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하던 아이들

안양천이 불러낸 어린 시절

by 홍삼이

서리


토끼풀 뜯어 입에 물던

어린 시절


산마루가 붉은빛으로 물들자

삘기 씹던 아이들

밭길에서 어슬렁 멈춰 선다


꼴자루 등져 메고

낫자루 움켜쥔 채

밭두렁엔 고양이 발자국


참외와 무, 고구마

입안 가득 베어 물 때마다

검은흙 얼룩이 번지고


"이놈들, 거기 서라!"


후다닥 흩어지던 숨


오십 년을 건너왔어도

가슴은 아직

그 들판을 달린다


무밭과 고구마밭


제법 날씨가 풀렸다.

지난한 겨울의 문턱을 넘어섰는지

가벼운 옷차림도 이제는 견딜 만하다.


안양천을 따라 천천히 걷는데

커다란 야구장이 하얀 천막과

행사용 의자로 가득 차 있다.

정월대보름을 준비하는 풍경이다.

정월대보름 행사장

문득,

배고팠던 어린 시절이

바람처럼 훅 다가선다.


친구들 집 부엌을 돌며

밥과 나물 반찬을 한데 모아

커다란 함지박에 쏟아붓고

참기름을 둘러 쓱쓱 비벼

나눠 먹던 정월대보름 밤.


그날만큼은

남의 집 음식을 몰래 가져다 먹어도

어른들이 모른 척 눈감아 주던

넉넉한 시절이었다.


유난히 배고팠던 그때.

또 다른 기억이 물결처럼 밀려온다.

정원대보름 행사인 달집태우기 준비

오십여 년 전,

초등학교 5, 6학년 무렵.

가난을 견디려

토끼와 오리, 닭을 기르던 시절이었다.


학교를 마치면 가방을 내팽개치고

낫과 자루를 들고 들과 야산으로 나가 짐승들에게 먹일 풀을 베었다.


노을이 산 너머로 기울 무렵이면

우리는 슬그머니 발걸음을 늦췄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남의 밭으로 스며들었다.


고구마와 무, 참외를 서리하다

밭주인의 고함소리가 터지면

심장이 터질 듯 뛰며 들판을 가로질렀다.


숨을 고르고

야산 언덕 아래 웅크려 앉아

서리해 온 무와 고구마를

풀잎에 쓱쓱 문질렀다.


흙을 털어내고

껍질째 베어 물던 순간,


친구들 입가에 번지던

하얀 웃음과

뺨에는 땀이 뒤섞인 검은흙자국.


그 배고픔과 웃음 속으로

마음은 이미

그 녀석들과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머리가 벗어지고

흰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굵은 주름으로 웃고 있을

그 녀석들.


지금도 어딘가에서

서리하듯

추억을 나눠 먹고 있을까.


안양천 바람 속에서

나는 잠시

그 들판의 아이가 되어 있었다.

강변의 노을 모습

-2026년 2월 28일 오후, 안양천을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