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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민 Nov 18. 2024

감정의 정체

감정에 충실한 우리는 미래가 통제될 것이라 믿는다.

 삶에 관한 후회를 남기는 이들을 봐왔다. 그들처럼 살지 않기 위해 그들이 추구한 것과는 다른 삶의 의미 혹은 목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거듭하는 실패 속에서 알게 된 것은 그 어떤 것도 후회를 남겼던 이들보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나 많고 때문에 어떤 의미나 목표를 좇더라도 예상한 것만큼의 보상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는 없다. 당연히 예상한 것만큼 후회를 막을 수도 없다. 결국 삶의 목표를 찾던 과정은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좇는 과정과 유사했다.  

    

 똑똑하다고 자부했던 우리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는 이 모든 과정을 이끈 의식(이성, 지성, 자유의지로도 불리는 인지되는 생각과 논리를 쌓는 주체)이다. Libet의 자유 의지에 관한 연구 결과와 그 후속 연구 결과를 해석해 보면, 의식은 우리의 통념과 다르게, 생각보다 특별한 순간에만 정신과 행동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과감한 해석을 해보자면, 의식은 가치가 큰 특정 정보만을 모으고 분석해 환경과 자신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는 데이터 분석가와 비슷하다고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의식은 다른 정신 기능과 유사하게,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정신 활동과 행동에 성공적으로 반영될 것이고 따라서 자신의 계획에 따라 환경을 통제해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중요하게 여긴다. 때문에 의도가 결과에 성공적으로 반영되었다는 정보, Frith의 이론을 빌려 이를 표현하자면, 운동 명령에 관한 시뮬레이션과 실제 감각 정보를 비교하며 둘이 일치한다는 정보, 즉 대리감을 매우 중요한 정보로서 취급한다. 그러다 보니 의식은 자주 특정 의도는 자신으로부터 시작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특정 정신 활동은 의식을 포함한 다양한 뇌 기능의 협동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신체와 환경의 통제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의식(혹은 아마 다른 뇌 기능도) 자신이 통제하는 것 이상의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곤 한다. 따라서 만약 미래를 통제할 무언가가 그 존재를 처음 추측한 고대의 현자의 말처럼, 순수하고 편향되지 않은 완벽히 합리적인 정신 활동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무언가라면, 이처럼 편향적이고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는 의식은 그 무언가에 도달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는 애초에 이처럼 자신의 통제 능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향으로부터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시작되었다고도 생각한다.      


 게다가 잘못된 믿음은 우리가 그 믿음을 공유하고 발전시켜 나가면서 더욱 강력한 실체를 갖게 되었다. 아주 옛날부터 의식의 기능과 경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대리감에 관한 맹신에 영향을 받아 통제 가능한 대상을 넓히는 일이 반복되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대리감을 맹신하며, 아주 모호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아주 그럴듯하게 통제에 관한 비합리적인 주장을 펼치면, 다른 이들도 자신의 대리감에 관한 맹신을 바탕으로 해당 주장을 공감하고 지지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며 기나긴 세월 동안 문화유산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의식의 본래 기능을 추측할 수 있는 지금 시대에서도 그 문화유산은 아주 강력한 영향력을 펼친다.


