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화이야기] 다큐멘터리와 다이렉트 시네마

프레더릭 와이즈먼의 <센트럴 파크> 리뷰하기

by 날날이

로버트 J. 플래허티는 캐나다의 원주민들을 촬영하고 기록한 이후, 카메라를 기록에 적극적으로 들여오며 최초의 장편 다큐멘터리로 일컬어지는 <북극의 나누크>(1922)를 제작했다. 이후 플래허티의 기록영상을 감명 깊게 본 영국의 비평가이자 영화감독인 존 그리어슨이 "Flaherty`s Poetic Moana"에서 플래허티의 <모아나>(1926)를 비평하며, 최초로 '다큐멘터리documentary'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다큐멘터리가 정립되기 시작했다. “폴리네시안 어린이와 그의 가족들의 일상생활의 시각이야기인 Moana는 다큐멘터리 가치(documentary value)를 갖고 있다”라며 <모아나>를 평한 그리어슨은 같은 글에서 "다큐멘터리"를 “현실의 창조적 처리(the creative treatment of actuality)”라 정의한다.[1] 즉, 그리어슨에게 보이는 플래허티의 기록영상은 자연이 보여주는 시적 아름다움(actuality)과 플래허티의 시선으로 선택된 이미지들(the creative treatment)이 합쳐진 작품이다. 이후 플래허티의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은 그리어슨을 통해 Empire Marketing Board와 General Post Office의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후 영국 다큐멘터리의 아버지가 된 그리어슨은 캐나다로 초청되어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Office National du Film)의 창립에 큰 영향을 끼쳤고, 퀘백으로 이주한 ONF의 지원을 ONF의 지원을 받은 젊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감독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다큐멘터리 제작방식이 시작되었다.[2] 바로 퀘백과 미국에서 시작된 '다이렉트 시네마'이다.[3] 다이렉트 시네마는 '현실reality'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탐구와 같은 인식적 변화와 동시녹음이 가능한 경량 카메라와 같은 물적 장치의 등장으로 인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적 변화와 물적 변화는 대상에 대한 감독의 묘사 혹은 이미지를 통한 담론의 생성보다는 대상에 카메라로 직접적으로 다가가 철저한 관찰자의 위치에 카메라를 위치시키는 방식으로 발현되었다. 때문에 다이렉트 시네마에서 감독의 개입은 배제되며 사건 혹은 대상의 사실성을 탐구한다.


프레더릭 와이즈먼Frederick Wiseman은 다이렉트 시네마를 앞장서서 이끌었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티티컷 풍자극>(1967)으로 데뷔한 와이즈먼은 그의 데뷔작에서 메사추세츠의 브릿지 워터에 위치한 주립 정신병원에서 환자, 정신분석가, 병원직원 등의 병원 안에서의 모습들을 그대로 남아낸다.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환자들이 받고 있는 인격모독적 대우, 환자들을 대하는 의사, 직원들의 행동 등을 담아내며 주립 정신병원에서 주최한 '티티컷 풍자극'보다 더욱 풍자적이며, 무서운 현실이 존재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내레이션이나 장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와이즈먼은 대상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며, 이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2017), <시티 홀>(2020),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2023)와 같은 최근 작품들에서도 자신의 제작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센트럴 파크>(1990) 역시도 이러한 맥락에서 제작된 와이즈먼의 작품이다. 영화는 센트럴 파크의 아침 풍경과 아침부터 공원을 즐기고 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티티컷 풍자극>에서처럼 공원 속 다양한 대상들에 가까이 다가간다. 비가 오는 공원의 모습, 공원에서 아침부터 발성 교육을 받는 사람들, 웨딩사진을 찍는 사람들, 그 누구도 와이즈먼의 카메라 앞에서 거짓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 모두 카메라 앞에서 때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때론 진지한 모습을 보인다. 와이즈먼은 이내 카메라를 옮겨 센트럴 파크에서 일어나는 행사, 시위, 그리고 센트럴 파크를 발전시키기 위한 모든 인물들을 담아내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을 담아내기 위해 와이즈먼은 어떠한 편도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두 구도를 만들어낸다. 한 쪽은 센트럴 파크를 존재하게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센트럴 파크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그들만의 굿즈를 팔기도, 그들만의 오래된 장소(테니스장)을 지키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 한 쪽에서는 더욱 더 많은 생기를 위해 기획을 하거나 허가 없이 굿즈를 파는 것을 저지하고, 새로운 공간(신식 테니스장)을 지지한다.


