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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이야기] <오징어 게임 2>에 대한 짧은 리뷰

장르, 넷플릭스, 그리고 반-자본주의

by 날날이

황동혁 감독의 <오징어 게임>은 2021년 전세계를 휩쓴 넷플릭스 시리즈였다. 시즌 1의 상업적 대성공에 이어 시즌 2가 제작되었고 한국시간으로 12월 26일 공개되었다. 사실 <오징어 게임 2>는 공개 이전부터 많은 기대와 함께 많은 우려가 있었다. 애초에 시즌 1으로 안정적인 완결이 된 작품이기도 하고 황동혁 감독도 시즌 1으로 완결을 원했으나 경제적 이유로 시즌을 이어나간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징어 게임 2>는 공개 후에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고 있으나 빠른 시간 안에 90개가 넘는 국가에서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으며, 여러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오징어 게임 2>는 <오징어 게임 1>만큼의 완성도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안고 있는 시리즈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평가와는 별개로 <오징어 게임 2>는 몇몇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첫째로, 장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고, 둘째로, 넷플릭스라는 거대 미디어 자본의 상품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시즌 1부터 지속적으로 황동혁 감독이 노리고 있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물론 <오징어 게임 2>는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성기훈의 영웅놀이처럼 그저 영웅놀이에 그친다. 그럼에도 <오징어 게임 2>가 왜 영웅놀이에 그쳤는지를 이야기해 볼 필요가 있다.



1. 데스 게임 장르와 불완전한 시리즈


'데스 게임'이 장르화되기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존재했지만 본격적으로 장르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스티븐 킹의 [롱워크]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100명의 참가자 중에 최후의 승자 1인이 남을 때까지 계속 걸어야하는 롱워크(The Long Walk)서부터 발전된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는 그 이후 스티븐 킹의 또 다른 데스 게임 작품인 [런닝맨], 타카미 코슌의 [배틀로얄], 수잔 콜린스의 [헝거게임]과 같은 소설뿐만 아니라 <쏘우> 시리즈, <큐브>와 같은 공포영화들로 발전해오면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그러나 몇몇 작품의 실패와 지속된 서바이벌 예능들의 출현 이후로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는 발전되지 못하고 공포 장르의 한 갈래, 혹은 고어 장르의 한 갈래에 그치게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시기에 등장한 것이 <오징어 게임 1>이었다. <오징어 게임 1>의 작품성과는 별개로, <오징어 게임 1>은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에 한국적인 놀이들을 결합시키며, 한동안 멈춰있던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에서 색다르면서도 흥미로운 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첫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부터 '줄다리기', '구슬치기' 등 다양한 게임들을 통해 게임에 참가한 456명의 참가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살아남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우정, 질투, 분노, 배신 등 다양한 인간의 감정과 행위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앗아가는 물질(돈)에 대한 비판까지 보여주며 <오징어 게임 1>은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에 충실했던 작품이었다. 다시 말해서 <오징어 게임 1>은 확실한 자기만의 장르적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2>는 이와는 반대로 진행되었다. 굳이 <오징어 게임 2>를 장르적으로 분류하자면 액션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2>는 데스 게임과 액션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다가 둘 다를 놓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징어 게임 2>는 자신만의 장르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데스 게임'이라는 가면만 쓰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짝짓기 게임이 그나마 시즌 1에서 보여주었던 참신한 게임들의 명맥을 잇고 있는 게임이었으며, 첫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인 성기훈의 합류로 보여줄 수 있는 참신함을 보여준 게임이었다. 이외에는 모든 탈락이 총살로만 처리되는 등 시종일관 지루한 진행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아마도 황동혁 감독이 생각한 것은 시즌 1과의 차별화를 위한 장르의 변경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마저도 7화에서만 존재한다. 이외의 에피소드들에서는 어떠한 장르적 형식을 갖추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더구나 게임장 밖에서 펼쳐지는 추적조의 스토리로 인해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산만하다. 더구나 시리즈의 완결성 또한 갖추고 있지 못하며 시즌 2 시리즈 전체가 일종의 에피소드에 불과해보이기까지 하다. 이러한 미완성된 결말은 어쩌면 동시대에 더 이상 장르적 형식을 갖추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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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은 그의 에세이 "단독성의 미학"에서 포스트모더니티의 특성으로 무한한 단독성(현재성)singularity을 지목하며, 이것이 단순히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경제, 사회, 문화, 이론 등 모든 분야에서 발견된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가 주목한 영화에서의 단독성의 발견은 일정한 장르적 형식에 상관없이 수많은 작품들이 예고편만 봐도 다 본 것 같은 액션영화에 불과해진다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 2>도 제임슨이 지적한 동시대의 영화들과 유사하다. 오히려 액션영화와 같은 형식을 갖추고 있었던 예고편에 비하여, <오징어 게임 2>는 전체적으로 액션영화스럽지도 못하다. 시즌 1의 폭력적 이미지들은 적어도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를 위한 것이었으며, 동시에 동시대의 스펙터클 이미지에 대한 비판적 폭력이었다. 그러나 시즌 2의 폭력적 이미지들은 어떠한 맥락도 갖추지 못한 단독적 폭력에 불과하다. 시즌 2가 그저 영웅놀이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2. 넷플릭스와 영웅놀이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 스트리밍 기업들이 가장 공을 들이는 것 중에 하나는 유명한 감독에게 과감한 투자를 통해 자신들의 오리지널 콘텐츠를 만드는 일이다. 대표적으로 마틴 스콜세지의 <아이리시맨>(2019)은 넷플릭스의 전폭적인 투자를 통해 제작되었으며, 넷플릭스도 진지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음을 전세계에 선언한 작품이다. 더구나 스콜세지는 디즈니의 마블 시리즈를 겨냥하며 마블의 영화들은 영화cinema와는 거리가 먼 유명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잘 만들어진 테마파크와도 같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 대한 진심과 사랑이 담긴 작품이 바로 <아이리시맨>이다. <아이리시맨>에서 스콜세지는 자신의 영화인생과 자신이 아끼던 배우들의 신체를 통해 다시 한 번 영화cinema의 가능성을 꿈꾼다. 그러나 스콜세지의 비판과 영화에 대한 사랑은 역설적으로 거대 OTT 스트리밍 기업들의 홍보수단이 된다. <아이리시맨>은 극장개봉과 동시에 넷플릭스로 공개되어 전세계의 넷플릭스 유저들에게 넷플릭스가 단순한 테마파크가 아닌 거대한 문화자본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정확히 이 지점에서 스콜세지는 비판받았다. 스콜세지는 영화cinema를 부르짖으면서 넷플릭스의 판매원이 되었다.


