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과 픽션 그 사이
로진 음바캄의 <맘바르 피에레트>는 필자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해외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며 담당했던 54편의 작품 중 한 작품이었다. 근무 당시에는 워낙 바빴기 때문에 해당 작품을 볼 시간이 없었지만, 15회에서 신설된 '프런티어' 경쟁 섹션에서 특별언급을 받는 등 심사위원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은 작품이었다. 그 뒤로 2년 뒤 VIFF Center에서 <맘바르 피에레트>의 상영소식을 듣고 3번의 상영의 마지막 상영을 관람했다. 아프리카 시네마를 소개하는 아프리카 출신 기자의 짧은 작품 소개를 시작으로 마주한 <맘바르 피에레트>는 특별했다. 아마도 음바캄이 선택한 독특한 형식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형식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제3세계가 취할 수밖에 없는 형식일지도 모른다.
<맘바르 피에레트>는 장르적으로는 다큐멘터리에 속하고 픽션에도 속한다. 때문에 몇몇 영화제는 이 작품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했으며, 어떤 작품은 픽션으로 소개했다. 이렇게 음바캄은 주인공인 피에레트(Pierrette Aboheu Njeuthat가 직접 연기한)의 현실에 허구적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피에레트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두알라의 한 골목에서 재봉사로 일하고 있는 맘바르 피에레트는 고객인 주민들에게 단순한 재봉사 그 이상이다. 맘바르는 그들의 친구이자 때론 버팀못이 되어준다. 그럼에도 맘바르는 여성으로서 혹독한 세상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나이든 노모와 3명의 자식들을 홀로 키워내며, 씩씩하게 작업실을 운영하는 모습과 달리, 맘바르는 언제나 외롭고 힘에 겹다. 퇴근하며 탄 오토바이 택시는 그녀를 납치해 그녀의 돈과 핸드폰을 빼앗고, 그녀의 자식들의 아버지는 단 한 푼의 양육비도 지원하지 않는다. 더구나 장마가 시작되며 집이 물에 잠기고 아들의 학용품들이 물에 젖어 쓸 수 없게 되며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러한 맘바르의 현실을 담아내기 위해 음바캄이 취한 형식은 픽션이다. 음바캄의 카메라는 맘바르의 현실을 관찰하고 따라가지만, 그 현실을 담아내는 쇼트들은 픽션의 구도를 갖고 있다. 고객이자 친구들과의 대화는 오버더숄더 쇼트로 진행되며, 모든 쇼트들은 맘바르의 이야기를 담아내기 위해 데쿠파주를 이룬다. 때문에 <맘바르 피에레트>는 다큐멘터리도, 픽션도 아닌 독특한 위치에 존재하는 영화가 된다. 영화는 피에레트의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맘바르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영화는 픽션이라는 구조 안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다큐멘터리적 현실을 보여준다. 이는 마치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을 떠올리게 하지만, 네오리얼리즘과는 지극히 다르다. 기술적 혁신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이후 등장한 네오리얼리즘과는 다르게 <맘바르 피에레트>의 다큐멘터리적 픽션은 제3세계를 재현하기 위한 필연적 방법론에 가깝다.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벗어나 세 아이들의 양육비를 보호받지 못하는 맘바르의 이야기는 구조와 개인적 경험 그 사이에서 표류한다. 그리고 카메라는 그녀의 이야기를 뒤따라가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개입한다. 때문에 영화는 영화 속 맘바르처럼 시스템, 즉 구조(영어자막에서 authorities로 번역되는)를 겨냥하는 동시에 이에 실패한다. 평생 구조를 탓한 적 없다고 말하며, 이 모든 것은 그녀의 개인적인 불운일 뿐이라고 맘바르를 타박하는 맘바르의 어머니처럼 영화는 이내 구조에 대한 겨냥을 개인적 경험으로 환원시킨다.
이처럼 자본주의 동맹국들의 제1세계와 공산주의 동맹국들의 제2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제3세계의 독특한 지정학적 위치는 다큐멘터리도 픽션도 아닌 그 사이에서 형식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며, 리얼리즘이 불가능한 동시대에 개인적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보여줄 수 있다. 그럼에도 <맘바르 피에레트>와 같은 제3세계의 영화적 실험이 곧바로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거나 구조로부터 자율적인 리비도의 실현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맘바르의 남동생이 평생을 바친 예술로 어떠한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 한다고 한탄하는 것처럼, <맘바르 피에레트>의 형식은 이내 상품이 되며, 세계화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율적인 예술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제3세계의 시도들은 그러한 아포리아를 인식하기 위한 시도들로 읽혀져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