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드니아 7

[단편소설] 2023년 아르코 창작기금 선정작

by 임수정
gardenia-3520319_1280.jpg

경자는 배가 고팠다. 냉장고를 열어 김치 통을 꺼내다 때가 탄 손잡이가 눈에 띄었다. 경자는 그걸 홱 떼어내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고 아무렇게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로 반찬을 놓고 밥을 크게 떠먹었다.


가랑이를 찢어 죽일 년. 경자는 그럴 때마다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남편은 누구도 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지독한 욕을 하곤 했다. 개랑 붙어먹을 새끼, 모가지를 뜯어버릴 년 같은 소리였다. 그 욕은 경자를 제외하고는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손해를 끼쳤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뿌려졌는데 청과시장의 오랜 거래처의 경리, 마을 슈퍼 주인, 옆집 할아버지 등으로 성별, 나이, 직업 대를 가리지 않고 매우 다양했다.


남편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속담을 개똥이 약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경자에게 입버릇처럼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죄를 지었던 사람들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말했다.


나한테 달라 빚 장사했던 동재 엄마 그 개 같은 년 치매 걸렸단다.


남편은 그들이 목을 맸거나 자식이 죽었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장애를 입는 식으로 벌을 받았다고 했다. 경자는 그 말의 사실 여부보다 남편이 그 말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사실이 더 소름 끼쳤다. 남편의 모든 말이 꼭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경자는 다리를 더욱 벌린 채 밥을 떠 넣었다. 쉬어 꼬부라진 김치가 침샘을 자극했다.

경자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넣었다. 늘 그랬듯 섬유유연제 병을 끝까지 읽으며 치자꽃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여전히 없었다.


가드니아. 경자는 노래하듯 입을 벌리고 가드니아라고 읽었다.


경자는 어린시절 시골집에 피었던 치자꽃을 떠올렸다. 마당 한쪽에 엄마가 심어놓은 치자 꽃은 봄밤을 자고 나면 하얗게 피어났다. 경자는 다른 꽃잎들은 잘도 따서 돌에 찧고 그것을 물에 풀고 흩뿌리며 소꿉놀이를 했지만, 치자꽃은 함부로 딸 수가 없었다. 꽃잎 하나라도 따면 그 아름다움과 향기가 금방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꽃치자를 열매도 달리지 않는 쓰잘데기 없는 나무라며 벌레만 꼬인다고 흉을 봤지만, 경자는 열매가 달리는 홑꽃잎 치자보다 겹잎이 다복한 꽃치자가 더 좋았다.


이른 잠에서 깨면 경자는 치자꽃 앞으로 가 고개를 떨구었다. 노란 꽃술을 둘러싼 겹겹의 하얀 잎은 부드러웠고 달큰한 향기가 부드럽게 흘러들었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들키면 혼이 났다. 어린게 뭐에 홀려서 여우짓을 하고 있어! 경자는 아버지의 호통을 피해 재빨리 방으로 뛰어들어 이불을 뒤집어 썼다.


치자꽃은 길게 피지 않았다. 봄밤이 몇 번 지나고 나면 한 잎씩 노랗게 물들어 떨어졌다. 진딧물이 끈끈한 점액을 흘려도 검은 벌레가 파고들어도 꽃의 향기는 여전했으나 때로는 몸서리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는 피고 싶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치자꽃은 겨울을 나고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때가 되면 봉우리를 맺고 밤을 지나 꽃망울을 틔우고 마당 가득 향기를 뿌렸다.


경자는 섬유유연제 병에 코를 갖다 댔다. 여전히 역했다. 그대로 세탁기에 등을 대고 앉았다. 거친 진동이 온몸으로 퍼졌다. 경자는 아까 여자가 들고 있던 치자꽃 화분을 생각하곤 자신만의 치자꽃을 한 번도 키우지 못했음을 생각했다. 집 앞 꽃집에서, 마트에서 늦은 봄마다 꽃치자 화분을 만났었다. 비싼 돈도 아니었는데 단 한 번도 꽃을 키울 염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또 후회스러웠다.