그리고 센트럴 파크라는 공간은 그 두 입장의 절묘한 관계와 협상을 통해 지속된다. 어느 한 쪽이 무너진다면, 센트럴 파크라는 공간은 신화화되거나 물화될 것이다. 와이즈먼의 카메라 역시 그 두 균형 사이를 절묘하게 이렇게 와이즈먼은 객관적인 시선에서 두 입장 모두를 담아낸다. 이렇게 와이즈먼의 카메라는 가까이 공원 안으로 다가가 참여자가 된다. 새로운 테니스장을 건설하기 위한 청문회 씬은 와이즈먼의 참여적인 카메라의 대표적인 씬이다. 기존의 테니스장을 유지하고 싶어하는 시민들과 새로운 테니스장의 건설을 원하는 시민들은 청문회에서 적극적으로 토론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어느 한 쪽의 입장도 놓치지 않는다. 기존의 테니스장이 지닌 향수와 낭만을 이야기하는 시민들과 그 낡은 테니스장의 불편함과 새로운 테니스장이 갖고 올 편리함을 이야기하는 시민들과 함께 카메라는 적극적으로 센트럴 파크의 생기를 불러온다.


CentralPark-6.jpg

그러나 동시에 와이즈먼은 그 어떤 카메라보다도 멀리 떨어져 관조자의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우연히 담아내게 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촬영 현장에서 와이즈먼의 카메라가 현장의 바깥에만 위치하듯이, 와이즈먼은 끊임없이 센트럴 파크에서 멀리 떨어진다. 그는 멀리 떨어져 센트럴 파크의 발전을 위해 회의하는 공무원들을 지켜보고, 굿즈를 팔다가 쫒겨나는 일반시민들을 지켜본다. 그의 카메라는 결코 자신들의 자유와 생존권을 침해한다고 울부짖는 여러 시민들에 감정이입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지켜보고 그들의 분노를 관조한다. 동시에 카메라는 센트럴 파크를 관장하는 공권력을 관찰하지만, 그들의 행동이나 정책을 비난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이처럼 와이즈먼의 다이렉트 시네마는 그 어떤 형식보다도 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동시에 멀어진다. 그럼에도 이러한 아포리아는 다이렉트 시네마라는 형식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듯 한다. 자신이 담아내고자 한 대상과 그 대상을 둘러싼 모든 우연한 사건들까지 담아내며, 와이즈먼은 관객으로 하여금 센트럴 파크라는 공간을 인식할 수 있게 한다. 때문에 이러한 그의 시도는 '다큐멘터리'에 대한 반성이자 확장이다. 그 반성 안에서 와이즈먼은 다시 한 번 카메라의 힘을 믿는다.














[1] John Grierson, “Flaherty`s Poetic Moana”, The Documentary Tradition, 2nd edition, p. 25.

[2] 김성욱, [생의 회복과 세계의 가능한 지속을 위하여 - 피에르 페로의 다큐멘터리], [[Docking]], 2021, http://dockingmagazine.com/contents/23/197/?bk=menu&cc=&ci=&stype=&stext=+%EB%8B%A4%EC%9D%B4%EB%A0%89%ED%8A%B8+%EC%8B%9C%EB%84%A4%EB%A7%88&npg=1

[3] 프랑스에서는 장 루슈를 중심으로 한 '시네마 베리테'라는 다큐멘터리 형식이 시작되었다. 루슈는 시네마 베리테의 성취는 ONF의 존재 때문이라고 밝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축구이야기] 제라드와 아놀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