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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Nov 25. 2024

사회적인 동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

너무나도 사회적인 우리 뇌와 세포

 “말도 안 돼,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고 복잡한 일이 가능하겠어?”

세상은 작고 나약한 우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투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마 물질세계의 법칙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추측을 하곤 한다. 기운, 진리, 신, 영혼, 의지 등으로 불리는 초자연적인 무언가 만이 이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는 애초에 우리가 이러한 추측을 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그러한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한다. 우리는 그 초자연적인 존재의 실마리를 육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경험하지도 않은 그러한 초자연적인 존재를 생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물질세계, 삶을 통제할 무언가에 관한 주장은 삶의 목표에 있어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 삶을 통제할 무언가는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투자할 정도로 매력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만 손에 넣는다면, 여생을 만족으로 꽉꽉 채워 넣고 만족하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삶이 공허하다며, 후회하며 삶을 마무리하기 싫은 우리는 그러한 매력적인 존재가 정말로 존재할 지를 검증하고 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추측되는 놀라운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해 보는 것이다. 자연적인 요소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서도 놀라운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반대로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반박할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의식(마음, 이성)의 정체를 파악하고 우리가 주로 좇던 정보 중 하나인 감정의 정체를 파악하며, 초자연적인 존재에 관한 추측과 인지가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반박하고자 노력했다. 먼저 의식이 물질세계를 뛰어넘어 더 상위 세계의 초자연적인 무언가를 포착할 능력이 있는 존재라는 생각을 검증해 봤다. 우리는 지금까지 의식이 신체와 생각을 통제하는 존재로서 물질세계보다 상위의 무언가처럼 여겨왔다. 특히 합리적인 추론으로 사실과 본질이라는 순수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본질과 거리가 있는 물질세계를 뛰어넘어 더 상위의 존재에 접근해, 삶을 통제할 방법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 달리 의식은 딱히 신체와 생각을 온전히 통제하는, 그들보다 상위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특히 의식은 매번 특정 정보를 더 중요하게 여기며 때문에 편향된 추론을 만드는 존재였다.     


 편향을 만들어내는, 의식 혹은 뇌 전체에서 더 중요하게 다뤄지는 정보 두 가지를 더 깊게 알아보고자 했는데, 그중 하나는 감정이었다. 의식 밖에서 나타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만 같고 또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은 마치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기준처럼 보인다. 즉 공유할 수 있는 행동 동기로서 감정은 마치 인간이라면 마땅히 따라야 할 어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선사하며, 이러한 보이지 않는 기준은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세계가 있을 것이란 추측에 또 다른 근거로서 쓰인다. 이러한 느낌이 초자연적인 존재나 상위의 세계의 증거라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서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며,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파악해 봤다. 감정의 정체는 뇌의 활성화로 관측되는, 동물이라면 살아남기 위해, 마땅히 해야 할 보상과 위험에 관한 정보처리의 결과 중 일부였다. 따라서 동기의 공유라는 놀라운 현상은 상위의 존재 없이도 충분히 설명 가능했다. 즉 우리가 좇던 거대한 감정이란 상위 세계에서 온 무언가가 아니라, 그저 우리 뇌가 시도 때도 없이 만들어내는 예언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편향을 만들어내는 또 다른 정보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바로 사회적인 정보이다. 또한 우리가 사회적인 정보를 더 민감하게 처리하는 경향, 즉 동조 경향은 또 다른 복잡하고 놀라운 현상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 특히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고 비슷한 믿음을 공유하며 다수의 믿음을 근거 삼아 그 믿음의 실체를 더욱 굳건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기도를 통해 상위의 존재를 느꼈다는 다수의 증언에 귀 기울이게 되면, 실제로 기도하면서 그 상위의 존재가 존재하는 것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 이 초자연적인 경험은 종종 실제로 상위의 존재가 존재할 것이란 근거로 쓰인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일은 정말로 그 존재가 실존해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남의 경험을 모방하려고 하는, 지독하게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각 개체가 정해진 역할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개미 사회를 보면, 그 사회가 마치 살아 있는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일 때가 있다. 아마 해당 개미 사회의 구성원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자신의 무리로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개미는 자신들의 정체성의 비중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사회에 더 두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그 사회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이는 이유는, 개미를 바라보는 또 다른 지독하게 사회적인 동물, 정확히는 그 뇌가 평소에 그 개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보 처리를 하기 때문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 동물조차도 지독하게 사회적인 세포들의 집단으로서, 하나의 사회이자 만들어진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다수가 서로의 믿음을 공유하게 되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 세 명이 별 다른 목적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니, 다른 사람들 역시 그들을 따라 같은 곳을 바라본다. 심지어 이내 무언가를 봤다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지만, 세 명의 단체 행동을 동조하고자 그 행동의 이유를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같은 무리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면 더 놀라운 일이 생긴다. 예를 들어 세 명이 가상의 집단과 정체성을 만든다. 그 집단은 이내, 심리학 공부 모임이라는 이름과 실체가 부여된다.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 모여 심리학을 공부하는 일을 반복하며, 심리학 공부 모임은 그 실체가 점점 생생해진다. 실제로는 아무런 실체가 없음에도 우리는 그들의 행동과 믿음을 통해, 심리학 모임이라는 실체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학교라는 집단도, 회사라는 집단도, 국가라는 집단도 이 마법 같은 믿음의 결과이다. 우리는 다수가 믿으면, 그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되고 결국 우리 또한 그것을 믿게 된다.    

