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철쭉, 특별한 만남, 그리고 인생의 고개에서
철쭉이 보고 싶어 봄빛을 따라 지리산 바래봉을 찾았다.
전북 남원시에 위치한 바래봉(1,167m)은
지리산의 여러 봉우리 중 하나다.
멀리서 바라보면 아름다운 곡선이 펼쳐져 있어
해 뜰 무렵이나 해 질 녘이면 곡선의 능선이 붉게
물들어 장관을 이룬다.
'바라보다'에서 유래해 '바래봉'이라 불린다는
설도 있다.
과거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하거나,
'깨달음의 길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해석도 있다.
전북교육연수원에서 출발한 산행은 세동치, 부운치, 팔랑치라는 고개를 넘어, 바래봉, 용산마을 운봉 허브밸리 주차장까지
약 13~14km. 산행시간은 6시간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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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에서 바래봉 정상까지는 약 7km 거리,
팔랑치 고개에 앉아 문득 생각했다.
'만약 85세까지 산다면, 지금 나는 인생의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세동치를 지날 때 떠오른 건 20대의
내 모습이었다.
초록 초록한 젊은 시절, 인생도 그처럼 푸르렀다.
부운치, '구름이 머무는 고개'를 지나며 스치는 건
40대 중반. 앞만 보고 달리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조금 쉬어갈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팔랑치, 바래봉을 눈앞에 둔 지금은 마치 인생의
늦가을 같다. 나는 그 고개 위에 앉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이 화양연화(花樣年華)인
것이 분명하다.
산새가 팔랑이며 넘나드는 고개.
바래봉까지 이어진 철쭉 군락지와 완만한 능선의
절경은 이 산의 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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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개를 넘으며 인생을 돌아보다
최경선
인생을 85년이라 여긴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세동치에 앉아 내려다보니
내 인생은 20대 초중반
봄과 여름, 푸르른 시절이었다.
부운치에 앉아 바라보니
내 인생은 40대 중후반
초가을, 깊어가던 시절이었다.
팔랑치에 앉아 올려다보니
내 인생은 60대 중후반
늦가을, 깊어가는 시간이었다.
구름도 바람 따라 흐르는데
힘들면 쉬어가라며
고개는 길을 잡고 나를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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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랑치에서 내려다본 산골마을은 연둣빛
물결에 푹 잠겨 있었다.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풍경.
나도 그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잎들은 바람에 휩쓸리고,
언젠가 서산 가야산에서 본 도미노처럼 잎들이
쓰러졌다. 그 잎새들처럼 자연에 푹 빠지고 싶었다.
철쭉은 아직 이르렀던 모양이다.
부운치에서 바래봉 삼거리 사이,
철쭉 군락지에는 봉긋한 봉오리만 맺혔다.
드문드문 진달래가 살짝 웃고, 새하얀 싸리꽃이
빈자리를 채웠다.
그러나 바래봉 능선의 부드러운 곡선과 연둣빛 물결, 산마루에 닿은 새파란 하늘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전나무 군락지에서 피어나는 피톤치드의 신선함.
짙은 녹음 속에서 휘파람과 콧노래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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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길에서 만난 구례 용방초등학교 5ㆍ6학년 아이들과의 만남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정상에서 선생님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는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내려가는 길, 남학생 여섯 명과 선생님 한분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무슨 일을 하셨어요?"
처음엔 질문에 당황했지만, 이내 이해가 갔다.
이 학교는 5학년 8명, 6학년 11명뿐인 작은
학교였다. 그래도 구례에서는 세 번째로 큰 규모란다.
시골 현실과 점점 늙어가는 사회가 피부로 다가왔다.
나보다도 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6학년 때 키가 140cm쯤 되었던 나를 떠올리면,
지금의 아이들은 무척 큰 편이다.
선생님이 서울에서 오신 분이라며 사회 시간에
배운 질문을 나에게 해 보란다.
" 광주 5.18 민주화 운동 아세요"
" 12.12 사태 때 뭐 하셨어요"
"반도체에서 '도체'는 무슨 뜻인가요"
산행 중 흘린 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초등생들의 수준은 보통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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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머리에 있는 용산마을 근처의 철쭉은 활짝
피어 있었다. 산정상 근처에서 보지 못한 아쉬움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4월 26일부터 한 달간 운봉 바래봉 철쭉 축제란다.
하지만 축제장에 설치된 부스 내 텐트 식당에는
손님이 없어 분위기가 썰렁하다.
나 혼자 덜렁 앉아 있다.
두릅 전과 지리산 허브잎 쌀막걸리 한 병을
시켰다. 80년대 가요 메들리가 손님 없는
식당 안을 가득 채운다.
흥 없는 노랫가락이 왠지 마음을 허전하게 한다.
차창 밖으로 붉은 석양이 흘러간다.
하루를 온전히 품었던 산처럼,
해가 천천히 저문다.
바래봉의 넉넉한 품과 부드러운 능선,
그리고 고개마다 나눈 인생의 대화가
오래도록 마음에 머문다.
철쭉 축제장의 싸늘함만 가슴을 저민다.
-2025년 4월 28일 바래봉 철쭉제를 돌아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