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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이야기] <올드보이>로 라캉 읽기

그대는 결여를 채울 수 없음을 인정하라

by 날날이

들어가며: 뒤집혀진 라캉


동명의 만화 <올드보이>를 원작으로 하는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는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영화이며 박찬욱 감독의 초기 작품 중 "복수"를 그리고 있다고 일컬어지는 복수 3부작 중에 가장 칭송받는 작품이다. <올드보이>라는 명성은 박찬욱 감독을 세계적인 감독으로 칭송받게 해주었으며, 많은 씨네필들로부터 사랑받는 감독으로 만들어주었다. 오래 전 본 <올드보이>를 친구와의 이야기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오랜만에 본 <올드보이>는 이전에 봤을 때보다도 더 깊게 다가왔으며, 영화 속 여러 알레고리를 이야기해보고 싶은 큰 충동이 생겼다.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감히 말해보자면 <올드보이>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정신분석학적인 텍스트이며, 가장 라캉적인 영화이다. 그러나 박찬욱 감독이 자크 라캉의 충실한 해석자라는 의미이거나 정신분석학에 기반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신분석학의 입장에서 <올드보이>를 읽어보려는 것이다. 물론 필자는 정신분석학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비판이론을 오랜 기간 읽어왔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자크 라캉의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읽은 것은 얼마 되지 않으며, 대부분은 프레드릭 제임슨 혹은 슬라보예 지젝과 같은 비판이론가들을 경유한 정신분석학이다. 때문에 이 글에서 이야기되는 정신분석학의 신용도는 보장할 수 없으며 정확하지 않은 자의적인 해석에 불과하는 점을 미리 밝힌다.


헤겔을 통한 라캉의 해석자로 널리 알려진 슬라보예 지젝은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속 [그의 불손한 응시 속에 나의 파멸이 크게 써 있도다]라는 글에서 "사드"에 대한 라캉에 해석과 알프레드 히치콕에 대한 윌리엄 로스먼의 분석에 근거하여 히치콕과 관객 사이의 사디즘적 유희를 재해석하며 히치콕을 분석한다. <올드보이>에서도 지젝이 한 시도처럼 이우진과 오대수의 관계 속에서 일종의 사디즘적 유희가 작동하고 있으며, 일종의 알레고리로서 작동한다. 필자는 <올드보이>를 정신분석학적 텍스트 그 자체로 읽으며 이를 통해 주체, 부정성, 알레고리 등을 재해석해볼 것이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대사는 영화의 초반과 엔딩에 두 번 등장한다. 처음은 영화의 초반 옥상 위에서 강아지를 안고 자살하려는 남자의 입에서 뱉어진다. 15년만에 세상으로 나온 오대수에게 자살남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한 자살남의 대사는 오대수에 의해 다시 한 번 읊어지고,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가 된다. 때문에 오대수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된 후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최면술사에게 쓴 편지를 통해 다시 한 번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말이 반복된다. 겉으로 보면 "짐승만도 못한 놈"은 죄를 지은 죄인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자살남은 개를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사랑하다가 아내에게 발각되어 수치심에 자살하는 남자라는 설정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박찬욱 감독이 오광록 배우에게 이를 상상하며 연기를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알려졌으며 이후 공식설정처럼 되었다. 또 다른 죄인인 오대수는 이우진에 의해 자신의 딸 미도를 사랑하게 되는 근친상간의 죄를 지었다. 때문에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대사는 죄를 지은 혹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에 대한 이야기처럼 읽힌다. 모든 것을 계획하고 조종한 이우진 역시도 자신의 누나를 사랑한 근친상간의 죄를 지은 죄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살남이 떨어지지 못하게 붙잡는 오대수

