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회이야기] 이미지, 서사, 그리고 비상계엄

영화이론과가 본 윤석열의 비상계엄

by 날날이

1. 들어가며


필자의 전공을 이야기하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영화이론이 뭐에요?"이다. 영화이론을 전공한 필자 역시 그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을 할 수 없어 필자는 항상 이렇게 답변한다. "영화감독이 카메라를 통해 세상을 포착하려고 한다면, 영화이론은 그 이미지들을 통해 세상을 읽어내려고 해요." G. F. 헤겔은 [법철학]에서 현상이 발생한 이후의 역사적 조건을 사고해야 하는 철학의 특성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 때 날개를 편다"고 비유한 바 있다. 헤겔의 표현처럼, 영화이론은 누군가가 만들어낼 이미지를 예언하고 상상하기보다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를 통해 현실세계를 읽는다.


그럼에도 영화이론이 무엇인지 규정하기 어려운 까닭은 영화이론은 끝없이 인접학문을 흡수하며 이를 통해 영화와 이미지에 대하 분석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현상학, 마르크스주의, 비판철학, 문화연구, 페미니즘, 정신분석학, 기호학, 뇌과학, 인지심리학, 매체학, 최근에는 신유물론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철학적 기조까지 영화이론은 언제나 인접학문을 흡수하며 자신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그리고 이런 측면에서 영화이론은 앙드레 바쟁이 말한 "완전영화의 신화"처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지향점을 지니고 있는 학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하나의 지향점을 꿈꿀 수 있다면 필자는 이러한 영화이론이라는 학제 안에서 언제나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과 비판적 가능성을 찾고자 했다.(물론 현재는 비디오게임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자응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모순을 이야기하고, 그 모순을 이미지들을 역사화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으로 보고자 했었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22시 27분. 언제나 과거의 일 혹은 나의 현실과는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은 줄만 알았던 이미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국민 담화를 진행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이미지를 시작으로, 국회를 봉쇄하기 위해 진입하는 군인들의 이미지, 국회를 봉쇄하는 군인들을 막아서기 위해 저항하는 시민들의 이미지들이 여러 언론에 의해 생중계되었다. 뿐만 아니라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기 위해 담을 넘는 야당대표의 라이브스트리밍, 집회에 나간 시민들이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수많은 현장 이미지들, 실시간으로 퍼져나가는 디지털 이미지들이 등장했다. 사실 이러한 대통령의 이미지, SNS의 이미지들, 군사 이미지 등의 이미지들은 우리가 평소에도 언제나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지만, 나의 주관적 경험으로 되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비상계엄"이라는 무시무시한 기호는 그 수많은 이미지들을 단숨에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의 주관적 경험으로 뒤바꾸었다.


결과는 약 3시간 만에 윤석열과 계엄사령부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윤석열에 대한 탄핵안은 여당의 투표거부로 인해 무산되었지만, 윤석열을 포함한 비상계엄 관련자들은 빠른 속도로 수사를 받게 되었고, 윤석열은 매주 탄핵의 위기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윤석열"이라는 인물이 사라지면 지금의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혹은 윤석열을 제거한다면 우리 사회의 모든 모순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영화이론은 이를 어떻게 대할 수 있을까? 시시각각 등장하는 이미지들 사이에서 우리는 비판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2. 영화이론과 정치


