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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기쁘게 하는 달리기

사랑 연습하기

by 한슨생


지난 12월 말. 여섯 살 쌍둥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연례행사인 크리스마스 학예제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쌍둥이 아들과 딸이 학예제를 맞이하는 모습이 사뭇 달랐다. 딸은 학예제 이전부터 들떠 있었지만 아들은 오늘 뭐 했냐는 내 질문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학예제 날 쌍둥이 딸은 모든 퍼포먼스에 열띤 참여를 보였다. 하지만 아들은 춤, 노래, 피아노 연주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따라 하질 못했다. 율동을 할 땐 다른 친구들 움직임과 상관없이 혼자서 방방 뛰기만 하였다. 노래를 부를 땐 혼자서 괴성을 질러대었다. 피아노 연주 활동에서는 연주는커녕, 피아노 앞에서 가만있는 것 부 터가 불가능해 보였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음날부터 아들에게 특별 지도를 했다. 한글 읽고 쓰기와 피아노 건반 익히기를 중점으로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아들은 뭔가를 하는 시늉만 내고 도통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이 나왔다.

‘어휴.’

밥이라도 제 스스로 먹게 하자는 심정에 식기 잡는 방법을 반복하여 가르쳐도 아들은 숟가락과 포크를 제대로 움켜잡지 못하고 방바닥에 음식을 흘렸고 식판에 집중하지 못하였다.

“야. 너 진짜 계속 5살처럼 굴 거야? 안 되겠어!”

나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아들이 먹던 식판을 빼앗아 주방으로 가서 그대로 싱크대에 ‘꽝’하는 소리가 나도록 처박아 버렸다. 아들은 울먹거렸다.

“아니에요. 저 스스로 먹을게요. 흑 흑.”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와이프가 이 광경을 보더니 내게 일침을 날렸다.

“여보! 여보는 뭐 달리기 처음 할 때 지금처럼 오래 달릴 수 있었어?”

할 말이 없었다.

트레드밀 위에서 시속 9km의 속도로 5분도 채 달리지 못했던 나를 떠올렸다.

‘왜 또 고함을 질렀을까. 하.’


나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위해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배가 나오지 않고 턱선이 살아 있어야 남들 앞에 당당하게 나를 뽐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달렸다. 하지만 달리기를 처음 시작하던 2012년의 내 심폐지구력은 보잘것없었다. 매일 같이 헬스장에서 가서 트레드밀 위를 올라갔지만 지구력이 쉽사리 늘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헬스장에 빠지면서 친구들과 술자리가 생기면 잘만 나갔다. 살찌기는 싫은데 달리는 것은 귀찮고 힘들었다. 그래서 헬스장을 가더라도 달리기를 하는 ‘시늉’만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싫어하던 내 아들 역시 달리기 초반의 내 심정과 비슷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노래며 춤이며 친구들은 잘만 따라 하는데 자기는 연습을 거듭하여도 나아지질 않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모양새가 되니 유치원을 가기 싫었던 것이 당연하다. 잘 못하고 재미도 붙이지 못하는 활동을 어른들이 시킨다고 한들 제대로 몰입해서 할 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 내 기준을 갖다 대며 무턱대고 못 한다며 몰아붙이고 있었다니, 내 메타 인지력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아들의 식판을 싱크대에 내던졌던 날, ‘나는 내 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는 있었나’라며 자조하다가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려 책꽂이를 뒤적거렸다. 그러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능동적 감정을 나타낼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감정의 주인이 되어 자유를 느낄 수 있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아들을 지켜보는 내 마음은 능동적 감정이 아닌 수동적인 ‘격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기에 의해 휘둘려 자주 화를 냈다. 아들에게 화를 낼 땐, 나는 꼭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움직여지는 사람 같았다. 수동적 감정의 지배를 받았음을 후회하며 이제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화내고 후회하기를 반복하였다.


달리기를 처음 할 때도 능동적 동기로 달리지는 못했다. ‘참여하는 것’이 아닌 ‘빠지는 것’에 초점을 맞춘 사랑을 위해 달렸다. 하지만 달리기를 반복하다 보니 뛰는 행위 자체를 위해 달리는 수준에 도달하는 시점이 올 수 있었다. 뛰겠다는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능동적 감정에 의한 결정이냐고 묻는다면 80% 정도는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러닝을 취미로 한 뒤, 의도적이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달리기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진 10년은 걸린 듯하다.


그러나 달릴 때의 내 감정과 달리, 내 아들을 대할 때엔 수동적 감정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는 순간이 80%다. 생각해 보니 내 삶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달리기만큼 꾸준하진 못했다. 대상을 바꿔가며 사랑하는 행위를 했지만,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며 꾸준하게 ‘사랑하는 연습’을 한 적은 없었다. 달리기를 사랑하기까지의 여정을 정작 사람과의 사랑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껏 10년 넘게 달리며 얻은 변화가 달리기를 사랑하고 뛰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 그치고 싶지는 않다. 이대로 안 되겠다는 각오는 아들이 아닌 나를 향해서 다져야 했다.


내 아들을 만나고 5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생각해 본다. 무엇인가를 위해서 일하고, 무엇인가를 키우는 것이 사랑의 본질임을. 내가 달리는 행위를 사랑한 나머지 달리기에 대한 글까지 쓰는 것처럼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자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함을. 아들을 진짜로 ‘사랑’ 하기 위해서는 달리기를 사랑하는데 걸렸던 시간과 노력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함을.

이제 서야 비로소.


오늘도 여느 때처럼 쌍둥이들 유치원 하원시키고 함께 집으로 걸어 올라 가는데 아들은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싫어했다. 아들 혼자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게 하고 딸을 집에 데려다준 뒤에 재빨리 놀이터로 돌아갔다. 아들은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혼자 시소를 타고 있었다. 표정이 왠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서준아. 우리 술래 잡기 할까?”

“네 좋아요. 내가 아빠 잡는다.”


열 평 약간 넘을 법한 놀이터 내부에서 우린 달리기 시작했다. 아들은 나를 따라 놀이터 안을 빙빙 돌며 아파트 단지가 울릴 정도로 특유의 웃음소리를 크게 내었다. 잡힐 듯 말 듯하다 아들에게 잡혀주며 말했다.


“이야. 서준이 진짜 빠르네. 대단하다.”


어린 아들은 어깨를 으쓱하며 며칠 전 동영상에서 들었던 대사를 흉내 내며 말했다.


“당연하지. 난 천재니깐.”

“하. 하. 하.”


달리며 웃었던 것도, 달리고 더 크게 웃은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다.

이 맛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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