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후계자에서 배신자로
오랜만에 축구이야기를 쓴다. '박지성'이라는 존재로 축구를 하게 되었고, 그를 보기 위해 새벽 3시 45분에 눈을 떠 네덜란드 에레디비시를 챙겨보며 해외축구에 입문하게 되었다. 박지성이라는 나의 영웅이 04-05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눈앞에 둔 4강전 2차전 AC밀란과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기 전 날, 또 하나의 이변이 일어났는데 강력한 우승후보이자 프리미어리그에서 역대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던 조세 무리뉴의 첼시FC(이하 첼시)가 같은 리그에서 비교적 초라한 성적의 리버풀FC(이하 리버풀)와의 2차전에서 패배하며, 결승전에 리버풀이 올라가게 된 것이었다. 박지성과 거스 히딩크가 이끌었던 PSV아인트호벤의 거센 저항을 이겨내고 결승에 올라간 AC밀란이 결승전에서 어떤 축구를 펼칠지 궁금하여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보게 되었고, 그렇게 리버풀, 그리고 스티븐 제라드의 팬이 되었다.
04-05 이스탄불의 기적의 상징이자 리버풀의 상징이 된 스티븐 제라드는 붉은제국이라고 불리던 70-80년대 리버풀의 황금기 이후, 리버풀이 배출한 최고의 스타이자 로컬보이였다. 치안이 안 좋고 거칠기로 유명한 하이턴이라는 리버풀 근교 출신인 제라드는 리버풀 유스팀에서부터 축구를 시작하여 18세에 1군으로 콜업되었고, 2003년 23살의 나이로 주장 완장을 받아 팀의 리더로 자리 잡았다. 04-05 챔피언스 리그(이하 챔스) 우승 이후, 제라드는 첼시와 무리뉴의 강력한 러브콜을 받았고, 실제로 크게 흔들렸다. 이미 리버풀에서 챔스에서 우승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우승가능성이 높은 팀으로 이적하는 것이 제라드 본인에게도 더욱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시즌 내내 첼시와 연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즌 종료 후 재계약 협상에서의 좌절 이후 제라드의 이적요청으로 인해, 현지 팬들은 제라드의 유니폼을 불태우는 등 점점 제라드에게 실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대화 이후, 제라드는 마음을 돌렸다. 첼시와 무리뉴와 함께라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겠지만, 콥(리버풀 팬, Kop)을 배신하고 다시는 리버풀을 위해 뛸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생각을 돌리기에 충분했다. 후에 제라드는 자신이 사랑하는 클럽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 제라드는 베니테즈의 말기에서부터 시작된 로이 호지슨, 케니 달글리쉬, 브랜던 로저스로 이어지는 암흑기 동안 리버풀을 지키며, 리버풀 팬들의 유일한 희망이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페르난도 토레스, 루이스 수아레즈 등 몇몇 스타 플레이어들이 떠나는 와중에도 제라드는 끝까지 리버풀을 지켰다. 때문에 팬들은 13-14 시즌 리그우승의 문턱에서 제라드의 실수로 우승을 놓쳤을 때도 끝까지 제라드를 응원했다. 하이턴 출신의 거친 소년에서 도시의 상징이자 리더가 된 선수에게 그 누구도 손가락질을 할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리그 우승을 바랬을 제라드를 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실수는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쇠락한 산업, 몰락한 노동계급, 그리고 도시에 대한 차별 등을 상징했다. 맨체스터로의 운하가 항구도시의 쇠퇴를 불러오고 신자유주의 이후 노동자계급의 몰락은 리버풀이라는 도시를 더욱 축구에 목 메달게 했으며, 그들에게 축구는 정부에 대한 반감, 지역차별 등에 대한 저항 그 자체였다. 특히나 힐스버러 참사에서 그들이 정부로 받았던 핍박은 그들의 연대를 더욱 공공히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제라드는 이 모든 저항의 상징이자 리더였다. 이렇게 그는 리버풀이라는 도시의 그리고 축구클럽의 암흑기를 버티게 해준 선수이자 상징이었다. 암흑기 동안 그는 모두를 하나로 만들어주고 한 방향으로 이끌어주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 모든 것을 바친 리버풀을 15-16시즌을 앞두고 떠나게 되었다.
제라드가 떠나고 리버풀은 여전히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의 퇴장이 본의 아니게 새로운 리더를 불러왔다. 바로 위르겐 클롭이다. 게겐 프레싱을 통해 독일 분데스리가뿐만 아니라 유럽을 휩쓸던 클롭이 리버풀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며, 리버풀은 완전히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왕성한 활동량과 빠른 역습으로 팀컬러가 뒤바뀌면서 부임 첫 시즌부터 유로파컵 결승에 진출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 제라드를 뒤이을 로컬보이가 등장했다.
트렌트 알렉산더아놀드는 데뷔 첫 시즌부터 꽤나 뛰어난 유망주로서의 활약을 보여주었다. 팀에 나다이엘 클라인이라는 걸출한 우측풀백이 있었음에도 출장할 때마다 뛰어난 활약을 보어주었고 17-18시즌부터는 주전으로 뛰게 되었다. 제라드가 은퇴 후 리버풀 유소년팀에 직접 지도한 것과 제라드처럼 우측풀백으로 1군무대를 데뷔했다는 점은 팬들에게 제라드의 후계자로 각광받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아놀드는 팬들의 기대에 보란듯이 17-18시즌 리버풀의 리그 4위,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등의 성적에 큰 기여를 한 선수이자 리그 내 탑 풀백으로 성장했다. 그렇게 그는 지금까지 정교한 킥을 바탕으로 한 뛰어난 공격력과 비교적 부족한 수비력을 커버할만한 투지로 리버풀의 오른쪽을 책임졌다. 아놀드의 등장과 함께 리버풀은 새로운 황금기를 맞으며 챔피언스리그, 프리미어리그, 클럽월드컵, FA컵, 리그컵 등 모든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때문에 아놀드는 제라드의 후계자인 동시에 그가 이루어내지 못한 업적들까지 모두 이뤄낸 로컬보이였다. 아놀드는 데뷔부터 꾸준하게 자신이 제라드와 같은 레전드가 되길 원하며, 자신의 커리어에 ‘이적’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언젠가 리버풀의 캡틴이 되길 원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이 도시를 위해 바칠 것이라고 밝혀왔다.