영화는 정치적일 수 있을까? 1920년대 소비에트의 영화인들은 영화를 적극적으로 정치적 투쟁의 매체로 사용했다. 지가 베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키노-아이는 카메라를 투쟁의 도구로 선언하며, 인간의 눈보다 훨씬 자유롭게 현실을 포착할 수 있는 카메라를 통해 객관적 현실을 과학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반면 유사한 시기에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회화의 매체적 특정성으로 평면성을 이야기하며,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립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에도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되는데 동구권 중심의 소비에트 리얼리즘(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서구권의 모더니즘 사이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처럼 영화이론의 안에서뿐만 아니라 미학사 안에서도 예술과 현실정치 사이의 관계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영화이론은 앙드레 바쟁의 영화의 존재론적 규정을 이후로, 어떤 방식으로 던 지 현실정치에 참여하고자 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페르디낭 드 소쉬르, 자크 라캉 등을 독해하며 기호학과 정신분석학을 중심으로 한 크리스티앙 메츠는 영화를 언어학적으로 해석해 영화언어를 정립하고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밝혀내고자 했다. 메츠와 함께 프랑스의 <카이에 뒤 시네마>, 영국의 <스크린>을 포함한 많은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영화잡지들이 등장했고, 장 루이 보드리는 [기본적 영화 장치가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통해 영화관과 영화 장치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적 효과와 왜 우리가 영화장치로 인해 자본주의의 지배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지 밝혔다. 그러나 68혁명의 실패와 정치적 모더니즘의 실패로 영화이론의 정치적 가능성, 혹은 이미지의 정치적 가능성은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디지털 혁명 이후, 영화이론과 매체학의 결합은 영화이론의 정치적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담아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영화미디어학은 영화미디어학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역사적 조건을 통해 영화이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동시에 예술의 자율성과 현실정치 사이의 모순을 위한 일종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이를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예술에 대한 논의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아도르노는 예술이 일종의 아포리아 그 자체라고 주장했다. "예술은 그 자체의 기만을 변호할 수도 없지만 그러한 기만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로 인해 예술은 아포리아에 빠진다."([미학이론], 353쪽) 그리고 그 아포리아는 예술이 지니는 자율성과 타율성 사이의 모순이다. 아도르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예술의 양면성 즉 자율성과 사회적 사실(타율성)이라고 하는 성격은 그 두 영역의 확고부동한 상호 의존성과 갈등 속에서 항상 나타나고 있다”[미학이론]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의 자율성은 "단순한 이데올로기 이상"으로 예술의 자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고 밝힌다. 즉, 예술은 "사회 현실로부터 분리된 자율적 세계를 차지한다는 환영 혹은 이데올로기 역시 필연적인 것"임이 선제되는 한에서 타율적이다.(서동진, "예술가는 언제 파업하는가: 예술과 노동 그리고 상품", 63쪽) 예술이 자율성을 갖지 못한다면, 즉 "물화되지 않게 되면" 한낱 상품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도르노의 주장이다.([미학이론] 때문에 영화미디어학은 모든 이미지가 상품이 되어버린 "스펙터클의 사회"(기 드보르의 표현을 빌리자면)에서 이미지를 예술로 존재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다.

QvT3qzEMFpsqg4sI-sq3SqofN8C53z_YoGDIXhdw_YX8pj5mMOn6m2sfRqsyTNtox0O3d-tWsnBtDcqKaE14sQ.jpeg 테오도르 W. 아도르노

우리는 이러한 아포리아 안에서 영화미디어학을 바라볼 필요가 있으며 동시대의 이미지들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1KB짜리 데이터 쪼가리에서부터 수백 GB의 초고화질 이미지까지 동시대의 모든 디지털 이미지는 그 자체로 예술적 가치를 가질 수 있으며 그 동시에 금융자본주의의 가장 강력한 상품이다. 즉, 작금의 흔하고 때론 저급한 디지털 이미지는 동시대의 유토피아적 충동이자 이데올로기적 효과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유에서 영화(미디어)이론이 여전히 현실정치와 관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윤석열 정부의 비상계엄을 해석해 볼 것이다.



3. 이미지의 차원: 무엇이 우리를 가동시키는가, 빈곤한 이미지에서 가동적 이미지까지


영상작가이자 영상연구자인 히토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에서 동시대의 디지털 이미지와 디지털 이전의 필름 이미지를 구분하며, 빠르게 유통가능하며 제작 가능한 저화질의 디지털 이미지를 "빈곤한 이미지"(poor image)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발터 벤야민이 [기계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아우라의 상실"을 혁명적 가능성으로 해석했듯이 슈타이얼은 빈곤한 이미지를 동시대의 시각권력과 금융자본주의에 저항할 수 있는 일종의 무기로 해석해 낸다. "그러므로 빈곤한 이미지의 유통은 지가 베르토프가 말한 “시각적 유대”를 창조한다. 베르토프는 이 시각적 유대가 세계의 노동자들을 연결할 것으로 가정했다. (...) 어떤 의미에서 베르토프의 꿈은 실현되었다. 관객들이 상호적인 흥분과 정동의 조율, 불안을 통해 거의 물리적이라 할 수준으로 연결되는 전 지구적 정보 자본주의 아래라는 점에서 말이다."(스크린의 추방자들, 김실비 역, 57쪽) 즉, 슈타이얼은 디지털 이미지의 무한한 유통가능성과 누구나 제작가능한 편리성으로 인하여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희망은 [지구의 스팸: 재현에서 후퇴하기]에서도 드러난다. "민중이 점차 이미지의 주체나 객체가 아닌 제작자가 되어감에 따라, 민중은 아마도 하나의 이미지 안에 함께 재현되어서가 아니라, 공동으로 이미지를 생산함을 통해서 발생할 수 있으리라는 자각도 증가한다."(같은 책, 220쪽)