그렇다면 반대로 짐승이 아닌 인간이란 무엇인가? 르네 데카르트의 코기토 이후,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인식을 대상인 아닌 주체의 몫으로 돌리며 진정한 주체의 탄생을 발명했다면, 프로이트-라캉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은 사회적으로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주체에 필연적으로 내제할 수밖에 없는 결여를 밝혀냈다. 이드/에고/슈퍼에고의 프로이트의 구분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자크 라캉은 어린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타자를 인식한다는 의미에서 거울단계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라캉은 거울단계에서 유아가 거울을 통해 신체의 일부와 자기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주체가 형성되어 끊임없이 자기자신과 현실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려한다. 라캉은 거울단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거울단계는 본질적으로 불충분함으로부터 예기(anticipation)에로 내던져진 한 편의 연극이다. 그것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에 매혹되어 이미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파편화된 육체의 이미지들로부터 내가 정형술과 관계 있다고 이야기한 통합적인 형태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범위에 걸쳐 있는 일련의 환상들과 관련을 갖는다."[1]


때문에 거울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이 볼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 동일시(사랑)하게 되고, 사회적 규범(아버지의 이름)안에서 살아가기 위해 이 동일시를 거부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아버지의 이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세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팔루스를 거세당한 주체는 필연적으로 결여를 지니게 된다. 주체는 결여를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대체제, 즉 대상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상a이다. 그리고 대상a에 대한 인간의 힘을 라캉은 '욕망desire'라고 정의내린 바 있다. 때문에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상징계, 라캉의 의미에서는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거세된 인간은 그 자체로 결코 완전하지도, 순수하지도 않은 존재이다. 즉, 인간은 그 자체로 객체인 짐승만도 못하다. 인간이라는 주체는 언제나 결여되어 있으며 이를 위해 언제나 대상을 갈구하고 탐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뒤집을 필요가 있다. "아무리 짐승만도 못한 놈이어도 살 권리는 있는 거 아닌가요?"가 아니라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말로 살아갈 필요가 있지 않은가요?"로 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우진의 상징계, 새로운 언어로 포섭된 오대수는 이미 거세당한 주체이다. 자살남의 말을 되뇌이며 언어와 만나는 오대수는 이우진이라는 상징계로 진입하는 즉시 결여를 지닌 주체가 된다. 이에 반하여, 이우진은 여전히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하고 유아기의 상상적 동일시에 머물러있다. 때문에 누나를 잊지 못하고, 여전히 누나를 사랑의 동일시의 대상으로만 여긴다. 결여를 지닌 주체, 즉 짐승이나 다름없는 오대수와는 반대로, 이우진은 결여가 존재하지 않으며, 때문에 스스로를 순수한 주체로 여긴다. 그의 말투나 연약한 몸이 아직 유아기에 머무르는 것은 이러한 이유이다. 그리고 여기서 자살남의 넥타이를 잡은 오대수의 손과 누나 이수아의 손을 잡은 이우진의 손이 전도된다.

사랑하는 누나 이수아가 떨어지지 않게 붙잡는 이우진

불완전하고 결여된 오대수는 잠깐이지만 자살남을 구할 수 있다. 이미 상징계에 진입한 오대수는 자신과 똑같은 결여된 존재가 죽던 말던 상관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나 들려줄 겸 자살남의 죽음을 미룬다. 반면, 순수하고 완전한 이우진은 이수아를 구할 수 없으며, 더 나아가 그녀의 손을 놓으며 죽게 만든다. 상상임신으로 인해 배가 불러오는 그녀가 살아있다면, 이우진은 유아기를 끝내고 아버지의 이름 안으로 들어가야하기 때문이다. 실로 "짐승만도 못한 놈이야말로 살아갈 필요가 있지 않은가요?"이다. 이렇게 박찬욱 감독은 라캉의 말을 정확히 반대로 실현시켰다. 박찬욱 감독은 이러한 결여를 단순히 캐릭터에 그치지 않고 영화 전체의 형식에 기입하였는데, 이를 위해서 장도리 롱테이크 액션신을 이야기해야한다.



롱테이크라는 결여, 영화 전체를 불완전하게 만들다.