   

 뇌를 촬영해 보면, 마법 같은 일의 실마리가 잡힌다. 뇌는 자신을 둘러싼 두꺼운 두개골과 피부를 뚫고 더 나아가 타인의 피부와 두개골을 뚫어 그 안에 있는 타인의 뇌에 반응한다. 물론 우리가 어떤 게임에서 나오는 외계 종족처럼 서로의 뇌가 어떤 에너지와 같은 것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뇌는 타인의 행동을 감각기관을 통해 관찰하고 그 정보를 토대로 해당 타인의 뇌의 상태를 적극적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자신도 그 상태를 모방하려고 노력한다. 그 결과, 우리는 서로 물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상대의 표정과 상대방이 내는 소리를 듣고 그가 느끼는 감정을 공유하며, 나의 관점에 얽매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뇌 활성화를 연구한 학자들은 모방을 전문으로 하는 뉴런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특정 뇌 부위(뉴런 뭉치)가 이러한 일을 주로 맡아서 한다고 주장한다. 그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학자들의 다양한 주장은 모두 모방의 의지가 실제로 뇌에서 관측되기 때문에 생겨난다. 즉 이러한 정신 경험 혹은 기능은 분명 뇌라는 물질적인 실체에 종속된 것처럼 보인다. 또 뇌의 병(혹은 변화)이 있는 누군가는 이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추측을 지지하는 근거가 된다. 일부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특정 뇌 병변이 원인이 되어 뇌가 타인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모방하지 않는다.     


