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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Jan 21. 2023

분노의 힘

'피로사회'를 읽고

몇 년 전 일이다.

학교 행정실 직원으로 일하던 K형은 명절이 다가와서 또 어딘가를 가야 한다며 투덜거렸다. “어딜 가길래 그렇게 투덜거리는 거요?”

“학교 이사장 엄마 산소. 명절이라 제사 지내는 거 세팅하러 가야 되네. 아 짜증 나.”

거길 왜 형이 가냐며 어이없어하자 K형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사립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으로서의 숙명이라 말했다. 뿐만 아니라.

“야. 거기 서울에 있는 이사들도 싹 다 내려와서 참배하고 간다. 우리 학교 교장 교감은 물론이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재단 이사장이면 이사장이지 지가 뭔데 자기 가족이 관여해야 할 일들을 회사 직원들과 학교 교직원들에게 함부로 시킨단 말인가. 어찌 그런 법이 있느냐고 반문하자 K형은 말했다.

“일 년에 몇 번 제사만 잘 참여하면 재단 이사나 교감 교장 자리가 보장된다는데 그걸 마다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아니, 형! 학교 설립의 목적은 학생의 교육에 있고 그 학교라는 공간에 있는 모든 교직원들 역시 학생 교육을 위해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정상인데 그걸 말이라 하는 거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술 몇 잔에 불과해진 K형의 얼굴을 보고, 난 그냥 속으로만 푸념을 곱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정의감과 교육관이 투철했던 나는, K형이랑 일하던 그 학교를 관둔 이후 옮긴 다른 학교에서 내 철학이 무색하게도 바로 그 학교 재단 이사장의 장례식에 3일간 꼬박 출근하는 신세가 되었다. 계약직 목숨은 파리 목숨이라는 불문율에 딱 걸맞게.

 남한테 뭐라 할 처지가 안 됨을 인식하고 임용공부에 매진하여 운 좋게 다른 학교에 붙어 정교사가 되었지만 여전히 ‘조금만 참으면 되는데 그게 뭐 어렵다고.’의 프레임은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뭔가 불편하고 어색함을 누군가에게 말하며 실컷 욕이라도 하고 싶은데 오히려 내가 비정상일 것 같았던 시점에 우연히 철학자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읽게 되었다. ‘보는 법의 교육’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읽은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자면.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교육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세 가지 과업을 거론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보는 것을 배워야 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말하고 쓰는 것을 배워야 한다. ----(중략)----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정신의 부재 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대꾸하지 못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다.”

'피로사회' 한병철 (문학과 지성사 2012)

  철학자 한병철은 니체의 글을 인용하며 뭔가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인간은 활동과잉으로 치닫게 되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적 인간으로 전락한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니체의 말처럼 “활동적인(활동과잉인) 사람들은 고차원적 활동을 하는 법이 없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게으르다.”라고 말하며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는 인간은 멈출 줄 모르는 기계와 같다고 일갈했다.

 무엇보다도 ‘멈추어 생각하기’를 하지 못했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분노하는 법을 망각하는 것이라는 한병철 철학자의 지적이 특히 내 뼈를 때렸다. 분노는 짜증과는 달리,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피아제 교육학 관점에서는 이를 ‘인지갈등’ 이론이라 할 수 도 있겠다.) 분노는 현 상황 전체를 부정하기에 그 에너지가 거대하고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근원이 되며 어떤 행위를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음을 한병철은 강조했다.

 한병철의 책을 읽고 난 뒤 수년이 지나 그 ‘분노의 힘’을 망각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대한민국 검찰이 야당대표를 출두시켜 포토라인에 서게 한 이벤트로 인해 희미해진 기억이 살아났다.

 주가조작 정황이 의심되는 대통령 부인은 언론과 검찰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재벌이나 기득권과 별로 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야당인사를 이미 무혐의로 끝난 사건을 다시 파내어 죽이는 일에는 온 에너지를 쏟다 붇는 것. 언론사에 일하는데 또는 검찰에 일하는데 내 상급자가 위의 오더를 내렸고 난 그저 그 일을 성실히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 내 자리가 보전되고 승진만 보장된다면 내가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 따윈 없다는 것. 이건 그때 K형이 얘기했던 그 논리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참고로 K형에겐 불만이 없다ㅋ)

관련 사진 올리려했는데 쪼려서 못하겠다ㅋㅋ 사회가 이정도로 경직된거니 따를수밖에 없겠거니…



 사회가 그저 돈과 재벌의 논리 및 권력자의 프레임에 의해 돌아간다면 교육 현장 역시 돈 되는 일만 하라 강요되는 교육이 횡행할 것이고 우리 학생들에게 ‘분노할 수 있는 능력’ 따위 길러질 여지가 있을 리 없다. ‘불의이며 부당한 사안인 것이 뻔히 보여도 그저 눈 질끈 감으면 내 명예와 재력이 보장된다.’이런 헤게모니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 사회에선 히틀러 같은 전체주의자가 나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정치와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시급하지만 그저 이를 기다릴 수만은 없다. 기다림은 수 십 년째이지 않는가?

 육영사업을 한다 함은 Education행위를 한다는 의미이다. Education어원을 고려한다면 이는 학생에게 가르침과 보살핌을 제공하여 학생 역량을 스스로 밖으로 드러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총체적 활동인 것이다. 따라서 육영사업은 그 사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의 에너지가 오직 Educational 한 활동에만 몰입되어야만 사업의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 국가가 아무 기업에게 육영사업을 허락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있을 사학재단 관계자 중에 ‘명절에 우리 재단 이사장 제사 어떻게 지내 드리지’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면 제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올바로 인지하길 바란다. 사학법 개정에 광분하며 열 올리시기 전에.(뒷돈으로 교원 채용하던 과거 얘기는 언급조차 하기 더럽다.)

뒷돈 채용으로 큰 곤욕치렀던 사례에대한 기사. 지금 근무하시는분들과는 무관하여 편집함.

 평교사들도 힘내자. 오늘 이 시간 수업하는 찰나가 바로 영원의 순간이다. 영원의 순간을 위해 당신들이 배운 영롱한 진실을 활용하여 영혼을 다하는 교육 행위를 구사해 보자. 그러면 학생들은 변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도 변한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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