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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Jun 14. 2022

영재를 기를 것인가 비싼 노예를 기를 것인가 2

소유의 삶 vs존재로서 삶

 단재 신채호 선생은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고 한다.”(동아일보 1925 1월 2일 자)고 개탄하며 수단과 목적을  바꾸어 버리는 우리 습관을 비판한  있다. 1936년에 신채호 선생은 순국하였고, 1945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우리 교육은 여전히 신채호 선생의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지난 수십  동안 성장 위주의 정책이라는 미명 하에 대한민국의 교육은  사회 인재 선발로서의 역할만 강조되었다. 그러다 보니 시험 성적을 최우선으로 학교 교육이 진행되었고 시험 결과에 따라 우수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을 구분 짓는 인식이 자리 잡게 되었다. 신채호 선생이 비판한 ‘노예의 특색 답습한 교육 주체자들이 ‘대한민국의 교육이념 아닌 ‘이념교육의 대한민국’ 분위기를 조장하는 바람에 우리 교육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역할을 수행해  것이다. 그러니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도 “한국은 교육이 정반대로 가고 있다.  교육 시스템은 산업화 사회의 인재를 양성하는( 때나 통하는) 시스템이다.” 비판을 하지 않았던가?

 교육을 수단화하여 발생하는 부작용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점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1인 1 표제의 ‘인본주의’를 원칙으로 삼지만, 자본주의는 1주 1 표제의 주식회사 운영 원리를 기본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는 ‘살아있는 권력’은 바로 돈이다. 세계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의 역사가 민주주의 역사보다 훨씬 긴 나라는 우리나라 말고도 많다. 자본권력의 힘이 막강한 사회일수록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관행은 사회 전반은 물론 교육계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이런 사회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엔 「악착같이 공부해서 성공해야 한다. 그래야 더 가진 자에 의해 노예나 ‘물건’ 취급받는 꼴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빵 만으로는 살 수 없다.”는 말처럼 우리에겐 내적인 자아실현을 위해 살고자 하는 본능도 있다.

 독일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이 가진 생존 양식을 재산・사회적 지위・권력 등의 소유에 전념하는 ‘소유 양식’과 자기 능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삶의 희열을 확신하는 ‘존재양식’두 가지로 구분한다. 인간은 생존을 향한 생물적 충동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이기심과 소유하고 난 이후 이를 지키려는 성향이 있다. 어느 나라든 상관없이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권력자들이 이 본능을 의식하다 보니 인간은 물질적 소득이나 징벌의 공포 없이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교육 방법에도 적용시키게 되어 이로 인해 사회 구성원들의 성향을 수동적으로 만들게 된 역사적 사례는 비일 비재하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자신의 능력을 표현하고, 능동적인 행동을 하려 하며,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존재’의 방식을 추구하려는 욕망 또한 본능적으로 내재한다.

 새로운 것에 대해 비전을 가진 사람들, 불확실성을 무릅쓰고 낯선 환경에 발을 딛었던 사람들, 전진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이들은 인간이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소유의 삶’이 아닌 ‘실행에 의해 성장하는 존재의 삶’을 사는 것도 가능함을 보여주었다. 석가모니, 예수 같은 현자들뿐만 아니라 뉴턴,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나 스피노자, 니체, 마르크스 같은 사상가들의 삶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삶의 양식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우리 교육이 영재교육 제도를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뉴턴이나 스피노자 같은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함이 아닌가?

 필자와 비슷한 세대들은 학창 시절에 책상 앞에 앉아 공부에 몰두하지 않고 소설책 따위를 읽으면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던 단골 레퍼토리 잔소리가 있다. “  녀석아. 그거 읽는다고 돈이 나오냐? 쌀이 나오냐?” 지금도 많은 학부모들이 공부하지 않고 딴짓하는 아이들에게 이런 취지의 잔소리들을 많이  것이다. 하지만 영재학급에서 영재교육활동을 하는 학생들만큼은 ‘돈도 안되고 쌀도 나오지 않는행위이지만  자체가 목적이기에 뭔가를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떨어지는 사과를 보며 지구와 사과 사이의 인력을 떠올렸던 뉴턴은 뭔가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자신의 연구를 진행하지 않았다. 1905년에 엄청난 논문들을 한꺼번에 25편이나 발표한 아인슈타인 역시 보상을 바라고 그런 일을  것은 아니다.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처럼 인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과학자들 대부분은 과학적 탐구를 하는 행위 자체에 희열을 느낄  있는 ‘존재양식 삶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아직 우리나라 출신의 과학자 중에서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사람은 드물고 과학 관련 노벨상 수상자는  명도 없다는 점은 우리 교육이 지향하는 바가 아직 어디쯤에 머물러 있는지를 보여준다.  노벨상 수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우리 교육의 패러다임이 목적 지향적으로 바뀌기 위해선 보상을 바라지 않고 연구만을 위해 연구하는 과학자  학자를 양성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요람 중의 하나가 영재학교(또는 영재학급)이어야 한다. 그런데 영재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영재 교육과정을  자체의 목적으로 즐기는 ‘존재로서의  지향하도록 하려면 함께 고민해야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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