 보통 이러한 뇌 활성화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조절해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 것만 같다. 표정의 모방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고, 친구가 웃으면 따라 웃고, 연인의 슬픔을 보면 나 역시 기분이 안 좋아지듯 타인의 뇌를 따라 하려는 경향은 의식이 개입하기 전에 벌어지는 반사적인 일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우리 마음과 신체가가 무조건적으로 공감하고 동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더 상위의 존재가 그 강력한 영향력으로 우리 마음과 신체를 조종하는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즉 우리는 가끔 의식의 통제 밖에서 나타나는 동기나 행동을 인간을 설계한 누군가가 정해놓은, 인간이 마땅히 따라야 할 본연의 행동(선)이라고 해석하곤 한다. 이러한 억측은 의식이 모든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는 존재라는 오해를 바탕으로 그러한 오해와 상반되는 무의식적인 감정과 행동을 해석하고자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전부터 길게 다뤄왔듯이, 의식이 모든 정신활동과 행동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의식적인 심사숙고가 필요 없는 다양한 의사결정 활동은 의식의 활성화와 상관없이 처리된다. 동조도 아마 그러한 의사결정의 대상일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추측을 지지하듯, 뇌가 동조를 굳이 저울질할 필요 없는, 좋은 일로 여기는 것만 같은 정황이 포착되기도 한다. 뇌를 촬영해 보면 우리 뇌는 동조를 할 때, 보상 관련 정보를 처리하고 반대로 동조를 거부할 때, 위험 관련 정보를 처리하며, 결과적으로 동조 관련한 의사결정을 편향시킬만한 일을 한다. 통념에 의하면 의식은 이성이라는 이명과 같이, 일정 시간 이상 정보를 붙잡고 더 합리적인 판단을 만들어낸다고 여겨진다. 만약 모방이나 동조 역시 모두 의식으로 조절되는 거였다면, 모방이나 동조도 의식적인 계산으로 만들어낸 합리적인 판단의 결과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생각과 달리 (굳이 의식이 의사결정자가 아닌 경우라도) 의사결정을 내리기 위해 참고할 정보가 이미 편향되어 있고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합리성이 개입하기도 전에 동조는 이미 거부보다 좋은 것이란 결론이 도출된다. 동조와 반대를 할 때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촬영한 연구를 종합해 분석한, 메타 분석을 진행한 연구에 의하면 동조를 할 때에는 보상 회로의 활성화가 반대를 할 때에는 위험 관련 정보를 처리하는 부위의 활성화가 관측된다고 한다. 해당 연구를 아주 조심스럽게 해석해 보자면, 최소한 동조의 경험은 긍정적인 정보로서 저장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일이 반복될수록, 동조라는 행동은 너무나 당연히도 보상처럼 여겨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동조 거부의 경우 정반대의 일이 생겨난다. 그 결과, 우리는 당연한 보상을 향해 또 위험을 피해 고민 없이 반사적으로 동조하게 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나긴 기간, 사회를 꾸리며 생존해 온 우리는 동조를 좋은 것이라고 학습하도록 편향된 뇌를 가지게 되었고 그 결과 복잡한 저울질 없이 반사적으로 동조하게 된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즉 가끔 우리는 동조와 공감이 의식의 통제 밖에서 너무나 재빠르게 일어난 다는 것을 근거로, 동조나 공감이 의식보다 상위의 세계로 온 무언가와 관련 있다고 주장하곤 하는데, 그러한 추측은 틀렸다. 동조나 공감이 의식적인 통제 시도 전에 발생하는 것은 단지 뇌가 보통 동조를 좋은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의식을 활성화시켜서까지 꼼꼼하게 계산해보지 않고 동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태생과 페로몬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사회를 꾸려나가는 개미를 보며 신기해하듯이 반대로 개미는 모방을 보상으로 여기고 상대방의 뇌의 상태를 적극 모방하며, 사회를 꾸려나가는 인간을 신기해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개미든 인간이든 굳이 멀리 다른 종을 보며 서로를 신기해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그들의 존재부터가 세포들이 모여 적극적으로 사회적인 행동을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러 개의 세포가 그들이 하나라고 믿으며 뭉친 결과이다. 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사회로 규정할 것이라는 추측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세포 뭉치가 성공적으로 공존하는 모습을 근거 삼아 생겨난다. 수많은 세포가 모이면, 같은 기능을 하는 하나의 뭉치가 된다. 다양한 기능을 하는 뭉치가 모이면, 하나의 개체가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서로 다른 기능을 하는 세포 뭉치가 하나로 뭉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서로 다른 기능을 한다는 것은 서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상 관련 정보를 주로 처리한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보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이다. 반대로 위험 관련 정보를 주로 처리한다는 것은 자신들, 세포 뭉치들이 존속하는데 위험 관련 정보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은 서로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서로 다른 기능을 함에도 성공적으로 협력해 낸다. 각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더 큰 묶음, 상위의 존재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즉 온갖 세포 혹은 세포 뭉치가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그들의 전체 합인 ‘나’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전체의 합인 ‘나’를 위해서 자신의 기능과 주장을 매번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나’를 이루는 또 다른 요소의 주장의 귀 기울이거나 협력한다. 즉 우리는 ‘나’라는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믿으며 행동하는 수많은 세포들의 합이자 그들의 사회이다. 우리 눈에 바글바글한 개미가 모여서 하나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보이는 것은, 애초에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실 회사나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세포 단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체 단위에서도 똑같이 일어난다. 우리는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고자 서로를 묶는다. 가족, 모임, 회사, 국가 등 다양한 기준으로 서로를 묶고 서로의 정체성을 그 집단으로서 정의한다. 특히 우리는 같은 것을 믿는다는 것을 근거로 서로의 정체성을 같다고 정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한국 법, 원 화폐, 한국 국민성 등 관측할 수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을 믿으며 그것을 믿는 것을 근거 삼아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의한다. 이처럼 같은 것을 믿는 같은 집단이기 때문에 서로를 같은 존재라고 여기며, 그 증거로 서로의 통제실인 뇌를 동기화시킨다. 연인을 향해 던지는 달콤한, 가족을 향해 던지는 애틋한, 친구를 향해 던지는 든든한, 우리가 남이냐는 말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실제 뇌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사회적인 생명체가 생존하는 방법이다. 즉 놀랍고도 치밀한 생명체의 구조나 사회 모두 초자연적인 존재의 전능한 손길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회적인 생명체가 몇 가지 정보(신념)에 편향되어 상호작용을 반복한 결과이다.     


