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를 부린 일
“지금까지 제가 교제했던 여성의 숫자는 대략 1 mol의 원자 개수와 동일합니다.”
원자는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입자이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타이핑을 하고 있는 컴퓨터와 키보드, 글을 쓰며 먹고 있는 바나나, 내 컴퓨터와 바나나 그릇을 받치고 있는 책상. 모두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원자 한 개의 크기는 대략 10의 마이너스 10승 m 크기 밖에 되질 않는다. 지금 내 주위에 있는 물건들의 크기와 원자 한 개의 크기를 고려할 때, 특정 물건에 존재하는 원자의 개수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많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학에서는 원자를 하나하나 개수로 취급하지 않고 거대한 묶음 단위로 다룰 수 있는 고유의 단위를 사용한다. 그 단위의 명칭이 바로 몰(mol)이다.
계란 한 판은 계란 30개, 연필 한 다스는 연필 12개를 의미하듯이 원자의 기본 묶음 단위인 1 mol 역시 특정한 개수를 지칭한다. 원자 1 mol에 들어 있는 원자 의 수는 ‘아보가드로 수’라고 부르며 개수는 개 6.02 ×10의 23승이다. 예를 들어 연필심에 있는 탄소 원자의 개수가 2 mol만큼 있다는 말은 원자가 6.02 ×10의 23승 개의 두 배만큼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원자 개수의 기본 단위인 '아보가드로 수'는 얼마나 큰 숫자인 것일까?
지구가 생성된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략 35억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6.02 ×10의 23승 초의 시간은 35억 년 시간의 400만 배에 해당된다. 6.02 ×10의 23승 m는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슈퍼맨이 6천만 년은 지나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6.02 ×10의 23승 원 정도의 돈이 있다면 세계 60억 인구 모두가 매일 1억 원씩 2700년 동안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보가드로 수’는 실로 인간이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큰 숫자이다. 602라는 숫자 뒤에 0이 스물한 개나 더 붙는다고 생각해 보라! 만약 어딘가에 아보가드로 수만큼의 탁구공이 있다고 가정하자. 한 인간이 이를 다 헤아리기 위해서는 몇 대의 후손까지 내려가더라도 시간이 부족할 것이며 그전에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수명이 긴 사람이라도 누군가를 원자 1 mol 개수만큼을 만났다는 것은 과장의 정도가 도를 넘은 것이다. 화학을 아는 사람이 들었다면 아마 제정신이 아닌 컨셉의 개그를 구사한다는 생각에 썩소를 지었으리라.
휴직 직전까지 고등학교에서 화학 수업을 한 지는 10년이 훨씬 넘었지만 수업은 항상 어려웠다. 계획한 대로 수업이 잘 진행되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학생들이 내가 하는 수업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그럴 때 난 나 자신의 이야기를 종종 하였다. 그냥 평범하게 말하면 재미없으니 약간의 픽션을 가미하거나 때론 허세를 부리기도 하였다. 몰에 관한 화학 수업을 진행하면서 ‘여성을 1 mol만큼 만났어’라고 말하면 수업 초반에는 대부분 학생들이 어리 둥절 하였지만 수업 말미에 한 번 더 언급하는 순간 “에이, 과장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라며 웃어주었다. 그러나 학생들을 빵 터지게 하는 내 개그는 되려, 내 수업 설계 실력의 저하를 야기하였다.
수업시간에 교사가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말하거나 적절한 언어유희를 구사하는 것. 이런 것은 스테이크 정찬에서의 가니쉬 같은 것이다. 스테이크 집은 스테이크가 제대로 된 맛이 나야 한다. 마찬가지로 수업 설계가 치밀하여 학생들의 관심도를 집중시킬 수 있어야 좋은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 ‘특정 교과와 단원에서 학생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학문적 지식과 이를 통해 변화시키려는 학생의 정의적 영역이 무엇인가를 올바로 인지하고 있는 것.’ 이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기본 소양이다. 내 고객이 맛있는 스테이크를 즐기기 위해서는 어떤 굽기로 구워야 하는가를 고민하듯, 학습자들의 성향 상 어떤 수업 모형이 가장 적절할 것인가 역시 교사들이 매번 고민해야 할 사항이다.
하지만 난 끌어올렸어야 할 수업 설계 실력은 올리지 않고 가십거리나 얘기하는 내 입담에 수업 진행을 의존한 경향이 있었다.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정보와 문화를 접한 학생들은 해마다 변화하는데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맴 돈 수업만 진행하였다. 간혹 재미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흥미 없는 수업을 진행하다 보니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들도 늘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 앞에서 ‘내가 낸데 말이야’라며 허세라도 좀 부리고 싶었지만 생각보다 난 자랑거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점차 지쳐갔다.
바둑에서도 똑같이 지면서 실력이 상승하는 사람은 자기가 왜 졌는지 복기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일단 내 수업의 문제점을 내가 스스로 서술해 보았다. 동료교사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 수업 나눔의 경험도 많이 하려 하였다.
일단 그동안 나의 MBTI(별로 믿지는 않지만) 성향이 내 일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알았다. 뭔가를 미루는 습관은 내 수업 준비와 학교 업무 전반에 걸쳐 내 발목을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학생들이 만족하는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들은 그만큼의 준비성과 계획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교사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수업 관련 연수를 듣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보완점은 휴직 기간인 요즘 더 찾아보고 있는 중이다.
이제 개 드립은 학교 수업 때 말고 그냥 친한 사람한테나 구사해야겠다. 일몰로 유명한 장소에 가서 해 지는 노을 앞에서 그녀에게 말해야지.
“난 당신을 일 몰(1 mol) 이상으로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