넷플릭스도 정확히 이 지점을 노리고 있다. 때문에 넷플릭스는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하는 <블랙미러> 시리즈를 비롯한 다양한 자기-비판적 작품들을 모으는 것도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넷플릭스는 마치 자신들이 동시대에 비판받아야 할 거대자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미디어 비판적인 작품들을 자신들의 포스터로 전시한다. 이런 점에서 <오징어 게임 2>의 성기훈은 마치 넷플릭스를 의인화한 캐릭터와 같다. 시즌 2의 성기훈은 시즌 1의 성기훈과는 다르다. 시즌 1의 성기훈은 시리즈의 주인공이고 오징어 게임의 우승자이지만, 전형적인 영웅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기훈이 매력적인 주인공이었던 이유는 성기훈은 일반적으로 관객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시즌 1의 프론트맨의 대사인 "당신은 얼마 달리지 못할 줄 알았는데"처럼 시즌 1의 성기훈은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 못하고 신체적 능력도 떨어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캐릭터이다. 시즌 1의 성기훈은 관객들의 기대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극의 흐름에 반대되는 행동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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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기훈은 마치 넷플릭스의 알고리즘을 뒤바꿔버린 <오징어 게임 1>처럼 '데스 게임'이라는 장르로부터 미끄러지며, 오징어 게임의 알고리즘으로부터 탈출한다. 그럼 점에서 시즌 1의 성기훈은 그 자체로 넷플릭스에 대한 저항적 캐릭터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즌 1의 성기훈은 "운이 좋아서 겨우 폐기 처리를 면한 쓰레기"이지만, 알랭 바디우의 표현으로는 '사건'이며, 자크 라캉의 표현으로는 '실재'와도 같은 모순 그 자체이다. 발터 벤야민은 신화적 폭력과 신적 폭력을 구분한 바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화적 폭력"이 법보존적이며, 피를 흘리게 하는 위협적인 폭력인 반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음에 이르게 하며 어떠한 경계도 없이 지금의 질서를 깨트릴 수 있는 혁명적이며 구원적인 폭력이라고 주장한다. 때문에 그의 우승은 오징어 게임과 넷플릭스의 질서(법과 알고리즘)을 깨트릴 수 있는 "신적 폭력"과도 같았다.(신적 폭력과 신화적 폭력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발터 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를 참고할 것. ) 그러나 시즌 2의 성기훈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시리즈의 모순덩어리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1화의 딱지남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기훈은 자신이 오징어 게임을 우승하며, 세상의 모든 것을 깨우친 영웅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들은 성기훈이라는 캐릭터성, "결과보다 과정", "돈보다 인간의 존엄성" 등을 완전히 깨트리게 된다. 시즌 2 7화의 성기훈은 앞에서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진, 우리가 지금까지 보지 못 했던 "영웅놀이"에 심취한 성기훈이다. 그 결과 시리즈는 길을 잃게 되고, 불완전한 결말만 남게 된다.