 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이 초자연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라는 오해를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는, 사회적인 상호작용의 결과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뇌의 동기화는 그것을 행하는 단체가 환경에서 살아남게 하는 것을 넘어 환경을 극복하고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서로의 정체성을 일치시키는 일의 효과는 실로 놀랍니다.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 역시 인류 번영의 비결로 사람들을 뭉치도록 만드는 믿음과 그렇게 만들어진 단체의 거대한 규모에서 나오는 대단한 협력을 꼽았다. 우리에겐 너무나 익숙한 일이라서, 그것이 대단한 일인지를 몰랐지만, 생각해 보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같은 정체성을 갖는다는 이유로 혹은 같은 믿음을 공유한다는 이유로 서로의 마음속을 더 확인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일한다. 만약 우리가 합리적인, 그래서 남들이 믿는다고 해서 함부로 믿지 않는, 같은 정체성을 공유한다고 해서 함부로 믿지 않는 존재였다면, 우리는 매번 남들과 협력하거나 가치 있는 것을 교환하기 전에 서로를 꼼꼼히 검증하느라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모할 것이다. 이 꼼꼼한 검증은 협력의 진행을 늦추고 협력의 결과물의 가치를 낮추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협력의 대가를 공평히 나누는 경우, 타인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매번 눈치를 살피며 최소한으로 노력하려고 할 것이고 그 결과 협력의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너와 나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며, 따라서 널 믿을 수 없다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의심이 올라오기 전에, 우리의 사회적인 뇌가 일단 동조를 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 비효율적인 의심과 비협조는 잘 발생하지 않는다.


 다만 이상한 점이 있다. 경험 상 우리가 매번 아무나 와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분명 서로가 같은 존재라는, 그런 직관이 있는 경우에만 동조하곤 한다. 반대로 서로가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나 직관이 들면, 동조하지 않는다. 즉 보통 뇌의 자동적인 동조 경향은 서로가 같은 집단이라는 정보처리가 나온 뒤에 만들어진다. 반대로 나와는 다른 집단, 내가 속하지 않은, 적대 집단일 가능성이 나타나면, 우리 뇌는 거부와 반대에 관한 정보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의 동조 경향은 보통 내집단만을 향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긴 기간, 아주 많은 이들과 성공적으로 협력해 왔다. 무언가가 더 많은 인간을 아군으로 묶는 역할을 한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 무언가란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믿음이다.     