 이렇게 되어버린 데에는 대리감 맹신을 제외한 뇌의 또 다른, 두 가지 경향이 큰 역할을 했다. 첫 번째, 우리 뇌는 애초에 미래에 관한 객관적인 정보 보다, 자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주관적인 예측을 더 맹신하는 경향을 갖는다. 우리는 매번 미래에 관한 반쪽짜리 예측을 만들고 그것을 맹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주장이 이상하지 않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 인간의 생존에 있어서 무리 생활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 뇌는 기본적으로 무리에게 동조한다. 그 과정에서 합리적인 비판이 생략되는 경우가 아주 빈번하기 때문에 진리와 같은 쌓인 문화유산에 쉽게 도전할 이는 적었을 것이다. 즉 우리 의식 혹은 뇌는 대리감, 주관적 예언, 사회적 정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 미래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재생산되며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된다. 지난 글에서 대리감이 나름의 기능을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같이 이러한 경향 자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경향이 긴 세월 문화유산을 쌓으면서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경향으로부터 나온 주장을 자연스럽게 동조하며 그 위의 더 많은 주장을 쌓고 세계관을 탄탄하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미래의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삶의 목표에 관한 잘못된 접근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추측을 검토해 보고자 주관적인 예언과 사회 정보에 관한 두 가지 경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우선, 주관적 예언, 즉 감정에 관한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뇌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희미하게 느껴지는 감정의 정체를 명확히 밝혀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정체도 모를 행복(쾌한 기분)과 불안(불쾌한 기분)을 너무나도 쉽게 따른다. 심지어 대부분의 이들은 행복을 좇고 불안을 피하는 것을 삶 전체의 목표로서도 설정한다. 삶에 관한 복잡한 통찰을 하는 현자들조차 이러한 일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복잡한 이유를 제시하며, 감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를 만들거나 혹은 감정에 충실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주장한다. 일차원적으로 살지 않는 현대 의심쟁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직선적으로 쾌락을 좇지 않고 직선적으로 불쾌함을 피하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 감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 복잡한 가치를 내세우며 삶의 목표를 찾는 지성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결국 그 가치가 가져다주는 거대한(혹은 영원에 가깝게 지속될) 만족감 혹은 평안함, 즉 특정 감정 상태를 궁극적인 목표로 한다. 이처럼 감정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삶의 방향을 정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기준점이 되곤 한다. 신경 영상 연구 결과를 참고하며, 조금은 과감한 해석을 내린 사람의 입장에서 이러한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정은 미래의 보상과 위험에 관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감정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이 공유되는 현상을 어색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감정은 분명 개인의 뇌에서 발생하는 주관적인 경험임에도 타인과 공유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감정은 모두가 따라야 할 어떤 기준으로서 여겨지기도 한다. 감정은 곧 행동에 강력한 영향을 주는 주관적인 의지, 동기임에도 타인과 공유될 수 있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이 무언가를 해서 행복하다면, 다시 그것을 하려 할 것이고 그것은 그러한 감정을 똑같이 공유할 타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기 때문에 감정은 너와 내가 공동으로 따를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다수가 쾌한 느낌을 나누도록 만들어주는 대상은 ‘선’으로도 여겨지며 사회에서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감정은 마치 우리의 영혼(혹은 정신)이 분리된 신체의 물질세계와 대조되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특정 세계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선사해 준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은 다수의 뇌가 지나치게 사회적이기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즉 우리 뇌는 다른 뇌의 감정 상태에 동조한다. 타인의 행복이나 불행을 보다 생생히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뇌가 타인에게 동조하며, 실제로 비슷한 부위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러한 동조 덕분에 우리는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더 기능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추측을 지지하듯, 우리 뇌는 자신과 같은 무리의 구성원이라고 판단되는 존재에게만 공감하며 사회생활과 생존에 있어서 이득을 챙긴다. 가족, 배우자, 친한 친구에게는 그렇게나 뜨겁게 공감하는 우리지만, 자신과 연결점이 없거나 자신과 차이점이 많다고 느끼는 존재에게는 잘 공감하지 않는다. 한편 이는 각 사회 문화가 여기는 ‘선’이 달라지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즉 공감되는 감정은 영혼 세계가 이어져있다는 증거나 영혼 세계의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무리에게 더 잘 동조하고 더 잘 살기 위해 설계된 뇌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감정이 선이나 절대적인 기준, 영혼이 이어졌다는 증거라는 생각은 모두 뇌를 들여다볼 수 없었던 시기에 생겼던 오해이다. 물리적으로 분리된 두 뇌가 주관적인 감정을 완벽히 똑같은 방식으로 공유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감정과 관련된 온갖 도덕, 미학, 윤리적인 얘기를 생략하고자, 감정이 공유되는 이유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나눴다. 이제 후광이 사라진 감정의 민낯을 살펴보자. 주관적인 정신 경험의 실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실재하는 뇌를 들여다보는 일이 유용하다. 즉 감정의 분명한 원인처럼 보이는 뇌의 활성화 혹은 신경전달물질의 분출을 확인해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역시 앞선 의식에 관한 이야기와 같이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쾌와 불쾌에 관한 이야기의 일부만을 더 지지하고 때문에 일부 가능성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니 이를 유념하길 바란다.      


