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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가는 역사야”

by 김세은

“유행가는 역사야”


가장 어렵고 힘겨웠던 60~70년대.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마음을, 글로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


유행가 가사에 스며든 삶의 무게와 감성들을

조금이나마 느껴 보자.


망국의 한을 절절히 노래한 《황성옛터》에서부터

소크라테스를 불러내며 하소연하듯 부르는 《테스형》에 이르기까지

유행가는 그저 단순히 흥얼거리는 노래가 아니다.

사회 전반의 흐름을 담아낸 시대의 목소리였다.

,

“그저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어도 오고 마는 또 내일이…”


와,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어쩌면 단순해 보이는 이 가사 속에도

곱씹을수록 깊은 함의가 스며 있다.


내가 유행가 가사에 관심이 꽂힌 건 TV 가요 경연 프로에서였다..

《미스터트롯》에 출연한 어린 초등학생이 부른 《보릿고개》.

그 앳된 목소리로 “초근목피로 끼니를 잇던 시절, 풀피리 꺾어 불던 슬픈 곡조” 를 어머님의 한숨과 통곡이라 노래하는 가사 속에 절규와 회한이 절절하게 담겨 있었다”

“아이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그 말 속에 담긴 어른들의 기막힌 심정은

어떠했을까.


배급 받은 밀가루 포대를 머리에 이고 돌아와

수제비를 끓어 식구들 끼니를 챙겨 주시던 젊은 어머니 모습이 떠 오른다.


옛 노래들을 다시 소환해 듣게 하고 귀 기울이며 가사에 담긴 의미를 되짚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그 노래는 예쁜 치매를 앓으셨던 아버지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눈감고 계시면 불안해서 “아버지 두만강! 하고 외치면 힘이 없어도 그 노래만은 씩씩하게, 목청 돋으시며 임종 전날까지 부르셨다.

그 곁에서 눈물을 꾹꾹 눌러가며 소리 없이 울었던 아픈 기억 — 이젠 들을 수 없는 아버지의 목소리만이 내 귓가를 맴돈다.


“유행가는 역사야.”

국사 선생님이셨던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유행가는, 대중의 감성과 시대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역사의 한 갈래다.


《미스터트롯》은 그 시절과 가교 역할을 해주며 옛 가요에 대한 정취와 향수를 젖게 한다. 또 글이 그 시대상을 대변해 주듯, 유행가는 대중적이고 시대의 흐름을 말해 주는 역사의 한 줄기다.


어느 외국 작가는

“한국인은 한이 많은 민족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처럼,

수 많은 유행가 속에는 한(恨)과 그에 담긴 정서가 배어 있다.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폐허 위에 얹힌 회한을 노래한 《황성옛터》.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와 함께 온 국민의 가슴을 울린 《잃어버린 30년》.

.

동족상잔의 비극을 피눈물로 노래한 《단장의 미아리고개》.

“억울하면 출세하라!” 외치는 민초들의 목소리, 《회전의자》

청춘의 방황에 위로와 희망을 건넨 《내 인생의 태클을 걸지 마》.


한 때 외색 풍이라는 이유로 20년 넘게 금지되었다가

1987년이 되어서야 다시 들을 수 있었던 《동백아가씨》.


한 젊은 가수가 다시 불러 역 주행한

토속의 향기가 물씬 나는 《진또배기》.


“인생은 나그네 길,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

삶의 허무와 철학이 녹아있는 《하숙생》.


또 월급날이 되면 텅 빈 봉투만 남은 가장들의 애환을 풍자한 《월급봉투》.

(‘삥땅’의 역사까지 담고 있다)


석유파동에 지친 국민들을 위해

“쨍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단다!”희망을 노래했던 《해 뜰 날》.


오래 전 직장 송년회에서 후배가 부르던 노래.

“당신 위하여 입은 앞치마에 눈물 젖게 하지 마세요.”

제목은 가물가물하지만, 그 가사는 지금도 입가를 맴돈다.


1973년쯤 인가?

라디오 ‘이기동의 아마추어 쇼’에 출연해 유행가를 불러,

“옥구슬 또르르 굴러가는 목소리”라는 심사 평을 받으며 장려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수제비 대신 쌀과 돼지고기를 사서 저녁 밥상에 올렸던 날,

부모님의 눈시울을 젖게 했던 아픈 기억.


얼마 전 한 프로그램에서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꿈을 향해 걸어온 한 청년의 이야기가 방송되었다.

“나는 반딧불”이라며 자신을 개똥벌레에 비유한 노래,

“그래도 괜찮아, 나는 눈부시고 빛날 테니까…”

그 가사에 많은 이들이 눈물을 삼켰다.


요즘은 세대가 바뀌어

빠른 비트와 랩, 반말 섞인 노래들이 주류를 이룬다.

어르신들은 다소 어리둥절해하지만,

그들 나름의 또 다른 표현이겠지.


그러나 유행가는 변해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은 늘 같다.


힘겹던 시절을 견딘 사람들의 고통과 인내, 그 찬란한 기억들이

가사에 고스란히 배어 후세에게 전해진다.


유행가는 어느 날

우연히 귀에 들어와 내 의지와 상관 없이 하루 종일 흥얼거리게 한적 있지 않은가?

그 익숙한 멜로디는

이름 모를 정서적 유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유행가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감성, 삶의 흔적, 역사 그 자체다.


“유행가는 역사야.”

아버지의 그 말씀이

오늘따라 더욱 깊이 가슴에 와 닿는다.


2025.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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