 유발 하라리는 관측할 수 없는, 실체가 없는 것을 상상해 내고 그것을 믿는 우리의 경향이 더 많이 이들이 내집단으로 뭉칠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한다. 만약 우리가 실제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만 우리 집단의 한계를 정의했다면 우리는 생각보다 더 좁은 크기의 무리를 이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만약 머리색, 눈동자 색, 수염 모양, 특정 장신구의 착용 여부 등 눈에 띄는 것으로만 뭉칠지 말지를 결정해 왔다면, 우리는 직접 이동하며 서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인원 밖에 뭉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내집단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집단을 형성할 이유에 그러한 한계를 두지 않았다. 생김새가 달라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화폐를 상대도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믿을 수 있고, 같은 종교를 믿으면 믿을 수 있고, 같은 국가의 시민으로서 서로 법을 지킬 것이란 신뢰가 있으면 믿을 수 있다. 그래서 특정 생김새의 한 집단이 다른 생김새를 지닌 다른 집단을 물리적으로 정복하고 상처를 남겨도, 종교를 통해 서로를 하나로 바라보고 성공적으로 통합하는 일이 존재해 왔다. 서로의 털을 가꿔준 경험이 있는 이들끼리 뭉쳐 그 집단의 크기가 크지 않은 침팬지와 달리, 인간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대화를 통해 서로 같은 믿음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서로를 형제나 자매라고 부르며 뭉칠 수 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믿음의 여부로 서로를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다 보니, 인류는 어느 정도 물리적인 제약을 벗어난 크기의 집단이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우리가 뭉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생각의 핵심 중 하나는 인간에 관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을 더 특별한 존재로서 정의하는 사상의 출현은 인간 자체를 하나의 내집단으로 묶어 언제든 더 큰 크기의 집단이 형성될 수 있도록 하는 일의 시작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 옛날, 반짝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가치 있다고 여기는 이들만이 뭉치거나, 해당 거주 지역의 포식자인 호랑이를 숭배하는 이들만이 뭉쳤던 시절을 생각해 보자. 우리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이 두 집단은 아마 사는 곳이 다르고 믿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같은 집단으로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어떤 현자가 나타나, 우리가 경험하는 특정 정신 현상이 사실 인간 모두가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즉 우리 모두가 의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정보처리, 신체 소유, 운동 통제가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이며, 그것이 인간이 더 특별한 이유라는 주장을 했다고 생각해 보자. 원시적인 집단의 다수는 자신들이 실제로 그러한 정신 경험을 한 것을 근거로 자신의 영혼의 존재를 믿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사회적인 뇌에서 발생하는, 서로의 정신 경험이 공명하는 듯한 초자연적인 경험은 마치 서로의 영혼이 이어질 수 있는, 같은 세계에 소속된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나 자신이 영혼을 가졌다면 그것에 공명하는 상대방 역시 영혼을 가졌다는 생각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때문에 영혼이야 말로 인간의 공통점이라는 주장에 공감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우리 뇌의 작동 방향과 관련 있는, 이 혁신적인 사상의 출현은 우리의 믿음을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으며, 동시에 우리가 더 큰 크기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긴 기간, 이러한 믿음이 재생산되며 너무나 당연해졌기 때문에 삶에 관한 오해가 만연해지고, 삶의 의미를 좇는다며 물질적인 세계의 불확실성을 통제할 방법을 찾는 일이 생겼다고도 생각한다. 즉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으며 뭉치기 때문에 더 잘 뭉칠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이 때문에 초자연적인 존재를 믿게 되었다. 특히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물질세계를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특히 영혼의 존재는 물질세계와 상위의 세계에 가운데 있는 존재로서, 우리가 상위 세계에 진입해 물질세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바탕이 되었다. 어떻게 영혼의 존재에 관한 믿음이 불확실성의 통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알기 위해 다음에는 영혼에 관해 얘기해 보자.


 


참조


Asch, S. E. (1956). Studies of independence and conformity: I. A minority of one against a unanimous majority. Psychological monographs: General and applied, 70(9), 1.      ISO 690    


Boudreau, C., McCubbins, M. D., & Coulson, S. (2009). Knowing when to trust others: An ERP study of decision making after receiving information from unknown people. Social cognitive and affective neuroscience, 4(1), 23-34.          


Wu, H., Luo, Y., & Feng, C. (2016). Neural signatures of social conformity: A coordinate-based activation likelihood estimation meta-analysis of functional brain imaging studies. Neuroscience & Biobehavioral Reviews, 71, 101-111.


우타 프리스, 크리스 프리스, 앨릭스 프리스. (2023). 두 뇌, 협력의 과학. 김영사


유발하라리. (2015). 사피엔스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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