 우리는 온갖 종류의 감정을 경험한다. 슬픔, 분노, 재미, 흥미, 기쁨, 불안, 두려움 등 다양한 감정이 모두 독립적인 것 같지만 막상 각 감정을 경험하는 뇌를 들여다보면 온갖 종류의 감정을 경험할 때, 매번 편도체 혹은 보상 회로가 공통적으로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해당 두 가지 뇌 부위가 처리하는 정보의 종류를 특정할 수 있다면, 감정의 본질을 더 엄밀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불쾌한 감정을 경험할 때는 주로 편도체가 활성화된다. 이러한 편도체는 주로 위험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한다. 반대로 유쾌한 감정을 경험할 때는 주로 보상 회로가 활성화된다. 보상 회로는 이름과 같이 보상과 관련된 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 되는 여러 뇌 부위를 뜻한다. 즉 감정이란 결국 유쾌하거나 불쾌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은 보상 회로의 활성화와 편도체의 활성화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유쾌함과 불쾌함은 곧 보상 혹은 위험에 관한 정보 처리의 결과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편도체와 보상회로는 더 많은 역할을 하고 그 때문에 편도체가 보상 관련 정보 처리에 활성화될 수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길 수 있다.)     


 편도체와 보상회로에서 하는 정보 처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정의 실체를 더욱 선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동물의 뇌는 보상과 위험에 관한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해야 할까? 생존과 번영을 목표로 하는 동물의 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자신의 행동과 환경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타날 보상 혹은 위험을 성공적으로 예측하는 것이다. 즉 편도체와 보상회로는 앞으로 자신이 할 일 혹은 예상되는 환경의 변화가 어떤 위험과 보상을 가져다줄지 예측하는 일을 한다. 그렇게 만들어진 보상 혹은 위험에 관한 예측은 의사결정 기관에 전달된다. 다양한 신경 영상 연구 결과에 의하면 편도체와 보상회로의 활성화는 보상과 위험을 한 번 더 저울질하고 의사결정을 진행하는 전전두엽피질의 일부가 활성화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처리된 의사결정은 인지되거나 혹은 인지되지 않는 미약한 수준의 감정을 동반하며, 우리 행동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감정이란 결국 우리 뇌 안에서 만들어진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이다. 즉 감정이란 형태의 뇌의 신호를 우리 언어로 번역하자면, “그래 잘 될 거니까 해!” 혹은 “안 돼! 위험이 예상되니까 대비해!”가 되겠다.     





 유쾌함과 불쾌함 모두, 내 안에서 만들어진 미래에 관한 예언이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감정에 충실하고자 하는 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이라는 긍정적인 감정 자체를 삶의 목표로 두고 좇고 싶은 것, 다른 이들과 다른 삶을 살게 될 때 예상되는 기분 나쁨을 피해 남들처럼 살고자 하는 것, 그 무엇을 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기분에 압도되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게 되는 것, 모두 다른 삶의 형태지만 모두 똑같이 의식 밖에서 만들어진 감정에 자동적으로 충실한 결과이다. 우리는 다른 다양한 동물과 같이 뇌가 만든 미래 예측 ‘결과’(의식은 보통 그 예측 ‘과정’에는 잘 접근할 수 없다.)에 집중하고 그것에 충실한 존재이다. 다른 복잡한, 고도의 가치를 좇는 것 같은 이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예술 작품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는 이들이 좇는 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해당 예술 작품 감상 경험을 참고하여 만들어진 미래 예측을 따르는 것이다. 가족의 사랑에서 거대한 가치를 느껴 화목한 가정 구성을 목표로 한다는 이들 역시 가족과 관련된 보상 경험을 반영한 미래 예측에 충실한 것이다. 대부분의 가치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 공부하겠다는 나 역시 불쾌한 실패 경험을 반영한 미래 예측에 충실한 것뿐이다. 이처럼 감정은 예언이자 동기의 역할을 하며, 우리의 다양한 목표에 깊게 관여하고 삶의 방향을 정해준다.     