끝까지 오징어 게임 내의 실정법(탈락은 곧 죽음)을 넘어서며 오징어 게임의 법을 무너트리던 '신'은 시즌 2에 이르러 오징어 게임의 법을 보존하는데 그치는 영웅으로 격하된다.



3. 오징어 게임 2는 반-자본주의적인가?


<오징어 게임>의 가장 큰 주제는 자본주의 비판이다. 자본주의에 적응하지 못한 존재들을 모아 그들이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무너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준 것이 시즌 1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 지점만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이미 자본주의가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페터 슬로터다이크가 주장했던 "냉소주의적 주체"이다. 현실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지만, 그 현실에 적극적으로 복무한다. 적어도 시즌 1은 그 지점에서 냉소주의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시즌 1의 등장인물들은 오징어 게임을 진행하며, 항상 두려움에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자신들도 언제든지 탈락하여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적극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고 언제나 긴장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 두려움은 추악한 현실에 저항하고자 하는 두려움이었다. 시즌 1의 마지막 삼인(성기훈, 강새벽, 조상우)이 남았을 때, 그리고 마지막 결승전(성기훈과 조상우) 때도 주인공인 성기훈은 지속적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징어 게임으로부터 벗어나자고 제안한다. 단 1명이라도 살릴 수 있다면, 모든 상금을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시즌 1의 성기훈이었다. 때문에 시즌 1은 두려움을 느끼며 이 추악한 현실에 복무하면서도 이 게임으로부터 벗어나야 모두가 살 수 있는 방법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 2>는 게임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물론 게임의 시작부터 "난 이 게임을 해봤어요!"라고 외치며 게임으로부터 탈출하자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성기훈은 냉소주의적 주체로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외침 때문에 시즌 2는 냉소주의에 빠진다. 마크 피셔는 "반-자본주의"의 사상은 이미 자본주의에 널리 퍼져있다고 언급하며, "반-자본주의적 몸짓"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자본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며 최선의 형식이라는 상황을 가리키기 위해 마크 피셔가 제안한 용어)을 강화하기만 한다고 주장한다.([자본주의 리얼리즘: 대안은 없는가], 박진철 역, 2018, 29쪽) 시즌 1과 차별화 된 시즌 2의 또 하나의 시스템인 매경기가 끝날때마다 게임을 지속할지 끝낼지 행해지는 투표는 성기훈의 영웅놀이에 의해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성기훈의 마지막 선택, 더 큰 뜻(오징어 게임의 진행자들을 죽이기)을 위해 작은 것(X를 투표한 참가자들)을 희생해야한다는 주장은 마치 가면을 쓴 '프론트맨'처럼 탈출이라는 가면을 쓴채 모두를 오징어 게임(탈락은 죽음, 죽음은 탈락)으로 이끌고 간다. 이런 맥락에서, 성기훈은 '프론트맨'보다도 더 오징어 게임의 철저한 복무자이, "가면을 뒤집어 쓰고 주인님이 시키는대로 뛰고, 짖고, 꼬리나 흔드는, 개새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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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오징어 게임 2>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 이르지도 못했다. 오히려 철저히 자본주의에 복무하며 그 시스템에 환호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시리즈 전체의 주제는 시즌 2의 타노스처럼 분위기를 잡지 못하고 부자연스러우며 무너진다. 5인 6각 운동회에서 죽음을 눈앞에두고도 서로를 응원해주고 환호성을 질러주는 이상한 참가자들처럼, 시즌 2는 자화자찬에 빠져있다.



물론 <오징어 게임 2>가 재미없다는 것은 아니다. 킬링타임용으로 충분한 시리즈이며,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존재한다. 1화의 딱지남과 성기훈의 대결, 3화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6화의 '짝짓기 게임' 등 시리즈를 즐길만한 요소들은 충분하다. 그러나 시즌 2 자체로 어떠한 완결성도 보여주지 못한 점, 무너진 장르성과 캐릭터성 등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무의미한 캐릭터들, 그들에 대한 빈약한 서사 또한 시즌 2가 아쉬운 이유이다. 그럼에도 시즌 3가 기다려지는 것은 황동혁 감독의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성찰과 감정에 대한 연출들, 오징어 게임이라는 매력적인 무대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한 번 내년 공개될 시즌 3를 기다릴 것이고 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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