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스럽지만, 봉스럽지 않은 심심한 풍자극
올해 개봉한 <미키 17>까지 포함하여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방식으로 8편의 봉준호 영화를 구분하자면, <플란더스의 개>, <살인의 추억>, <마더>, <기생충>과 같은 현실적인 스토리의 갈래와 <괴물> 이후 등장한 <설국열차>, <옥자>, <미키 17>과 같은 SF 스토리의 갈래일 것이다(물론 <괴물>을 SF장르로 묶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전자와 후자를 통틀어서 봉준호 감독의 가장 유명한 이명?(별명)은 봉테일이다. 이는 꼼꼼하게 계획된 미쟝센과 여러 장르의 복선들을 하나의 잘 짜여진 스토리로 만들어낸다는 봉준호 감독의 능력 때문에 붙혀진 별명이다. 실제로 봉준호는 촬영 전 편집에서 필요한 쇼트들만 촬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국내에서 촬영시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봉준호 영화는 어떤 갈래에 포함된 작품이던지 사회적 약자를 주인공으로 하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락성과 예술성을 다 잡은 영화들이라고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정확하게 봉준호 감독의 계획과 의도대로 만들어진 영화에서 남녀노소 어떤 관객이든지 봉준호가 설계한 사회비판과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지점이 봉준호 감독에 대한 평가가 박해지는 순간이기도 한다. 봉준호 영화에는 가령 홍상수 영화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이야기되는 "우연성", "모순", "결핍"이 부재하는 영화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봉준호 영화는 즉각 '해석'이 필요하지 않는 영화가 된다. 봉준호의 의도는 화면과 스토리에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봉준호 감독이 숨겨 놓은 디테일들을 찾아내고, 스토리의 복선에 감탄하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정말로 봉준호 영화가 그럴까? 봉준호 영화에는 어떠한 해석의 가능성도 없는 것일까?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완벽한 디테일의 미쟝센과 이야기구조만이 존재할까? 만약 그렇다면 봉준호 감독은 그저 그런 감독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오히려 위험한 감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루이 알튀세르의 표현을 빌려, 기계적 인과성을 통한 1차원적 재현으로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를 남녀노소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감독이라면, 봉준호 영화는 앙드레 바쟁이 비판했던 소비에드 시네마의 스탈린에 대한 신화 영화들과 별반 다를게 없어진다.
봉준호 감독이 동시대의 흥미로운 감독인 이유, 혹은 봉준호 영화가 기묘한 지점은 봉준호 영화는 일종의 동시대에 대한 변증법적 증상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은 어떠한 디테일도 담아낼 수 없음을 보여주는 불가능성이며, 동시에 그 디테일들이 직조해내는 여러 장르의 이종배아는 "봉준호"라는 장르가 된다.[1] 다른 말로 해서 봉준호 영화는 "무"無이다. 그가 만들어낸 디테일은 어떠한 것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장르가 되어 "봉준호"라는 영화세계를 만들어낸다. 봉준호 감독의 8번째 연출작 <미키 17>은 이런 맥락에서 봉준호스러우면서도 봉준호스럽지 않은 오묘한 영화이다. 이제부터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를 해체해보며 작품에 대한 간략한 비평을 해보고자 한다.