실제로 이번 12.3 비상계엄(내란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은 듯하다.)에서도 빈곤한 이미지는 큰 역할을 했다. 시민들은 앞다투어 계엄군과 국회의사당 앞 상황을 공유했고, 윤석열과 계엄사령부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을 제작하여 여러 커뮤니티에 공유했다. 다양한 언론사들의 유튜브 라이브 스트리밍과 SNS유저들이 시시각각 공유한 라이브 이미지들은 비상계엄에 대한 공포심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모두를 국회의사당 앞으로 불러 모을 수 있는 동기가 되었다. 전통적인 텔레비전 뉴스 이미지가 아닌 인터넷에 무한히 공유되는 빈곤한 디지털 이미지들은 일종의 "유대"를 만들어내고 비상계엄에 저항하기 위한 무기가 되었다. X나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시민들은 스마트폰을 포함한 다양한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들을 공유하고, 어디로 모여야 하는지 혹은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며 계엄군과 경찰과 대치했다. 그 결과 국회의원들이 빠른 시간 안에 국회로 모일 수 있었고, 약 2-3시간 안에 계엄 해제에 성공했다. 빈곤한 이미지는 계엄을 성공적으로 무너트리며 시민들의 무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AA1vmjeK.jpeg 국회가 공개한 계엄군의 국회의사당 진입 CCTV 이미지


그러나 시민들이 시시각각 인터넷을 통해 공유한 빈곤한 이미지는 디지털 혁명 이후의 새로운 혁명적 가능성의 이미지일까? 사실은 그 이미지들이 그 자체로 우리를 억압하는 계엄과 같은 이미지들은 아닐까? 어쩌면 윤석열은 그러한 이미지들의 효과이지는 않을까?


하룬 파로키는 일종의 객체와 같은 재현 이미지와 구분되는 이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미지 개념을 제시하는데 바로 "가동적 이미지"(operational image)이다.(군사적 이미지, 작동 이미지 등 다양하게 번역되는 operational image의 번역은 서동진의 번역을 따랐다. 서동진은 operational image가 재현이 아닌 "특정한 실행을 하도록"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며 가동적 이미지로 옮기는 것이 파로키의 의도를 옮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밝힌다.) 파로키에 따르면, 가동적 이미지는 빛과 카메라 렌즈를 중심으로 생산되던 현실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꿈꾸던 기존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데이터, 알고리즘, 그리고 AI 등을 통해서 작동되고 제작된다. 빛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 필름에 기입되면 만들어지던 사진적 리얼리즘 혹은 지표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는 다르게, 가동적 이미지는 빛과 지표성과는 상관없이 제작된다. 가동적 이미지는 그 자체로 일종의 알고리즘이 되며 그것을 본 시청자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를 하게 만들며, 그 행위가 없이는 이미지를 볼 수 없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동적 이미지는 관객(spectators)이 아닌 행위자(agent 혹은 player라고도 할 수 있겠다.)를 필요로 한다. 동시대의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 가동적 이미지이다. 시종일관 우리의 손가락을 움직이게 하며, 알고리즘을 따라가게 하는 이 알 수 없는 이미지가 바로 동시대를 지배하고 있다. 즉, 서사적 소설이 산업 자본주의의 지배적 문화였고, 사진적 이미지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종이었다면, 금융자본주의(혹은 세계화 자본주의)의 문화적 지배종은 가동적 이미지이다.(그리고 이 가동적 이미지의 최첨단의 매체이자 예술은 비디오게임이다. 그 이유로 필자는 현재 비디오게임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자 하고 있다.) 이 가동적 이미지는 우리를 감시하며, 행위하게 하고, 우리의 모든 시각적 연대를 무너트리는 동시에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빈곤한 이미지의 혁명성이란 일종의 환영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 관객을 넘어서 자유로운 제작자가 될 수 있다는 환영 말이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새로운 시각성의 이미지, 즉 데이터, 알고리즘, 그리고 AI에 의해 만들어진 가동적 이미지에 의해만 가동되는 수동적 행위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야말로 계엄과 같은 상황에 놓여있다.


