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그리고 인생
집을 나와 경사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나무와 감나무, 그리고 5월엔 눈부시게 화려했던 장미의 가을이 머무는 학교 울타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 담장을 따라 모퉁이를 돌면, 낙엽이 수북이 쌓인 가로수 길을 만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밟으며 걸으며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젖는다.
계절마다 느낌이 다른 풍경이지만 유독 가을은 감성을 자극한다. 쓸쓸함과 그리움, 어쩌면 삶의 어느 한때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은 맑고 높다.
벚나무 끝 가지에 마른 잎 하나가 애처롭게 매달려 흔들린다.
떨어지기 싫어 안간힘을 쓰는 듯한 그 모습에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떠오른다.
발 밑의 낙엽들은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마치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하는 놀이처럼, 한데 모였다가 이내 뿔뿔이 흩어진다.
어떤 낙엽은 자동차 지나는 소리에 하수구로 휩쓸려 들어가기도 한다.
바람이 한줄기 불면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봄날 벚꽃처럼 허공을 향해 손을 펼쳐 본다.
그 순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섞여 들면 기억 저편에 머물던 추억 하나
조용히 깨어난다.
고운 색의 낙엽 하나를 주워 책갈피에 끼운다.
언젠가 편지 한 구석에 살포시 얹어 마음을 전하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꿈 많던 여고 시절, 계절마다 감정이 쌓이던 그 날들.
낙엽 무리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장난치듯 흩뿌린다.
그러자 어디선가 낙엽들이 소곤거리는 듯하다.
“건드리지 마요.” “나도 원한 게 아니에요.”
미안해, 그냥 이 소리가 좋아서 그랬어.
형형색색 물들인 낙엽은 마치 사람의 모습과 생애를 연상하게 한다.
각기 다른 얼굴과 사연, 다른 색과 모양.
낙엽이 주는 쓸쓸함과 고독은, 어쩌면 인생의 가을과 닮아 있다.
혹시 당신도 모르는 사이,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건 아닐까!
“늙어가는 모든 인생들, 언젠가 낙엽이 되리니…”
나무는 잎을 떨구고 다음 봄을 준비한다.
촛불처럼 자신을 태워 빛을 내듯, 나무는 잎을 버리고 새싹을 틔운다.
사람은 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걸까.
땅에 뿌리 내리지 못해 다른 곳에서 환생하는 걸까?
문득 엉뚱한 상상이 스친다.
둘째 날.
오늘도 비가 내린다.
어제의 낙엽들은 차가운 비에 젖어 땅에 딱 달라붙어 있다.
움직일 수조차 없다.
어제와 같은 길, 그러나 전혀 다른 오늘.
매일 걷는 길 위에서도 하루하루는 다르다.
내일은 또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걷게 될까.
셋째 날.
첫눈이 폭설로 왔다.
처음엔 소리 없이 내리더니 이내 함박눈이 되어 쏟아진다.
창밖 나무 가지에 얹힌 눈을 멍하니 바라본다.
띡띡, 문자 메시지가 도착한다.
“65세 이상 미접종자는 인플루엔자 무료 접종 대상입니다.”
내일은 병원부터 들러야겠다.
넷째 날.
“여태 뭐 하다가 오늘 하필…”
한숨 한 조각 내뱉는다.
겹겹이 옷을 껴입고 눈 덮인 길 위를 나선다.
그 위에 붉은 단풍 한 잎이 눈에 확 들어온다.
희고 차가운 눈 위에서 그 선명한 색은 더 또렷하다.
마치 하얀 캔버스에 찍힌 붉은 루비 하나.
단풍잎이 수놓은 눈 위의 은하수.
건널목은 아수라장이다.
바퀴자국과 발자국, 고인 물과 얼음으로 뒤엉킨 길을 허우적대며 건넌다.
눈 아래 깔린 낙엽들은 소리 없이 묻혀 있다.
어제는 그렇게 바스락거리며 노래했건만, 오늘은 눈밭 속 침묵이다.
눈 위에 살포시 앉은 낙엽 하나가 바람에 흔들린다.
슬픔을 담은 애도의 몸짓처럼.
부러진 가지들이 눈 위에 쓰러져 있고,
가지마다 쌓인 눈송이들이 와르르 무너져 머리와 어깨를 내리친다.
옷은 축축해지고, 안경엔 물안개가 서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얼음 있는 데로 가지 말고, 눈 쌓인 데를 밟으세요.”
눈을 치우던 젊은 어르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늘 다니던 익숙한 가로수길.
단 나흘간의 변화를 마주하며 생각한다.
.
참,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은가?
익숙한 길 같지만, 늘 같지는 않은 길.
늘 거기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바뀌어 가는 길.
낙엽처럼, 인생처럼.
그렇게 오늘도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