는 아파트 단지가 화려한 변신을 하기 때문이었다.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울려 퍼질 이 거리를~ 우우~ 둘이 걸어요~’
‘봄의 캐럴’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봄 명곡으로 자리 잡은 장범준의 ‘벚꽃엔딩’ 속 가사는 나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남천동 비치아파트 가로수길을 떠오르게 한다. 아파트 1,2,3단지 사이에 인도와 차도를 따라 심어놓은 벚꽃나무는 매년 4월이면 봄이 왔음을 알리며 연분홍 꽃봉오리를 터뜨리곤 했다. 새 학기의 설렘과 어색한 적응 기간이 끝날 때쯤이면, 양지바른 곳 나무부터 차례차례 무성한 벚꽃이 어김없이 피기 시작했고, 마치 나의 새 학기 적응을 축하해 주는 폭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주말이면 외지인들로 온 동네가 북적였기 때문에 현지인인 아파트 주민들은 평일 저녁에 서둘러 우리들 만의 벚꽃축제를 미리 즐겼다. 벚꽃은 밤에 봐야 더 예쁜 걸 아실는지? 아파트 부녀회에서는 때맞춰 나무마다 청사초롱 모양의 조명을 달아 분위기를 돋웠고, 저녁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족 산책을 하는 것은 축제기간 중 매일의 루틴이었다. 산책로에서 편한 옷차림의 친구들과 친구네 가족들을 만나 인사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이벤트였기에 다음날 아침 교실에서는 “어제 우리 만났잖아. 나는 상가 앞에서 누구네 가족도 봤다.” 하며 우연한 만남을 자랑하는 소리들로 분주했다. 주말에 빵 심부름이라도 나가면 여기저기서 “학생! 사진 좀 찍어줄래?” 하는 요청을 받기도 하고,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솜사탕차와 번데기차가 인도를 점유하고 있어 마치 내가 사는 동네가 아닌 어떤 관광지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재미있기도 했다. 늘 그렇게 소란스럽다면 불만이었겠지만 우리 동네의 관광지화는 1~2주면 끝나기 때문에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내 모교에서는 이러한 입지를 살려, 벚꽃축제 사생대회나 동시 쓰기 대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한 그림들이고 동시들이어서 큰 흥미를 끌지는 못했고, 가장 기억에 남는 행사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열어주신 ‘벚꽃길 나들이’였다. 그날 알림장에는 ‘내일 벚꽃길 산책 나감. 옷 예쁘게 입고 오기’라는 당부의 말씀이 적혀있었고, 나는 보라색 타이즈에 원피스로 한껏 멋을 부리고 선생님을 따라 201동에서 213동 사이의 벚꽃길을 산책하며 조별 사진을 남겼다. 선생님께서는 (아마도 사비로) 사진을 인화해서 나누어주셨고, 그 사진들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중학교 친구들과는 벚꽃이 가장 절정일 때 일회용 카메라를 공금으로 하나 사서 서로 돌아가며 사진을 찍어주었다. 한 컷 한 컷 아껴가며 화보처럼 온갖 포즈를 다 취했는데 나중에 보니 일부러 포즈 취한 것보다 자연스럽게 찍힌 게 훨씬 좋아 보였다. 사진관은 너무 비싸서 3*5 사이즈 인화 한 장에 30원씩 해주는 비디오 가게에 맡겼던 사진들은 열다섯 살 우리들의 가장 즐겁고 빛나던 시절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시간이 지나며 ‘가장 살기 좋은 아파트’라는 타이틀은 해운대 쪽으로 넘어갔지만, 삐까번쩍한 신도시에서 따라올 수는 없는 유구한 역사의 벚나무는 오랫동안 우리 동네 사람들의 자랑거리였다. 이제는 벚꽃터널로 더 유명해진 비치아파트는 요 근래 재개발 이슈가 생기면서, 재개발이 되면 나무를 다 베어버려야 한다는 흉흉한 소문에 매년 ‘올해가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벚꽃축제’를 열고 있다. 그 덕인지 해마다 방문객은 더 많아지는 것 같다는 게 아직 그 동네에 살고 있는 내 친구들의 전언이다. 요즘은 벚꽃 개화 시기도 더 당겨져서 3월 중순이면 만개하고 3월 말이면 다 져버리는 바람에 나는 벚꽃 터널에 못 가본 지 오래지만, 현지 특파원인 친구들이 해마다 인스타그램에 올려주는 ‘벚꽃 터널 드라이브’ 쇼츠를 보면 내 마음도 힐링이 된다. (bgm은 물론 벚꽃엔딩)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던 내 모습 뒤로 인부들이 벚꽃 나무 묘목을 심는 장면이 찍힌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내가 태어나고 자라 부산에서의 20년을 고스란히 보낸 아파트는 나와 거의 동갑이고 벚꽃 나무도 마찬가지인 셈이다. 부모님은 내가 서른이 되던 해에 낡은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오셨고, 재개발 관련 당사자들에게는 속상한 일이겠지만 10년이 넘게 비치아파트 재건축에 진척이 없는 것은 내게 은근히 반가운 소식이기도 하다. 진짜 재건축이 시작된다면, 벚나무를 다 베어버리기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꼭 한번 사진으로 남겨야겠다.
벚꽃터널
최선희
이사 가는 날 아침이다
하필이면 벚꽃 절정인 휴일
트럭기사에게 삼십 년을 살았다며
동네 한 바퀴를 부탁한다
화관을 이고
체크무늬 담요로 무릎을 덮은 부인
휠체어를 미는 백발 위로
고통의 다른 이름이었던 사랑으로
몸도 마음도 휘청거렸던
영화 속 장면들이 오버랩된다.
광안리 해수욕장 수면 위 빛 조각처럼
꽃잎들이 보도 위에 쓸려 다니고
도마뱀 꼬리 자르듯 묵은 얼룩 부려놓고
빛을 찾아 떠나는 가벼운 이삿짐
그 위로 난분분 꽃잎은 지고
나는 속절없는 낙화에 발목이 잡혔다
남은 꽃봉오리 마저 틔우는 들뜬 바람이
갈지자로 미적거리는 내 등을 떠민다
터널 끝에서 버스커버스커가 부르는
‘벚꽃엔딩’이 환청으로 들린다
중독성 있는 리듬이 입 안을 맴돌다가
또 다른 터널, 입구까지 따라왔다
엄마의 첫 시집 '콩잎여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