EYEMACHINE_003.jpg 하룬 파로키의 가동적 이미지에 대한 소개: Eye / Machine III


이것이 우리가 단순히 "윤석열 제거"를 넘어선 새로운 시도 혹은 또 다른 시각성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이유이다. 가동적 이미지의 하나의 효과로 나타난 윤석열의 계엄령을 무마시키는 것으로는 동시대의 가동적 이미지가 행하고 있는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4. 서사의 차원: 윤석열과 서사의 종언


윤석열 정부는 44년 만에 다시 한번 계엄령을 선포했다.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의 마지막 연설의 한 구절, "독재자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면서 민중을 노예로 만듭니다."처럼 윤석열은 다시 한번 군대의 총칼을 통해 국회를 장악하고, 자신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윤석열의 비상계엄(혹은 내란)이 지시하는 것은 따로 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언한 핵심적인 이유로 계속 지목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보수 유튜브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서사의 종언으로 정의될 수 있는 포스트모더니티에서 음모론이 서사적 충동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고 전한다.(음모론에 대한 제임슨의 해석은 [지정학적 미학]을 참고할 것.) 실제로 음모론은 프랑스 대혁명부터 좌파진영의 무기였다. 권력계층에 대한 저항이자 그들이 파편화하는 민중에 대한 총체성을 되살릴 수 있는 하나의 방법론이었다. 그러나 지금 음모론은 우파의 상징이 되었다. 여러 보수 정치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윤석열은 어떠한 정보보다도 보수 유튜버들을 믿고 있었고,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갔다. 여기서 윤석열은 우리 모두가 하지 못한 서사화에 성공하는데, 이런 점에서 윤석열은 자신 만의 총체성을 완성시킨다.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된 야당을 붕괴시키고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서사가 그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동적 이미지에 의해 탈서사화 되며 현실객체에 대한 재현과 멀어지는 동안, 윤석열은 자신만의 현실을 재현할 하나의 총체적 서사를 완성시켰고 이를 완수하기 위해 비상계엄을 일으켰다.


그러나 동시에 윤석열의 총체적 서사는 결코 완수될 수 없는 서사인데, 그것이 내재적 비판으로서의 서사가 아니라 왜재적 주장에 머무를 뿐만 아니라 충분히 폭력적이지 못하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기 위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석열의 총체성은 거짓된 총체성이며, 우리가 해결해야 할 폭력적 총체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석열의 서사화는 동시대 자본주의에 대한 리얼리즘이자 동시대의 이데올로기의 효과이다.


그러나 서사화는 우리가 다시 복권해야 할 방법론이다. 가동적 이미지를 넘어서 주/객체의 관계와 재현에 대한 복권을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한한 공유가능성의 이미지가 아니라 "서사"일지도 모른다. 무한히 파편화된 동시대에 대한 인식적 지도를 그릴 수 있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되살릴 수 있으며, 계급투쟁의 장이 될 수 있는 바로 서사 말이다.(동시대에 가장 서사가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는 예술문화는 역설적으로 비디오게임이다. 서사는 비디오게임이 선택한 예술적 가치인 동시에 지속적으로 플레이어를 몰입시키게 하기 위한 비디오게임의 허구적 세계의 조건이 된다.) 제임슨은 루카치와 브레히트의 리얼리즘/모더니즘에 대한 논쟁을 재분석하며 현재 필요한 것은 루카치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바 있다. "예기치 않은 결말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 잠정적으로나마 최후의 한마디를 해줄 사람은 비록 그가 1930년대에는 아무리 틀렸었다 할지라도 루카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해줄 수 있는 루카치는, 그러한 루카치가 가능하다면, 리얼리즘의 개념을 <역사와 계급의식>의 범주들, 특히 물화와 총체성의 관점에서 다시 쓰게 만들고 그러한 핵심적인 범주를 만들어낸 그런 루카치이어야 할 것이다."("루카치 브레히트 논쟁 재론", [비평의 기능], 옮김 유희석, 제3문학사, 221쪽) 그리고 제임슨에 따르면, 루카치를 경유하여 획득할 수 있는 서사, 즉 다시 한번 추구되어야 할 리얼리즘은 다음과 같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기능은 명백하다. 즉, 소비사회에서 물화의 세력에 저항하고, 오늘날 사회적 조직과 삶의 모든 층위에서 진행되는 실존적 파편화에 의해 체계적으로 훼손되었지만 끊임없이 단일한 세계체제가 되어가는 다른 나라에서의 계급뿐만 아니라 계급투쟁 간의 구조적 관계들을 유일하게 비추어줄 수 있는 바로 그 총체성의 범주를 되살려 내는 것이다."(같은 책, 222쪽)


