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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슨생 Jun 15. 2022

영재를 기를 것인가 비싸게 노예를 키울 것인가 3

존재로서의 삶을 사는 방법

 영재 교육 그 자체를 목적으로 즐기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함께 짚고 넘어가 야할 것들이 많다.

 우선, 교원을 대상으로 하는 영재학급 관련 기초연수에서 만큼은 시험성적이 나오는 평가를 없애야 한다. 영재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소유 양식을 감소하고 존재양식을 증대시키는 삶의 자세로 연구 활동에 매진하게 하려면 지도교사들부터 존재양식의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하지만 영재교육을 담당하기 위한 자격을 부여받는 연수가 승진을 지향하는 교사들의 통과의례가 되어버린다면 영재학급 담당 교사들은 소유 양식을 지향하는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다. 나름의 철학적 판단과 교육적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하여 영재학급을 담당하려 했던 교사들조차도 평가 성적에 매달려 그 처음의 성향이 바뀌게 될 우려가 있다. 소유 양식을 지향하거나 승진에 대한 욕망이 높은 교사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승진해서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되어야 교육계가 돌아간다. 시험을 통한 보상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한 선생님들도 존중하지만 그분들이 영재교육을 담당하기에 적합한 인재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수의 교사들 중에선 ‘지금 여기에서 학생과 함께 배움’을 즐길 수 있는 수 있는 분들이 있다. 영재학급 운영은 그런 분들 중에 누군가가 맡아야 한다. 그리고 영재학급만큼은 승진 가산점과는 전혀 무관하게 운영된다는 원칙이 지켜질수록 영재학급 운영 담당자도 보상에 초연한 사람일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학교 문화 개편도 시급하다. 그 일환으로 교사의 성과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고 다르게 대우받는 제도와 인식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교원의 차등적 성과급 제도가 있는 현실에서 교사들에게 ‘보상을 바라지 않는 교육행위’를 기대하기란 쉽진 않다. 특히 학급별로 시험성적 평균을 산출하여 반 별로 줄을 세우고 싶어 하는 관리자가 있는 학교가 있다면 이곳에서 존재양식을 지향하는 교사가 나올 확률은 지극히 낮을 것이다. 그런데 성적에 따라 학생들 줄 세우기를 좋아하는 학교에서 기를 쓰고 영재학급을 운영하려 한다 치자. 이는 영재학급을 맡으려는 교사가 다른 교사들보다 비교우위에 있으려 하는 의도 내지, 이를 통해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유치하려는 관리자의 의도가 개입되었을 여지가 크지 않겠는가. 학교는 기업이 아니므로 설립의 궁극 목적이 이윤추구일 수 없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시장논리에 입각하여 대한민국 대다수의 학교들이 경쟁의 패러다임에만 갇혀 있다면 올바른 영재교육, 나아가 올바른 공교육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없다.

경쟁교육의 프레임에 의한 서열화는 다수의 패배자만 양상할 뿐이다.

 좋은 학교 및 좋은 학생을 구분 지으려는 교사들의 낡은 사고방식도 사라져야 한다.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과 연수모임을 하다 보면 ‘과학고나 외고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에 비해 낙후된 지역의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는 교사들의 수업 실력 및 업무능력은 떨어진다.’는 인식을 가진 교사들을 확인하곤 한다. 그리고 도서벽지에서 근무하는 교사들 중에서는 “내가 운도 없고 백도 없어서 여기로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신이 도심 외곽에 살고 있다 가정하자. 아플 때마다 자주 가며 믿었던 동네의원의 의사가 사실 ‘내가 운이 없으니 이런 곳에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신을 진료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프고 병든 나를 진료하는 의사가 편견 없이 최선을 다 해줄 것을 소망하듯이, 교육 서비스를 받는 모든 학생과 학부모들도 학생의 특성에 관계없이 교사들이 최선을 다 해 주리라 기대하고 있음을 교사들이 잊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 시국 이후 우리 교사들이 수업 이외의 업무가 너무 가중된 바람에 지쳐있다는 것 잘 안다. 그래도 농부가 밭을 탓하랴. 어느 학교에서 어떤 학생을 가르치더라도 학생의 행복을 위해 교육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교사가 늘어나야만 우리 학교문화가 바뀐다. 그렇게 우리 교육계에 ‘목적지향’의 문화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라면 영재교육 역시 그 원래의 취지에 따라 원활히 운영될 수 있고, 영재들 잠재적 능력이 꽃피울 수 있는 여건도 더 쉽게 조성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내용 이외에도 이상적인 영재학급 운영을 위해서는 다양한 요소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절대 빠지면 안 되는 요소는 영재학생들이 영재교육을 받는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게 하는 일이다.

 겉으로는 동의하는 척 하지만 실상 인간이 평등하다는 명제를 믿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들의 이면에 자리 잡은 인식은 해묵은 ‘능력주의’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비판하고자 하는 바도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이 결정되는 세상, 이른바 능력주의는 사실 강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해 내세우는 허울 좋은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능력은 ‘재능’과 ‘노력’으로 구성된다. 재능은 우연히 내게 부여된 선물이므로 공동의 자산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노력 또한 모든 노력이 다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연성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이미 50여 년 전, 존 롤스는 ‘능력에 따른 분배는 정의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던 가. 따라서 ‘세상에는 우월한 인간과 열등한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운 좋은 사람과 운 없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는 명제는 참이다. 또한 이 명제가 참이기에 교사들은 학생에게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진리를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영재들의 타고난 능력도 다분히 운의 문제이다. 능력에 힘입은 성공은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 성과가 과잉 보상일 때 초과분은 공동체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 구성원에게 자리 잡혀야 사회 구성원 모두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영재 교육을 받는 학생들 역시 자신의 우월성으로 인해 지금 이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닌, 언젠가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사회에 대해 그 고마움을 능력으로 보상해주기 위함임을 알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재교육 담당 교원들부터 「선생님」의 의미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며 학생들을 상대하여야 하겠다.

 얼마 전에 읽은 신문 칼럼에서 “선생(先生)이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고 이는 곧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 ‘누구나 다른 누구에게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교사가 학교에서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을 선생이라 생각하고 함께 배우는 자세로 학생을 상대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영재학생을 상대하는 영재교육 담당 교사들이 명심해야 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http://naver.me/xJN0qSMo 글을 참고하시길​

 좋은 사람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사람들이 그를 닮으려 한다. 영재학급 학생이 자신을 선생처럼 대하는 교사, 항상 목적지향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교사를 만나면 이를 본받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영재성을 수단적 가치보다는 ‘지금 여기서 살아 있는’ 삶을 위해 사용하려 노력할 것이다. 또한 타인의 욕망에 자신의 삶을 맞추려는 ‘노예’의 삶이 아니라 스스로 인생을 컨트롤하는 ‘주인’의 삶을 살기 위해 힘쓸 것이다. 언젠가 영재학생들로부터 시작된 이런 목적지향으로의 삶의 의지가 우리 교육계 전반으로 퍼져 ‘홍익인간’의 교육이념이 발현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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