초인종 벨이 울렸다. 아들이었다. 경자는 아들에게 이것저것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하려고 들면 딱히 할 얘기도 없었다. 현관에 들어선 아들은 집안을 눈으로 살핀 후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저녁 먹어야지. 빨리 밥 안칠게.

배 안 고파요.


아들은 저번에 봤을 때 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아들은 경자가 말해도 모를 일을 여러 개 거쳐서 지금은 전문 대학교 설비과에 있다고 했다. 전기선을 연결하거나 형광등을 갈고 수도꼭지를 가는 일이라고 했다. 얼마 전에 무기 계약직이 되었다고 했을 때 기뻐하던 경자에게 아들은 내뱉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길게 받게 해주겠다는 거예요. 아들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으나 남편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경자는 자신의 손재주를 아들이 닮았다고 생각해 속으로 기뻐했으나 남편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남자는 기술이 있어야 먹고 산다.

남편은 어머니의 반대로 젊은 날 운전면허를 따지 못한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어머니는 점쟁이가 남편은 운전하면 죽을 팔자라고 했다며 절대 면허를 따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남편은 트럭 대신 리어카에 과일을 싣고 그 많은 골목길과 골목길, 차들 사이를 누볐다.


경자는 아들의 얼굴을 말끄러미 지켜보았다. 아들을 처음 품에 안았을 때가 기억났다. 8개월 만에 나온 아들은 작고 작았다. 남편은 경자가 하루종일 구부리고 미싱을 해서 아이가 자라지 못했다며 허리를 펴고 일을 했어야 한다고 나무랐다. 병원에서는 아이를 인큐베이터에 넣어야 한다고 했지만 돈이 없었다. 태어난 지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그 아들을 데리고 설을 쇠러 시골에 가야했다. 새빨간 얼굴로 힘이 없어 젖을 빨지도 못하고 기진해 잠든 아이와 고집스레 바깥만 바라보던 남편의 옆모습이 생각났다. 지금 아들은 그 남편의 나이가 되었고 놀라울 정도로 남편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경자는 한 번도 자신에게 아들이 최우선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경자도 남편처럼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하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너도 원망할 사람 하나는 있어야지. 아들의 붉게 탄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경자는 짐짓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동훈아 내가 아까 이불을 털다가 말이야. 죽을 뻔했어.


아들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야. 진짜 죽을 뻔했어. 떨어질 뻔했거든. 휘청하는데 겨우 난간을 잡았어. 생쇼를 했어. 생쇼를.

경자는 활극이라도 얘기하듯 과장된 표정과 동작을 섞어가며 말했다. 펄럭펄럭 어깨를 사용해서 이불을 털다가 거꾸러지는 동작을 무언극 배우처럼 열과 성을 다해 연기했으나 아들은 보지 않았다. 조심 좀 하지 그러셨어요. 라는 말을 한 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경자는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보지 않는 아들을 보며 베란다 쪽으로 걸어갔다. 아까 접어두지 못한 이불이 바닥에 있었다. 경자는 이불을 들고 열린 창문으로 다가갔다.


이렇게 털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면서 몸이 휘청하더니.


경자는 흰색 이불을 창밖으로 털기 시작했다. 붉은 석양이 하늘 아래로 녹진하게 내려앉는 중이었다. 경자는 목소리를 높였다.


이렇게 펄럭펄럭 터는데.


아들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경자를 바라보았다.

경자는 기이한 활력이 생기는 걸 느꼈다. 아까보다 더 큰 몸짓으로 이불을 털었다. 팔에 힘이 붙었다. 하얀 이불이 하늘로 나부꼈다. 세상은 멈추고 오로지 경자만 움직이고 있었다. 이마에 땀이 배었다.


아깐 진짜 죽는 줄 알았어.


경자는 아들의 시선을 느끼며 더욱 큰 몸짓으로 몸을 밖으로 내밀며 팔을 휘둘렀다.


이렇게. 아까는. 진짜로.


순간, 바깥으로 반쯤 내민 몸이 균형을 잃었다. 치자꽃 바람이 불어왔다. 경자는 향기에 취했다. 짧고도 긴 순간이 지났다. (끝. 200자 원고지 94페이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드니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