무를 가득 채우는 로맨스: 미키, 나샤, 그리고 교환공식
유운성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봉준호의 <기생충>은, 나운규와 임화와 같은 식민지 시기의 조선영화인들을 옭아매었고 해방공간과 오랜 군부독재의 시기를 거치는 동안 확대재생산되었던 한국영화의 형식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와 관련된 모순을 해결하거나 극복하거나 우회하는 대신 아예 모순 자체를 형식화해 버리는 방법으로 답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2] 유운성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서 단순히 봉준호 감독의 미쟝센과 쇼트를 넘어서 한국영화사적 맥락, "모순적 비형식"을 읽어내고 있다.[3] 즉, 유운성은 봉준호 감독에 대한 세간의 비평에 강렬히 저항하며, 한국영화 그 자체의 모순에서 <기생충>을 읽어내며 이에 대한 형식비평을 통해 봉준호 감독의 독창성을 발견해낸다. 유운성은 뒤이어 봉준호 영화에서 "모순적 비형식"이 그 자체로 형식이 되어 "'국제적'으로 수용 가능한 '장르'"가 되었음을 주목한다.[4]
이번 <미키 17> 역시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다. 표면적으로 SF장르인 <미키 17>은 봉준호 감독의 이전 영화들처럼 다시 한 번 장르의 혼종성을 보여주며 무정형을 자신의 장르 자체로 삼는다. SF(사이언스 픽션)이라는 용어를 만든 휴고 건즈백 이래로, SF는 과학적 상상력과 함께 과학적 기술이 갖고 올 미래상 혹은 그에 따른 윤리적 가치를 다루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으며, 문학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중요한 장르가 되었다. <미키 17>도 큰 맥락에서 전형적인 SF의 장르의 정형을 갖고 있다. <미키 17>의 시간대는 2054년이며 주인공인 미키는 죽을 수밖에 없는 노동(엑스펜더블)을 하며 복제기술을 통해 끊임없이 되살아난다. 장소는 니플헤임이라는 외계행성이다. 미키는 니플헤임으로 가는 우주선에서 희생이 필요한 노동을 하며, 니플헤임에 도착해서는 그 공간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을 만들기 위한 생체실험체가 되어 연속적으로 죽기도 한다. 등장인물들은 미키를 인간이라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인물들과 지속적으로 갈아 쓸 수 있는 사물로 받아들이는 인물들로 나뉘어진다. 기억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며 다시 태어나는 미키는 착오로 인해 멀티플(동시에 두 인격체가 존재하는)이 되어 미키 17과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유한 성격에 항상 덜 떨어져보이는 미키 17과 화가 많고 화끈한 성격의 미키 18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며 본격적으로 위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은 SF를 <미키 17>의 장르로 사용하지 않는다. SF는 오히려 맥거핀이나 다름없다. <미키 17>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장르가 혼종되어 있다. SF, 코미디, 로맨스. 영화는 이전의 봉준호 영화처럼 초반은 SF와 코미디와 같은 장르 영화처럼 느껴지다가 영화가 엔딩에 도달할 수록 무규정적 장르임을 알게 되지만, 엔딩에 가서 <미키 17>과 이전의 봉준호 영화와의 구분점이 생긴다. 그리고 그 구분점은 뒤에서 이야기하게 될 해피엔딩과 주인공(프로타고니스트)의 성장이다. 해피엔딩과 위기를 극복한 주인공의 성장은 극영화의 대표적인 서사구조이지만, 로맨스의 가장 알려진 형식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로맨스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고 한 단계 성장한다. 이전의 봉준호 영화와 <미키 17>의 다른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봉준호 장르"의 대표적인 특징은 주인공의 성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여러 사건들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기도 하고, 위기에 굴복하기도 하는 봉준호 영화의 주인공들은 영화의 오프닝이나 엔딩에서나 여전히 똑같은 인물이고 똑같은 모자람을 갖고 있었다. <괴물>의 박강두가 그러했고, <기생충>의 기우가 그러했으며, <옥자>의 미주도 다시 숲속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미키는 다르다.