영화비평과 영화이론의 아버지라고 칭할 수 있는 앙드레 바쟁은 영화에서 의미작용을 만들어내는 몽타주에 반대하고 카메라 앞의 사실성에 주목할 것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금지된 몽타주]라는 글에서 바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흔히 영화의 본질이라 칭해왔던 몽타주는 이런 점에서 볼 때 가장 문학적이고 반영화적인 방식이다. 반면에 순수상태에서의 영화적 특성을 한 번 포착해보면 그 특성이 공간을 사진 한 장면에 담아낼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2] 즉, 바쟁의 몽타주에 대한 선언은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과 해석을 금하게 하고 감독이 강요하는 의미만을 만들어내는 몽타주는 사진적 이미지를 통한 새로운 가능성의 매체인 영화의 정신과는 위배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바쟁이 지지했던 것은 특정한 의미를 생성해내는 몽타주보다는 데쿠파주와 롱테이크였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움베르토 D>(1952)에서 마리아의 롱테이크에 대한 바쟁의 묘사에서 드러난다.


<올드보이>에서도 유명한 롱테이크가 있다. 오대수가 장도리 하나만 들고 박철웅의 부하들과 싸우는 장도리 롱테이크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수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오마주되는 장면이다. 화려하고 속도감이 필수적인 액션씬에서 사용된 롱테이크가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몸과 액션을 멈춤없이 보여주다보니 오대수라는 캐릭터의 처절함을 더욱 강력하게 보여주며, 액션씬에서도 롱테이크가 사용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실제로 박찬욱 감독은 이 씬을 위해 정교하게 짜여진 쇼트들을 촬영하려고 했지만, 촬영시간과 같은 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즉흥적으로 롱테이크를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장도리 롱테이크씬을 캐릭터의 처절함을 혹은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한다면, 이 씬을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완전히 탈각시켜 물화시키는 것에 불과해진다. 오히려 장도리 롱테이크씬은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볼 필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은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어 오대수와 박철웅 무리의 구도로 롱테이크를 찍었다.

영화 전체에서 오대수의 액션씬들은 빠른 컷전환이나 점프컷을 통해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영화의 어떤 다른씬에서도 롱테이크가 중요하게 쓰여지지 않았다.특히나 오대수라는 캐릭터가 감금당한 15년 동안 격투기를 독학했다는 설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올드보이>라는 스릴러 느와르라는 장르에 액션씬은 나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장도리 롱테이크를 제외한 모든 오대수의 액션씬을 통해 스릴러 느와르라는 장르를 완벽하기 위해 스타일리쉬한 편집을 보여준다. 때문에 장도리 롱테이크는 다른 씬에서 사용되는 쇼트들과는 다르게 영화 전체에서 굉장히 이질적이다.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측면에서 장도리 롱테이크는 일종의 파열음을 만들어내고 영화를 불완전하게 만든다. 때문에 장도리 롱테이크씬은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결여 그 자체이다. 수많은 감독들이 이 씬을 오마주하는 이유는 결여를 채우기 위한 대상a에 불과하다.


<올드보이> 그 자체를 불완전하게 만들고 비순수하게 만드는 장도리 롱테이크는 단순히 주체의 필연적 결여에 대한 알레고리일뿐만 아니라 영화cinema 그 자체의 비순수성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바쟁은 다른 글 [비순수 영화를 위하여: 각색에 대한 옹호]에서 영화의 각색을 재해석하며, 영화가 지닌 필연적 비순수성을 영화 그 자체의 매체특정성으로 해석한다. 바쟁의 영화에 대한 유명한 비유는 이에 대해 더욱 쉽게 보여준다. "영화는 강가에 물을 대면서 예술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 협곡을 아주 빠르게 파내고 슬며시 그 예술들을 에워싸 땅속으로 침투해 들어간 후 보이지 않는 지하통로를 만드는 일만 남았다."[3] 즉, 영화는 각색을 통해 다른 예술들과 상호작용하며, 영화 그 자체가 그것을 필요로 하기도하며 다른 예술들도 영화를 필요로한다. 영화는 이러한 비순수성에서 태어났으며, 이를 통해 발전해왔다. 영화의 이러한 비순수성은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나 [사진의 작은 역사]에서 주목한 사진기라는 새로운 기술복제의 가능성이자 특정성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드보이>의 장도리 롱테이크는 이러한 영화의 각색이 갖는 비순수성의 힘에 대한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3차원의 클로즈업에서 2차원의 롱샷으로 넘어가면서 만들어지는 오대수와 박철웅 무리의 평면적 구도는 2차원적 만화 <올드보이>에 대한 각색이 갖는 영화 <올드보이>의 비순수성 그 자체이다. 그리고 장도리 롱테이크는 그 자체로 <올드보이>의 결여가 되면서 지속적으로 영화에서 욕망의 힘을 생성해낸다. 그 욕망은 그 자체로 이우진과 오대수의 관계로, 그리고 더 나아가 박찬욱 감독과 관객 사이에서 작동한다.