 어찌 보면 상당히 불쾌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우리 의식은 사실 모든 행동과 정신 활동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또한 자유롭게 나(의식)만의 선택을 이어나가는 줄 알았던 우리 의식은 사실 의식을 제외한 다른 정신 기능이 더 많은 기여를 해서 만든 것만 같은 미래 예측에 충실한 선택을 하고 있었다. 즉 의식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길이란 오직 예측 기능이 만들어낸 예측(감정)의 영향 아래에만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난번과 같이 의식이 주도권을 잡을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즉 우리 의식은 나름 이 미래 예측 과정에 관여해, 자신만의 선택을 만들거나 자신만의 목표를 만들 수 있다. 그 방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감정이 단기 감정과 장기 감정으로 나뉜다는 것, 즉 예측 과정의 영향이 단순히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조금 더 엄밀하게 분리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을 삶의 목표로 한다는 말은 크나큰 성취를 통해 엄청난 크기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것일까? 이루기 쉬운 소소한 행복을 인생에 최대한 많이 배치하고 싶다는 말일까? 혹은 특정 경험을 통해 유쾌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경험이 없더라도 늘 기분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는 것일까? 이처럼 감정은 빈도나 지속성 등 그와 관련된 속성에 따라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더 엄밀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는데 특히 개인적으로는 잠깐 기분 좋음을 느끼는 것과 장기적으로 기분 좋음을 유지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말을 예측과 관련해서 번역하자면, 즉 단기적인 미래 예측에 충실한 것과 더 장기적인 미래에 관한 믿음을 형성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둘을 정확히 구분하기 위해서는 그 둘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단기적인 미래 예측에 충실한 것과 장기적인 믿음을 형성하는 것은 분명 관련이 있다. 우리 뇌가 이전의 예측 경험을 분석하며 다음 예측 경험에 반영하기 위한 정보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학습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토록 어려운 생존과 번영을 잘 이뤄내기 위해서는 예측 방식을 환경에 맞게 조정해 나갈 필요가 있다. 즉 이전의 예측을 실제 결과와 비교하고 평가하며 정보를 습득하고 그것을 다음 예측에 반영할 필요가 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생물의 뇌에서는 그러한 과정, 학습이 일어난다. 따라서 마치 파블로프 실험에서의 개가 처음에는 먹이를 보고 기대감을 분출하다가 학습을 거쳐 종소리만 듣고도 먹이에 관한 기대감을 분출하게 된 것과 같이 학습을 통해 이후의 감정의 출현 장면과 시기가 조정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조정된 조건이 보다 장기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예측이 반복되고 학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파블로프의 연구처럼 ‘먹이’라는 특정 대상과 관련한 예측 방식이 ‘종소리’라는 대상을 추가하며 수정되는 일도 생기지만, 대부분의 경우 학습은 자신과 환경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를 생성하는 것으로 보인다. 셀리그먼의 연구에서 개는 벗어날 수 없는 전기 충격에 가해졌다. 그 전기 충격이 주는 아픔은 이내 위협에 관한 미래 예측에 반영되고 그것을 피하라는 신호가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개는 자신의 예측과 기대로 만든 계획과 달리 실제로는 그 전기 충격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한 일이 반복되며, 개는 전기 충격을 피하려는 시도를 포기했으며 더 나아가 몇몇 강아지는 전기 충격을 벗어날 수 있는 환경으로 옮겨졌음에도 전기 충격을 피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위험 예측 실패의 경험이 쌓이고 학습되는 과정에서 다음 예측에 반영될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정보, 예를 들면 ‘나는 뭘 해도 저 상황을 피할 수 없어. 그러니까 차라리 시도하지 말고 에너지를 아끼자.’와 같은 정보가 형성되었고 해당 정보가 보다 장기적인 영향력을 미친 것 같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단기적인 불쾌함 해소 실패의 반복이 쌓여 장기적인 불쾌함 혹은 장기적인 무기력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학습은 미래 예측의 요소 중 하나인 ‘나 자신’ 혹은 ‘내가 마주할 대부분의 환경’에 관한 정보를 수정함으로써 대부분의 미래 예측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많은 과정을 생략한, 아주 단순한 예를 들면, 보상 관련 예측 성공 경험이 쌓이고 그 성공의 공을 매번 자신의 능력으로 돌린다면, 우리는 어떤 예측을 하던 그 예측을 실행할 나 자신이 출중하니 어차피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다음부터는 그 생각을 반영한 예측을 만들게 될 것이다. 즉 장기적인 기분 좋음, 전반적으로 잘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이 형성될 것이다.      


 그렇다면 매번 감정에 충실하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감정, 즉 예측에 충실한 결과, 오히려 예측과 다른 결과를 마주하게 되면, ‘나 자신’ 혹은 ‘환경’에 관한 비관적인(장기적으로 부정적인) 정보를 생성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예측을 성공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예측은 실제 상황에서 마주하는 예측할 수 없는 변수까지 반영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예측 실패를 마주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도 셀리그먼은 단기적인 예측 성공 여부가 그대로 장기적인 믿음에 반영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예측과 실제 결과의 일치 여부를 비교하고 단순히 그 결과를 바탕으로 정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일치 혹은 불일치의 원인에 관한 해석을 하는 과정을 더해져 이후의 예측에 반영될 정보를 생성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해석하는 과정에 의식적인 개입을 함으로써 장기적인 믿음 형성을 조정할 수 있다고도 설명한다.      