영화에서 미키는 자신의 모든 위기가 어렸을 때 자신이 누른 버튼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미키는 엄마와 함께 있는 차에서 빨간 버튼을 누른 순간 자동차가 폭발하여 엄마를 잃었다.) 때문에 미키는 자신의 역경과 죽음을 온전히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받아들인다. 물론 본인은 어떤 직업인지에 대한 설명도 읽지 않고 지원하게 되었지만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을 통해 미키는 미키 1(미키 프라임)에서 미키 17까지 오게 된다. 여기서 조금 오래된 마르크스의 비유를 들자면 미키는 사용가치로서의 노동자가 아닌 교환가치로서의 익스펜더블, 즉 화폐가 된다. 함선의 모든 사람들이 미키를 교환가치로서의 화폐로 대하지만, 미키의 여자친구로 등장하는 나샤 배릿지 만큼은 다르다. 그녀는 미키 1, 미키 2, 미키 17, 미키 18 등등에 상관없이 그를 하나의 존재로서 대한다. 즉, 나샤는 사용가치로서의 미키의 존재 그 자체를 사랑했다. 그녀가 미키 17과 미키 18을 동시에 사랑하며 둘이 된 미키와 동시에 침대 위의 사랑을 제안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며, 미키의 무한한 교환가치에 끌린 카이에게 미키 17과 미키 18 모두 자신의 남자친구라고 화를 낸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멀티플이라는 진실을 마주하고 미키들을 없애버리려고 했던 케네스 마샬이 교환가치의 부작용(멀티플)을 꼬집으며 화폐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했던 프루동주의라면, 멀티플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미키의 존재를 사랑하는 나샤는 마샬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갔다. 그의 죽음에 누구보다 공감해주며 언제나 미키의 옆에 있어준 나샤 덕분에, 미키는 화폐로서의 기호(숫자)가 아닌 미키 '반스'라는 이름을 되찾게 된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은 미키는 오랜 PTSD를 극복하며 직접 폭발버튼을 눌러 휴먼 프린터를 파괴한다. 이렇게 미키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 최초로 위기를 극복하여 성장한 주인공이 된다. 미키와 나샤의 사랑이야기는 이렇게 아름답게 끝나는 듯 하다. 봉준호 장르에서 가장 행복한 결말이며, 동시에 최초의 로맨스가 완성되는 지점이다.
한 발 더 나아가지 못한 봉준호의 혁명의식: 미키와 부정성
이처럼 <미키 17>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샤가 새로운 지도자로 선출되고 '익스펜더블'은 사라진다. 미키는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되며 미키 반스라는 존재를 되찾는다. 니플헤임에서 인간과 크리퍼는 화해하고 공생하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봉준호 영화 중 가장 따뜻한 결말이다. 영원히 범인을 잡지 못 하거나(<살인의 추억>), 괴물을 죽이지만 자신의 딸도 잃거나(<괴물>), 앞칸의 지배자들을 해치우지만 기차가 전복하여 두 명의 아이만 살아남는(<설국열차>) 혹은 가족이 해체되고 집의 지하에 갇히게 되었던(<기생충>) 봉준호 영화와 다르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미키 17>의 해피엔딩을 무비판적으로 읽고 싶지 않다. 만약 여기서 <미키 17>의 해피엔딩을 그렇게 읽는다면, <미키 17>는 다시 한 번 해석이 필요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봉준호 영화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봉준호 영화는 무수한 모순과 부정성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미키가 자신의 존재를 취하게 할 수 있게 해준, 그리고 <미키 17>의 해피엔딩이 가능하게 한 나샤와 미키라는 캐릭터를 재해석해볼 것이다.
앞서 미키를 마르크스의 교환공식에 비유하여 분석해보았다. 마르크스의 교환공식은 자본주의에 모순과 부정성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하나의 지표이기도 하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교환과정을 M-C-M'를 통해 동일한 가치가 아닌 잉여가치를 발생시킨다. 이처럼 마르크스의 교환공식은 그 자체로 동일성이 성립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며, 비동일성이 자본주의의 형식임을 보여준다. 이는 이후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테오도르 W. 아도르노에 의해 헤겔의 악명 높은 "부정의 부정"을 재해석하는 방식과 형식적 유비를 보여준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에서 헤겔의 변증법, 즉 '부정의 부정'이 결국은 긍정으로 결정지어진다고 비판하며, 부정의 부정을 부정성으로 읽어야함을 주장한다. 이는 당대의 모든 요소를 부정성으로 보며, 유토피아의 불가능성을 주장했던 아도르노의 비판적 태도의 근원이 되었다. 아도르도에 대한 가장 충실한 분석자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아도르노의 부정변증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정의 부정, 즉 개개 불협화음의 빚을 완전히 탕감하는 일이 마치 어떤 거대한 신용제도에- 서처럼 무한정 연기된다는 점에서, 긴장은 근본적 조직원리가 된다."(42쪽)[5]
나샤는 확실히 미키의 존재 그 자체를 없애버리고자 했던 케네스보다 한 발 더 나아간 인물이지만, 결국은 비판으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미키의 익스펜더블은 비윤리적으로 보이며, 미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부정의 부정을 통해 되돌아오는 부정성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때문에 미키는 죽음을 통해 다시 한 번 부정에 의해 부정이 되어 되살아난다. '익스펜더블'은 사용자들의 의도와 달리 그 자체로 '비판'이 되며, 그들에 대한 공격이 되었다. 미키가 자신의 죽음으로 모두를 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때문이고, 미키 18은 어떠한 도움 없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케네스와 함께 폭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샤는 '익스펜더블'을 폐지하므로 미키의 존재를 복원시키고, 익스펜더블의 부정성을 소멸시키며 긍정성으로 귀결되게 한다.