적어도 현재까지는 우리는 그 서사화에 실패하고 있다.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있으며 우리는 어떠한 사회적 변혁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탄핵"이라는 기호 아래 모든 모순과 불공정, 그리고 불평등이 가려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윤석열에 대한 제거로는 부족한 이유이다. 그것은 결국 일회성의 파편적 사건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그러한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서사가 필요한 이유이다. 몇 년 전 뜨거웠던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역시도 파편적인 현재에 대한 일종의 이벤트에 불과했고,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총 체화하지 못했다. (아마 우리가 마지막으로 성공한 서사는 5.18 민주화운동일 것이다. 문학에선 한강 작가의 섬세한 묘사와 이야기가, 영화에선 이창동의 드라마가 그 성과의 증거이다.) 우리는 윤석열을 넘어서 가동적 이미지와 보수의 대안적 진실(post-truth)로부터 저항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리얼리즘에 대한 새로운 담론,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해석, 그리고 새로운 시각성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5. 나가며: "윤석열"을 넘어선 폭력의 필요성


비상계엄으로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의 목적은 야당의 예산삭감과 행정부에 대한 계속된 탄핵을 통한 '반국가행위'로,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종북 반국가 세력에 대한 일망타진이었다. 약 한 시간 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박안수 윤군참모총장의 이름으로 계엄사령부의 포고령이 발표되었고, 그 내용은 12월 3일 23:00부로 일체의 정치활동과 파업 및 집회를 금지하고, 언론을 통제하며, 포고령을 위반하는 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뿐만 아니라 계엄법 제14조에 의하여 처단한다는 것이었다. 계엄이 선포되고 빠른 속도로 군대가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투입되고, 국회의장과 여야당의 대표를 포함한 몇몇의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을 체포하려 시도했다. 그는 아마도 "로보캅"이 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폴 버호벤의 <로보캅>(1987) 속 로보캅은 범죄자들을 쫓는 과정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한 경찰관 머피가 기억을 잃고 사이보그로 다시 태어나 범죄자들과 싸우게 된 캐릭터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로보캅은커녕 "보디커"도 되지 못했다. 적어도 보디커는 로보캅이 된 머피를 사이보그로 인식할 수 있는 인지능력을 갖고 있었다.

RoboCop-1987-blu-ray-720x388.jpg <로보캅>(1987)의 한 장면: 범죄자 보디커를 체포한 로보캅

지금 우리가 윤석열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비상계엄을 뛰어넘을 폭력이다. 단순히 윤석열의 탄핵에 그치지 않는 구조적 변혁으로의 폭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 1권의 서론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필요조건이었다고 밝힌다. 즉, 봉건제로부터 벗어난 주권을 지닌 시민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봉건제보다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자유와 평등을 억압하는데, 자본의 비가시적인 억압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실업, 불평등,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 모순이 바로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부정성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의 분석처럼, 자본주의에서 자유와 평등은 실현은 자본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지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불가분 한 관계가 아닐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는 우리는 새로운 시스템을 꿈꿀 필요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유토피아적 충동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유토피아의 완전한 실편은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유토피아적 충동이야말로 지속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비판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유토피아는 프레드릭 제임슨의 "유토피아 정치학"을 참고할 것.)


윤석열에 대한 탄핵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적어도 시민들은 윤석열에게는 승리했다. 그러나 또 승리할 수 있을지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필자는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실재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그 실재(정신분석학적으로는 원장면primal scene이라고 해야 할)는 우리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 트라우마는 리얼리즘과 재현에 대한 새로운 담론,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해석, 그리고 새로운 시각성의 가능성으로 향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정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PS24120700501.jpg 윤석열 탄핵 집회에 모인 시민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게임이야기] 오픈 월드와 리얼리즘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