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멈췄다.
거의 끝에 다다른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던 중, 무심코 스친 한 문장이 가슴에 비수처럼 왔다.
“아침에 일어나 물 한 잔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해 본 적 있으세요?”
“내 소원은 죽기 전에 물 한 잔을 시원하게 마시고 가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생이 주어진다면, 그냥 남들처럼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휠체어에 앉은 채 창 밖 풍경만 멍하니 바라보던 서른 초반의 여자.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독백처럼 낮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 취재차 곁에 서 있던 기자를 의식하면서도 끝내 시선을 주지 않은 채였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노안이 오고, 얼굴에 잔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되고 싶다니.
우리라면 한 번쯤은 투덜거리며 밀어냈을 그 미래를,
그녀는 간절히 소원처럼 품고 있었다.
남들처럼 늙어갈 기회를 박탈당한 이에게
‘늙음’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로 “물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을 뿐인데,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삶을 붙잡는 절박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고 작가는 적고 있었다.
그 젊은 환자는 물 한 모금조차 넘기지 못하는 위암 말기 환자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
그리고 아마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도
늙어간다는 것을 축복이라 여겨본 적은 없을 것이다.
주름살이 하나 둘 늘어가고, 머리는 희끗해지고,
계단을 오르내리기 버거워지고,
책을 오래 읽다 보면 어느새 눈이 침침해진다.
“이제 나도 늙는구나.”
한숨 섞인 말로 불만을 흘려 보낸다.
노인이 되어가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우리는 화를 내고 속상해한다.
얼마 전, 또래의 친구들과 뷔페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접시 위에는 물뿐 아니라 온갖 음식이 가득 쌓인다.
아무 저항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그때서야 새삼 돌아보게 된다.
팔자 주름을 없애는 방법,염색할 시기,무릎은 괜찮은지 묻고 답하며
우리는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공감대를 쌓아간다.
누가 봐도 노인들의 대화다.
피부과에 가지 않고도 검버섯을 없앤다는 크림 이야기에
눈이 반짝이면서도, 정작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그 누구의 마음에도 없다.
조금이라도 더 젊어지고 싶은 바람만이
우리 모두의 공통된 소원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무탈하게, 자연스럽게 늙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할머니가 되어간다는 것은 아프지 않고,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며 시간을 허락 받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다.
누군가에게는 간절했으나 끝내 허락되지 않았던,
너무도 소중한 세월이었다.
거울 속에서 하나 둘 늘어가는 삶의 흔적들. 깊어지는 주름,
검은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얗게 변해가는 모습이
사실은 축복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오늘도 책은 내게 커다란 사유를 선물한다.
이왕 나이 드는 거,
감사하며 행복하게 늙어가는 할머니가 되어보자
다만 한 가지,
아직 나는 할머니가 되지 못했다.
4학년이나 된 아들 둘이 다행히(?) 장가 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