이렇게 그는 리버풀의 새로운 부흥기의 희망이자 상징이었다. 개인기록에서도 아놀드는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가장 많은 대회에서 우승한 로컬보이였으며,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가장 많은 어시스트를 기록한 풀백이 되었다. 몰락한 산업도시가 관광도시로 탈바꿈하여 다시 부활을 꿈 꾸듯이 리버풀 팬들은 그를 중심으로 새로운 붉은제국의 귀환을 꿈꾸었다. 철저하게 상업적 가치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구단을 운영 중인 FSG(펜웨이 스포츠 그룹)과 다르게, 아놀드는 모든 과학적 데이터와 무관한 리버풀 팬들의 축구에 대한 낭만이자 사랑이었다. 제라드와 마찬가지로 팬들은 그를 리버풀의 차세대 리더로 간주했고, 끝까지 지지했다. 수비력 논란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을 때에도 리버풀 팬들만큼은 그를 지키고 믿어주었다.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에서 수비력으로 인해 주전에서 밀렸을 때도 리버풀과 팬들은 아놀드를 지지해주고 그가 주전으로 뛰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팬들은 새로운 부흥기의 상징이자 새로운 리더가 될 아놀드를 지켜주고 지지해주었다.
그러나 24-25시즌의 시작부터 레알 마드리드와의 이적설이 불붙기 시작했다. 아놀드의 재계약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레알 마드리드는 그를 자유계약(FA)로 영입할 것임을 언론을 통해 은연중에 선언했고, 아놀드는 자신의 재계약 협상이 언론에 공개되지 않고 조용히 진행되고 싶음을 밝혔다. 그럼에도 팬들은 그를 믿었다. 재계약 진행이 잘 되도 있지 않음에도 그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가 리버풀과 함께라면 모든 기록들을 세울 수 있고, 장차 캡틴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제라드처럼 팀의 사정이 좋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24-25 시즌은 1위로 순항 중이었다. 때문에 모든 팬들은 축구선수들의 꿈과도 같은 레알 마드리드의 러브콜이더라도 아놀드가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클럽은 부흥기를 만들어준 클롭의 말처럼 선수를 뺏기는 팀이 아닌 커리어 내내 머무르고 싶은 팀이 되었다. 리버풀은 다시 한 번 잉글랜드 내에서 가장 강력한 팀들 중 한 팀이자 유럽에서도 손 꼽히는 팀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의 다짐과 팬들의 기대와는 달리 겨울 이적시장부터 아놀드가 이적을 결정했다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고, 리버풀에게 재계약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는 기사들이 나왔다. 심지어 2년 전부터 레알 마드리드가 아놀드에게 재계약을 진행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해왔다는 기사도 나왔다. 아놀드는 시즌 내내 제라드의 세레머니를 따라하거나 리버풀 엠블럼을 가리키는 등 팀에 대한 사랑을 보여주는 척을 하며, 뒤로는 레알 마드리와 계약하고 있었다. 이미 구두계약은 완료되었고, 계약서만 쓰면 되는 단계라고 알려졌고, 아놀드는 여전히 제라드의 자서전을 보이며 침묵으로 일관 중이다. 팀은 3월 좋지 못한 퍼포먼스로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탈락하고 리그컵에서 준우승을 하며 미끌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그는 우승이 확실시 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콥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사랑했던 선수를 뺏기는 상황에 놓였다. 더군다나 그냥 선수도 아닌 로컬보이이자 새로운 부흥기의 상징이자 팀의 리더가 될 선수를 말이다. 그 선수는 팀에 커다란 이적료를 선사해주는 것도 아니고 한 푼의 이적료도 없이 FA로 나가려한다. 리버풀이 제안할 수 없을 정도의 주급을 받기 위해 나가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이적한다면 아놀드는 제라드가 이루어내지 못한 모든 것을 이루어내며 리버풀의 새로운 상징이 될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박차고 나갈뿐만 아니라 다시는 리버풀을 위해 뛸 수 없을 것이다. 착한 팬들은 이미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이뤄낸 그를 응원하겠지만, 대부분의 팬들은 아닐 것이다. 그의 유니폼을 불태우며, 그에게 욕설을 퍼부을 것이다. 이미 리버풀 출신의 UFC 선수 패디 핌블렛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놀드가 리버풀을 배신했으며, 스카우저(scouser: 리버풀 출신에 대한 별명)도 아니라고 비난한 바 있다. 핌블렛의 말처럼 클럽뿐만 아니라 리버풀이라는 도시를 배신하는 그에게 이는 응당한 대가일 것이다.
그럼에도 팬들은 아놀드에게 제라드와 같은 선택을 하길 바랄 것이다. 그들은 그가 제라드를 뒤이을 새로운 리더가 되어주길 간절히 바랄 것이다. 리버풀 팬으로서 나도 그가 옳은 선택을 하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