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읽었던 어느 날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 드라마 <나의 아저씨> 대사 中
한 번은 온몸이 젖은 채 두 시간 넘게 달리다가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며 ‘혼자 있는 진짜 나’를 인식한 날이 있었다.
지난 10월 3일. 나는 생애 첫 하프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였다. 평소에 최소 이틀에 한 번 꼴로 10km 달리기를 해 왔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솟았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뛰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처음 뛰는 하프 마라톤이지만 분명히 완주할 것이라 믿었다. 그것도 무난히.
스타트 총성이 울리고 가벼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초반 스퍼트를 어디에 맞출지 고민하다 서브 2(2시간 이내로 들어가는 것)로 달리기로 마음먹고 2시간 페이스 메이커 아저씨 뒤를 바짝 붙었다.
“시간 5분 30초, 거리 1 킬로미터,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당 5분 30초”
스마트 워치에서 첫 알람이 울렸다. 약간의 긴장은 있었지만 페이스가 떨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2시간 페이스 그룹에는 우연히도 나와 비슷한 헤어 밴드와 선글라스에 심지어 키도 비슷한 아저씨가 한 명 있었다. 그 아저씨와 가끔 대화하며 10km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질주하였다.
하지만 반환점을 돌고 나서부터 갑자기 고관절에 무리가 오기 시작하였다. 달리기 전에 몸은 충분히 풀었지만 고관절 운동을 따로 하진 못했다. 무엇보다도 킬로미터당 5분 30초 페이스로 10km 이상 달리는 건 처음이었다. 13km 통과 지점 급수대에서 물을 마시며 잠깐 멈췄다. 다시 스퍼트를 올렸지만 2시간 페이스 메이커와의 거리는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왼손을 들어 스마트 워치의 디지털 표시를 보았다.
‘14km, 킬로미터당 5분 52초’
페이스가 점점 떨어져 갔지만 조금만 더 힘을 내면 2시간 이내에는 들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몸은 더 이상 마음만큼 따라주질 않았다. 고관절은 녹이 잔뜩 끼인 자전거 바퀴 마냥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다. 16km 지점을 통과하며 다시 스마트 워치를 보니 순간 속도는 킬로미터당 6분 51초였다.
‘아, 이대로 서브 2는 물 건너가는구나’
몸이 쳐지기 시작하니 마음도 함께 가라앉기 시작했다. 왜 고생해서 굳이 이런 걸 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달리기는 했지만 달리기 자체를 연구해 본 적이 없었다. 매일 달리기는 했지만 만화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미들 슛 천 개를 연습한 것처럼 어떤 목표 의식을 가지고 뛰진 않았다는 사실이 무겁게 다가왔다. 2시간 페이스 메이커 아저씨의 모습은 이제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달리기 전의 자신 만만함도 다 사라졌다.
“시간 1시간 X분 X초(잘 생각나지 않는다.) 거리 18km, 평균 속도입니다. 킬로미터 당 7분 4초.”
스마트 워치로 내 페이스가 더 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회의감은 더 깊어졌다.
‘어디 달리기만 이 모양이었으랴.’
책 읽기와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머릿속을 더 채워야 더 아는 채 할 수 있어서 책을 읽었다. 남들에게 지적으로 보이고 싶은 생각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공부한다는 각오 없이 책을 읽었고, 허영심으로 글을 끄적거렸기에 내면의 수확이 별로 없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였다. 풀 코스도 아닌 하프 코스에서도 이 모양이라니. 달리면서 얻은 것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는 달리는 그 시점의 나를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알려주는 활동이었다. 실속 없이 겉모습만 그럴싸하게 달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물 빠진 숙주나물 꼴이 되어가면서 나는 달리기는 허영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음을 확인하였고 나의 바닥도 확인하고 있었다.
19km 지점을 통과할 무렵 내 앞사람들과 뒷사람들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턱 밑까지 숨이 차올랐던 나는 거친 소리를 내며 더 크게 헐떡였다. 그래도 걸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속도는 사실상 걷기에 가까웠지만 뛰는 시늉이라도 내기 위해 안간힘을 다 냈다. 헤어 밴드에서 흘러내린 땀이 속눈썹을 적셔 시야가 흐릿 해져갔다. 흠뻑 젖은 반 팔 상의 끄트머리에서는 짧은 간격으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땀으로 질퍽해진 반 바지 때문에 다리를 내디딜 때마다 젖은 빨래 물기 터는 소리가 툭툭 들려왔다. 보잘것없지만 솔직하게 달리고 있는 이 순간, 머릿속엔 부끄러운 과거 내 모습이 떠올랐다.
‘남들 앞에서 뭔가를 모를 때 그냥 솔직하게 모른다고 말할 용기는 왜 없었을까?’
눈에서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멘털은 붕괴되기 직전이고 몸도 너무 지쳐서 당장이라도 땅바닥에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에 한 발씩 다가가는 뜀박질을 멈출 수는 없었다. 40대 중반이 넘어서 비로소 나는 달리기를 통해서나마 나를 읽고 있었다.
다운되던 기분이 바닥을 치자 오히려 다시 텐션이 상승하는 감이 왔다. 땀을 비롯한 온갖 체액과 함께 과거의 나를 이루던 세포들도 공기 중에 흩어지면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이유가 이선균에게 말했던 말이 떠올랐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새롭게 세포 분열한 입자들이 나를 채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달리기 전의 나는 없어지고 진짜 나를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20km 지점을 통과하며 스마트 워치를 슬쩍 보니 순간 속도는 킬로미터 당 6분 10초였다. 아까 2시간 그룹에 함께 있었던 나와 비슷한 인상착의의 그 아저씨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저분도 좀 쳐졌구나 싶었다.
‘저 아저씨만큼은 추월해 보자!’
있는 힘을 내어 스피드를 내기 시작했다. 이러다 쓰러지면 죽기밖에 더 하겠나 싶은 각오로 내달렸다. 만화 슬램덩크에서 땀에 흠뻑 젖어 그로기 상태인데도 연거푸 3점 슛을 날리는 정대만이 생각났다. 드디어 그 아저씨 등 뒤까지 바짝 붙었다. 키 190cm의 그 아저씨는 어깨너비까지 나와 비슷했다. 어쩌면 오늘 이 대회를 하기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마트 워치로 순간 속도가 킬로미터당 5분 18초임을 확인하는 순간 결승점 통과를 알리는 신호음이 들렸다.
“삑~! 시간, 2시간 1분 36초, 수고하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