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4일•계룡산 산행기
이상보의 수필 [갑사로 가는 길]을 떠올리며
계룡산을 찾았다.
흰 눈 덮인 겨울이 아닌,
초록이 짙어지는 5월의 계절에.
9시 37분,
동학사 주차장에 내린 나는
많은 등산객들 사이에 섞여
동학계곡의 신록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계룡산 동학사'의 일주문이
떡하니 서서 손짓하며 어서 오라 한다.
관음암, 길상암, 미타암.
조그마한 산사들은 짙어가는 초록과
화사한 꽃들에 파묻혀
마치 정원 속의 암자처럼 보인다.
고요한 산사의 적막을 깨는 건
오직 등산객들의 들뜬 말소리뿐이다.
선두에서 걷던 두 사람은 어느새 뒤로
물러서고, 나는 산악대장의 뒤를 따라
가쁜 숨을 고르며 돌길을 오른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남매탑에 도착했다.
신라시대,
상원조사가 수행 중에 고통받던 호랑이의
목구멍에서 가시를 빼주자,
며칠 후, 호랑이가 아름다운 처녀를 데려왔단다.
그들은 부부가 아닌, 의남매의 연을 맺고
한날한시에 입적했다 하니,
그 사리를 모셔 세운 것이 오늘의 '남매탑',
혹은 '오누이 탑'이라 불리는 전설의 탑이다.
보은과 비련, 수행과 운명...
그들의 삶을 떠올리며 탑 앞에 선다.
그리고 약 200m 떨어진 삼불봉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 관음봉 가는 길, 나를 돌아보다.
삼불봉에서 관음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가장 깊이 생각이 많았던 시간이었다.
산행의 절정이기도 했다.
5월의 숲은,
연둣빛에서 진초록으로 깊어져가고,
그 길 위에 넘실대는 초록 물결 위로
하얀 암릉이 속살처럼 드러나
등산객들을 유혹한다.
산마루엔 직선이 없다.
오직 곡선이 빚어내는 미학이 흐를 뿐이다.
어느 유명한 화가도 흉내 내지 못 할
어쩌면,
그 곡선을 자연은 이렇게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그저 황홀할 뿐'
그것이 이 아름다움을 담아낼 수 있는
내 감상의 전부였다.
한참을 걷던 중,
진분홍 철쭉과 소영도리나무꽃이
불쑥 고개를 내밀며 소박한 웃음으로 인사한다.
봄을 떠내 보내기 싫은 걸까?
색이 바랜 채 윙크하는 그 모습이
괜스레 마음이 아프다.
한편,
소나무 한 그루가 45° 기울어진 채
내게 인사한다.
허리를 펴도 된다고 해도
가느다란 몸은 펴지 못한다.
조용히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아픈 뿌리로 바위를 쪼개며
그는 그렇게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세찬 바람에 휘어진 허리가 굳어버린 채로...
조그만 힘들어도 인상을 찌푸리던 내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었다.
산허리에 놓인 계단을 따라
등산객들이 줄지어 오른다.
먹이를 입에 문 개미들처럼
초록 속으로 하나 둘 사라진다.
12시 10분,
산행을 시작한 지 3시간 30여분.
연천봉으로 향하는 길가에
한그루의 참나무가
껍질이 벗겨진 채 간신히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푸르름이 무성한 숲 한가운데서
그 나무는 유한한 존재의 끝을 보여준다.
쓸쓸한 연민이 스며든다.
연천봉에 올랐다.
'연천봉 석각', '연천봉 낙조' 안내판이 눈에 띈다.
석각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方百馬角 口或禾生'
• 方(방) --- 사방, 곧4
• 馬(마) --- 午(오), '오'는 80을 의미.
• 角(각) --- 짐승의 뿔 두 개 '2'를 의미.
'방백마각'은 '482'를 뜻하며,
• 口 + 或 = 國(나라 국)
• 禾 + 生 = 移(옮길 이)
'국운이 다하고 나라가 옮겨간다'는 뜻이란다.
조선은 개국 482년 만에 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리라는 의미.
길가에 참나무와
석각에 새겨진 한 줄 문장을 통해
나는 '무한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긴다.
그리고 다짐한다.
아옹다옹하지 말자.
덧없음을 깨달은 자는
쓸데없는 다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갑사로 가는 길], 한 편의 수필이
갑사를 더 유명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접하며
약간의 부끄러움이 스민다.
물론 작가의 공적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남매탑 설화를 전파했고, 갑사를 찬미한
이 시대의 기록자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신라 말 또는 고려 초의 갑사 석조약사여래 입상,
봉우리마다 얽힌 설화,
아름드리 갈참나무들...
이 수많은 역사적 존재들이
더 많이 빛날 수 있었는데
갑사 앞 작은 카페
깜박이는 미니 전등,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의 서늘함.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돌아보며 쓸쓸함을 느낀다.
어쩌면,
작가의 마음을 슬쩍 훔쳐본
내 어설픈 동경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찬란한 계절 한가운데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막연한 슬픔 때문이었을까?
● 계룡산 산행정보
• 시간대별 걸어온 길
09:37 동학사주차장
09:50 동학사 일주문
10:00 관음암, 길상암, 미타암
10:40 남매탑
10:59 삼불봉
11:47 관음봉
12:26 연천봉
13:11 갑사
13:40 갑사주차장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약 11km, 4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