만약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면, 죄와 교수대를 동시에 바라보면서도 죄를 범하고야 마는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


"만약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가 인간에게 있다면, 죄와 교수대를 동시에 바라보면서도 죄를 범하고야 마는 인간은 대체 어떤 존재란 말인가?"는 사드 후작의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에서 등장하는 한 구절이다.[4] 마치 성악설이 생각나는 사드의 질문은 또한 사드와 사드의 피해자 사이의 관계를 정립해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사회적 규범과 규칙이 지배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사드는 평생 그러한 규범과 규칙을 깨기 위한 실천가이자 철학자였다. 때문에 사드에게 죄를 범하는 것은 인간이 반드시 지녀야할 태도인 동시에 필연적인 것이었다. 라캉은 "Kant with Sade"에서 사드적인 환상의 두 가지 단계의 행렬을 그린 도식을 제안했다.

그림 1:

그림 1에서 V는 희열의지로 사디스트의 주체가 갖는 근본 태도인 타자의 고통 속에서 희열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S는 고통받는 타자의 주체이며 빗금 쳐져 있지 않은 완전한 주체이다. 즉 사디스트가 그의 존재의 확증을 추구하는 기생자라면, 그의 희생자, 타자는 그/그녀의 고통을 통해 스스로를 저항하는 견고한 실체로 확인한다. 그렇기에 V에서 S는 명백한 사디즘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나 라캉은 이것이 이 관계의 진실인 또 다른 관계를 감추고 있다고 분석한다. 이 또 다른 관계는 “도식의 하층부에, 분열된 주체에 대한 욕망의 대상-원인의 관계에 포괄되어 있다.”[5] 즉, 공격적인 희열의지의 사디스트는 ‘진실’이 대상인 유사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진실한 입장은 타자의 희열의 대상-수단이 갖는 입장이다.”[6] 사디스트의 전략은 타자에 복무하는 대상-수단의 역할을 취함으로써 주체의 분열된 구성 조직을 피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분열된 자는 타자에게로, 이항된다. 그렇기에 사디즘적 수행은 희생자의 분열에 의존하고, 그 분열을 통해서만 쾌락을 누린다. “사디스트의 진짜 욕망은 ‘악-의-최고-존재’인 타자의 쾌락의 도구로서 행동하는 것이다.”[7]

그림 2: 그림 1을 90도로 뒤집은 그림 2

라캉은 사드가 환상의 장소란 환상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틀 속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그러한 환상에 속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첫 번째 도식을 돌려 두 번째 도식을 만든다. 이는 사디즘적 환상을 꿈꾸는 주체, 타자의 사디즘적 의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대상-희생자의 실제 장소이다. 따라서 사드는 “끊임 없는 괴롭힘의 희생자였으며, 국가기관들이 도덕주의적 사디즘을 잔존시키기 위해 잡아먹은 대상”이었고 “진짜 희열의지는 주체를 다루는 국가-관료주의적 기구 속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8] 따라서 1/4회전은 사디스트를 희생자의 위치로, 위반은 법을 영속시키는 것으로 나타나게 만든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히치콕과 관객 사이의 사디즘적 유희에 적용시킨다. 관객이 히치콕이 만들어 놓은 사디즘적 동일화를 통해 사디즘적 희열의지로 충만해지면, 히치콕은 관객의 욕망을 실현한다. 그로 인해 관객은 자신이 진정한 사디스트인 히치콕에 의해 완전히 조종당했음을 시인하게 된다. 결국 관객은 자신의 욕망의 분열된 성격에 직면하게 된다.

오대수는 결국 이우진의 위치를 알아내고 둘은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 함께 올라간다.

