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백 번의 추억’ 봤니?”
“아니.”
전화 통화를 끝내며 친구가 말했다.
“꼭 봐. 나도 그런 친구 있으면 정말 좋겠어.”한다.
첫 회를 시작으로 마지막 회까지, 이틀이 채 걸리지 않았다.
‘최고예요’ 버튼을 누르며 문득 생각했다.
우정은 이렇게 따뜻하고 아름답다..
1980년대 버스 안내양의 삶을 배경으로 한 ‘백번의 추억’은
단순한 향수만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 시절 청춘들이 겪어야 했던 가난, 차별, 방황과 도전의 시간을
잔잔하지만 단단하게 그려 낸다.
부자든 가난하든, 학벌이 있든 없든
차별과 편견없이 아끼고 인정하며
“괜찮다”고 등을 두드려 주는 친구들의 모습은
보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한다.
자주색 베레모와 유니폼 차림의 버스 안내양이
“오라이!” 하고 외치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학창 시절로 돌아간다.
짐짝처럼 밀려 타던 만원버스,
문도 닫지 못한 채 매달려 출발하던 등•하교 길.
버스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치며 외치던 “오라이”그 한마디가
지금은 정겹고 아련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영례와 종희는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며
버거운 현실을 꿋꿋하게 견뎌 낸다.
첫사랑 재필의 등장은 세 사람의 관계를 복잡하게 얽혀가지만,
그 흔들림마저도 풋풋하고 순수한 설렘을 준다.
첫사랑에 흔들리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현실을 감당해야 했던
80년대 청춘들의 자화상.
우정과 사랑, 책임과 꿈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 시절 청춘들의 모습은
오늘날 청춘들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다.
사랑과 우정 모호함 속에서도 서로의 배려와 이해로 잘 헤쳐나가는
청춘들의 이야기 속으로 한동안 빠져든다.
그래서 나는 나의 첫사랑을,
친구들과 함께 했던 음악다방을, 청계천 헌책방과 남산도서관을 떠올리게 한다.
친구야,
지금도 영례와 종희 같은 우정을 키워 보고 싶다.
그 마음이, 참 부럽다.
그러던 중 우연히 넷플릭스를 검색하다
‘은중과 상연’을 보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우정은 정말 아름답기만 한 걸까?
우정은 반드시 지켜야 할만한 가치인가!
가정환경과 사회적 배경이
삶과 관계를 어떻게 비틀어 놓는지를 보여 주며,
세대를 아우르는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깊이 파고든다.
초등 시절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부러움과 질투, 오해와 상처로 뒤틀리고,
끝내 절교로 이어진다.
“너를 망가뜨리고 싶다.”
상연의 은중에게 던진 이 한마디는 섬뜩할 만큼 독하다.
이 드라마 속 우정은
따뜻함보다 집착에, 위로보다 상처에 더 가깝다.
시간이 흐른 뒤,
은중의 옛 연인과 상연이 다시 얽히며
세 사람의 갈등은 반복된다.
그리고 다시 각자의 삶으로 흩어진다.
얼마의 세월이 지나,
말기 암 환자가 된 상연이 느닷없이 은중을 찾아온다.
마지막 부탁과 함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
연민과 갈등, 용서와 이별의 서사다.
존중과 집착, 기쁨과 슬픔이
서로를 잠식하며 뒤엉킨 관계의 민낯을 보여 준다.
끝까지 갈등하던 은중은 무겁고 잔인한 선택,
스위스로 향하는 길을 택한다.
‘블루 하우스’.
푸른 문 앞에서 손을 잡고 선 두 사람의 뒷모습은
극이 끝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상연은 망설임 없이 밸브를 연다.
“다 괜찮아.”
은중의 떨리는 목소리와 눈물이
고스란히 나에게 옮겨 온다.
“사랑했고, 미워했다. 나의 친구 천상연.”은중이 외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떠오르는 새벽 해를 바라보며 은중은 혼자 남겨 졌다.
보내는 사람보다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잔인할 만큼 솔직하게 보여 준다.
두 드라마는 같은 ‘우정’을 말하지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백 번의 추억’이
우정은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면,
‘은중과 상연’은
우정도 때로는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낭만과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가고,
다른 하나는‘조력 존엄사’라는
현대 사회의 무거운 숙제를 남긴 채 막을 내린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그래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우정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우정을 갈망하며 살아간다는 것.
아마도 두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 모순된 진실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