SF장르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작품을 이야기해보자면, 구파수 륜호이 감독의 <소리굴다리>(2023)일 것이다. SF와 다큐멘터리의 졀묘합 결합의 다큐픽션인 <소리굴다리>는 '구원'이라고 스스로를 칭한 AI가 인류의 종말을 막기 위해 '저항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예술적 데이터를 모으게한다. 소리굴다리를 찾아가며 데이터로 환산될 수 없는 새로운 퍼포먼스를 펼쳐야만하는 저항자들은 '구원'의 새로운 시각적 프로세스가 되기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SF적 상상력이 되기도한다. 구파수 륜호이 감독은 SF와 시각적 프로세스 그 어느 축을 선택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일종의 긴장상태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러한 긴장은 소리굴다리의 몽타주가 되고 더 나아가 SF와 다큐멘터리 사이의 긴장으로 확장된다. 물론 <미키 17>도 자본주의에 대한 충실한 재현을 보여주고 있는데 미키의 익스펜더블이 자본주의의 교환공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익스펜더블이라는 가혹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미키 반즈는 동시대의 상품과 화폐에 대한 유비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을 자신의 이전 영화들과 다르게 해피엔딩에 이르지만, 그 해피엔딩은 동시대에 대한 비판이 되지는 못한다. 즉, 봉준호 감독은 부정의 부정을 긍정으로 해석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부정성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할리우드 자본만을 통한 제작은 봉준호 감독에게는 또 한 번의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미키 17>은 마치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로서 사용되던 미키 반즈처럼, 봉준호 영화로서의 사용가치가 아닌 정치적 가능성을 말하기 위한 교환가치로서의 SF영화들의 자장안에 그친다. 그럼에도 <미키 17>은 봉준호스럽지 못하지는 않는다.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은 충분한 재미를 갖추고 있으며, 자기-비평적 요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영화의 곳곳에 <괴물>, <설국열차>, <옥자> 등이 생각나는 다양한 요소들이 숨겨져 있다. 전반부의 SF적 상상력은 매력적이며, 후반부의 로맨스는 때론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이다. 이것이 충분히 봉준호스럽지는 못했지만,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하는 이유이다. 때문에 <미키 17>은 완벽한 작품은 아니지만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이질적이면서 어쩌면 중요한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1] 인디와이어IndieWire의 David Ehrlich의 <기생충>에 대한 리뷰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에서 차용. "봉준호는 자기 자신이 장르가 되기에 이르렀다." https://www.indiewire.com/features/general/parasite-review-bong-joon-ho-1202143634/
[2] 유운성, "이식과 기생: 봉준호의 <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 2020. 봉준호의 <기생충>을 통해 읽는 봉준호[쓺] 제10호에 수록된 유운성의 블로그 글을 찾고할 것 https://annual-parallax.blogspot.com/2020/06/blog-post.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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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프레드릭 제임슨, T.W. 아도르노, 혹은 역사적 비유들, 맑스주의와 형식, 4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