이는 이우진과 오대수 사이의 사디즘적 유희에서도 유사하게 작동한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완전히 지배해버린다. 그의 모든 말을 도청하며, 그의 모든 모습을 촬영하고, 그의 모든 행동들을 뒤에서 명령하고 조종한다. 오대수는 이우진의 최면 아래에서 미도를 겁탈하려 하고 사랑하게 된다. 그는 이우진의 계획 아래에서 박철웅 패거리를 박살내고 결국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까지 도달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우진의 진실은 사실은 그가 오대수의 쾌락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마침내 모든 진실을 마주한 오대수가 이우진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혀를 자르고 이우진의 심장을 머출 수 있는 버튼을 누르며 녹음되어 있는 자신과 미도의 섹스 음성까지 듣게 되지만 실로 그것이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다. 미도와의 사랑이 이우진의 최면이 아님을 재확인하고 다시 한 번 살아갈 수 있는 기회말이다. 때문에 오대수에 대한 이우진의 모든 가학적 행위는 오대수의 쾌락과 욕망을 위한 도구이다. 이우진이 한 마지막 대사,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는 본인의 복수가 실은 오대수의 욕망을 위한 도구였음을 시인한 증언이나 다름없다. 때문에 실은 진실을 마주한 것은 오대수가 아닌 이우진이다. 자살남의 넥타이를 잡은 오대수의 손이 전도되어 이수아의 손을 잡은 이우진의 손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이우진은 사디스트의 자리에 위치했지만, 이 관계를 통해 쾌락을 유희할 수 있었던 사람은 오대수였다. 때문에 이우진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밖에 없었다.


이제 이 관계를 90도로 뒤집으면, 박찬욱 감독과 관객 사이의 사디즘적 유희를 밝혀낼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은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사디즘적 동일화에 의한 사디스트로서의 희열의지를 가득하게 한 것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사디즘적 동일화를 하게 한다. 박찬욱 감독에 의해 관객은 오대수에게 동일화하여 복수라는 이름 하에 오대수의 완벽한 복수를 보려는 사디즘적 욕망을 갖게 되지만, 박찬욱 감독은 관객이 희열의지로 충만해졌을 때, 관객의 욕망을 실현해버리며 그 덫이 사라지게 한다.[9] 오대수와는 또 다른 진실(실은 이 관계를 조종한 것은 오대수였으며, 과거의 트라우마를 마주한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을 마주한 이우진이 스스로 자살하는 것처럼 관객은 이우진의 자살을 보고 자신이 "유일하고도 진정한 사디스트"인 박찬욱 감독에 의해 조종당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때문에 관객은 자신의 욕망이 모순적이고 분열되었음을 인식하게 된다.[10] 이러한 맥락에서 관객은 죄와 교수대를 보고도 죄를 범하고야 마는 인간이라는 존재나 다름없다. 관객은 자신의 결여를 충종시키기 위해, 그리고 분열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끝없이 영화를 해석하고 이야기한다.



나가며: 왜 풀어줬을까?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의 붕괴


이처럼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은 지속적으로 관객을 자극시키고 관객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동시에 <올드보이>는 동시대에 대한 알레고리이자 영화의 정치적 불가능성에 대한 지표이기도 하다. 정치적 모더니즘 시기의 수많은 예술적 기획들은 고전주의의 완전성을 깨트려 정치적 가능성을 도모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정사>는 고의적으로 영화의 내러티브에 필요하지 않는 텅 빈 샷들과 롱-테이크를 보여주기 시작했고, <붉은 사막>은 고전주의 봉합을 깨트렸다. 누벨바그 감독들은 영화의 형식을 전면으로 보여주며, 클래식 할리우드 영화가 갖고 있던 완전함을 깨트리기 시작했다. 7-80년대 이후 고다르를 포함한 수많은 그의 후배 프랑스 감독들, 워홀이나 스노우로 대표되는 구조영화와 같은 실험영화들, 그리고 아메리칸 뉴웨이브 등이 그 예이다. 이들의 목표는 ‘소격 효과’를 통해 고전 영화의 몰입적 성격을 깨트리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11] 즉, 정치적 모더니스트들은 이데올로기를 지시하는 고전주의 영화의 ‘내러티브 종결narrative closure’과 봉합을 거부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정치적 모더니즘의 목표는 자본주의를 보편화시킨 상징계를 거부하는 것이다. 즉 이들이 상징계와 떨어트려 놓으며 드러낸 부정성들은 정치적 가능성을 위함이었다. 이들의 시도는 후기자본주의라는 거대한 대타자에 의해 다시 한 번 물화되고 상품화되어 포스트모더니티의 양식이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이들의 시도만큼은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을 위한 것이었다.