 실제로 감정을 좇아 어떤 시도를 했을 때, 예상과 다른 결과를 마주해도 실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예측을 좇아 어떤 시도를 했을 때, 예상과 같은 결과를 마주해도 그다지 기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셀리그먼은 후속 연구를 진행하며 실패하더라도 그 원인이 자신 밖에 있고 그 실패가 다른 사건과 독립적이기에 실패가 우연이며,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해석하면,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반대로 자신의 성공을 우연으로 보는 이는 성공에도 그다지 만족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셀리그먼은 자신의 실험 결과를 인지행동치료에 반영해 실패 혹은 성공의 결과를 낙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이 낙관적으로 해석하고자 노력하는 일을 반복함으로써 결국 장기적인 믿음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처럼 단기적인 감정과 그 감정에 충실한 결과는 분명 더 장기적인 감정에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는 것은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의식적으로 장기적인 감정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살아간다는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단기적인 예측과 장기적인 믿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혹은 특정 경험에서 얻는 행복과 장기적이고 전반적인 기분 좋음 둘 중에서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삶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있어서 당연히 후자가 더 중요할 것이다. 삶을 경험하고 또 때로는 이끌어가는 주체인 의식은 매번 우리 안에서 만들어지는 예측만 충실히 따라가는 것처럼 보인다. 즉 의식의 삶의 목표이자 방향은 오직 예측 기능의 예언처럼 보인다. 그러나 삶을 더 나은 경험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단순히 보상과 위험을 처리하는 예측자의 예언과 그것을 받아들인 의사결정자의 지시에만 충실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식은 장기적인 믿음 형성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삶을 더 나은 경험으로 만든다는 자신만의 목표를 갖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의식이 그렇게 예측 기능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이 단순히 예측 기능이 준 길만 따라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예측 과정을 다루는 이후의 글에서 이에 관해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긴 시간, 우리는 뇌에서 만들어지는 신체 혹은 환경 통제에 관한 정보,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 정보, 사회적인 정보를 의심 없이 맹신하며 생존해 왔다. 그러한 경향 자체는 분명 긴 시간 우리 생존에 기여한 공이 있지만, 뇌에 관한 정확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그 경향을 향한 다양한 의식적인 해석을 하고 또 그 내용을 공유하게 되면서 수많은 오해가 만들어졌다. 그러한 오해 중 일부는 우리가 불확실성, 미래, 삶을 통제해 낼 수 있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러한 오해는 삶에 관한 오해를 만들고 결과적으로 불가능한 목표를 좇게 만들어 삶의 목표를 좇는 과정을 방해하게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이러한 추측을 검증하고자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 정보에 관해 알아보았다. 우리 생각과 행동에 큰 영향을 주는 감정은 미래 보상과 위험에 관한 예측이다. 우리를 조종하는 동기의 실체는 합리적이거나 더 상위의 세계에서 내려오는 답이 아니라 우리 뇌 안에서 만들어지는 미래 예측이다. 즉 우리가 단순히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사실 뇌 안에서는 예측 기능이 예측을 만들고 “미래가 이 예측과 같이 될 거야!” 라며 강렬히 외치는 일이 생긴다. 그리고 의식을 포함한 나머지 뇌 기능이 그 외침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자신이 할 일에 반영한다. 이와 같이 매번 미래를 통제해 낼 수 있다는 정보를 경험하고 그것을 믿는 우리이기에 미래를 통제할 무언가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비합리적인 추측을 만드는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우리가 좇는 대부분의 것이 결국 뇌의 미래 예측과 관련 있다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의식은 마치 이 예측에만 충실한, 어찌 보면 한 가지 삶 밖의 선택할 수 없는 존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예측 기능이 만든 동기에 장기적인 영향을 줄 방법이 분명 존재한다. 셀리그먼의 설명양식 이론과 같이 예측 기능은 자신의 예측을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 다음 예측에 보다 장기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데, 우리는 의식적으로 이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의식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고를 자유를 완벽히 잃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 글에서는 우리 뇌가 민감하게 다루는 또 다른 정보, 사회적인 정보에 관해 얘기해 볼 것이다. 사회적인 정보에 관한 맹신, 즉 동조 경향이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 목표를 좇도록 만드는지에 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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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ridge KC, Robinson TE, Aldridge JW. (2009) Dissecting components of reward: 'liking', 'wanting', and learning. Curr Opin Pharmacol. ;9(1):65-73. doi: 10.1016/j.coph.2008.12.014. Epub 2009 Jan 21. PMID: 19162544; PMCID: PMC2756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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