이들의 시도를 라캉의 언어인 응시gaze를 통해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볼 수 있다. 라캉이 [[세미나 1]]에서 미끄러짐과 빠져나감을 통해 설명한 응시를 살펴보자. “시각을 통해 구성되고 표상의 형체들 속에 정돈되는 것과 같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관계 속에서는 무언가가 흥에서 층으로 미끄러지고 통과되고 전달되면서 결국 항상 어느 정도는 빠져나가 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응시라 불리는 것입니다.”[12] 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응시는 실재적 위상을 갖는다. 즉 실재는 상징계로부터 미끄러지고 빠져나가는 x이다. 시선과 응시의 차이처럼 구분될 수 없지만 최소차이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캉의 실재는 부정성으로 존재하게 된다.[13]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 모더니스트들의 형식적 실험들은 부정성을 통한 실재의 출현, 실재의 재도약을 위함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기억을 지우고자 했던 오대수는 결국 마지막에 일그러진 표정을 보여줄 수밖에 없다.

반면, 장도리 롱테이크는 영화 전체에서 공백으로 자리하고 있지만, 실재의 출현 혹은 형식적 실험으로써 작동하지는 않는다. 또한 영화의 공백은 영화 속 한 명의 캐릭터에 의해 지속적으로 억압되고 봉쇄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도"의 역할이다. 관객이 미도의 정체를 알고도 미도에게 끌리는 이유이다. 미도는 우리가 실재를 목도하고 느끼게 될 두려움과 공포를 잠재워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오대수의 마지막 표정에 집착하게 된다. 그가 기억을 지우는데 성공했는지 혹은 실패했는지는 미도에 대한 우리의 죄책감을 지워 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침내 일그러지는 오대수의 표정은 동시대에 결코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의 자리는 존재할 수 없음을 지시하는 외상학적 증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올드보이>라는 영화는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의 불가능성을 지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다.




[1] 자크 라캉, [정신분석 경험에서 드러난 주체기능 형성모형으로서의 거울단계], [[욕망 이론]], 권택영 엮음, 민승기, 이미선, 권택영 옮김, 문예출판사, 1998, 44쪽.

[2] 앙드레 바쟁, [금지된 몽타주], [[영화란 무엇인가? 1. 존재론과 언어]], 김태희 옮김, 퍼플, 2018, 183-184쪽.

[3] 앙드레 바쟁, [비순수 영화를 위하여: 각색에 대한 옹호], [[영화란 무엇인가? 2. 영화와 그 밖의 예술들]], 김태희 옮김, 퍼플, 2018, 38쪽.

[4] D. A. F. 드 사드, [[사드 전집 1: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 성귀수 옮김, 워크룸프레스, 2014, 34쪽.

[5] 슬라보예 지젝, [그의 불손한 응시 속에 나의 파멸이 크게 써 있도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 김소연 옮김, 새물결, 2001, 319쪽.

[6] 같은책, 319쪽.

[7] 같은책, 320쪽.

[8] 같은책, 321-322쪽.

[9] 같은책, 323쪽.

[10] 같은책, 323쪽.

[11] 이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모더니즘의 기획들은 형식주의적이다.

[12] 자크 라캉, [[세미나 11]], 옮긴이 맹정현, 새물결, 2016, 116쪽.

[13] 이러한 라캉의 상징계와 실재계에 대한 묘사는 아도르노의 부정성과도 닮아 있다. 아도르노는 [[부정변증법]](1966)에서 ‘부정의 부정은 부정’이라는 총체성의 모순을 통해 총체성을 이야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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