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에 빠진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
구체적인 이야기를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당부의 말을 하고 싶다. 이 글은 자신이 좇고 있는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의심과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 역시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심을 하는 이들을 위해 쓰였다. 글에는 그 의심을 검증하기 위한 과정과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담겼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의심 없이 좇던 여러 가치를 어색하게 바라보고 부정하거나 분해하며 재구축하는 과정을 거친다.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 내내 의지할 것이 없어 혼란스러웠고 또 그 과정을 위해 적지 않은 양의 노력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따라서 그러한 과정이 필요 없는, 걱정 없이 잘 살고 있는 이들이라면 굳이 그 과정과 고생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의 글은 오직 그러할 필요가 있는, 충분한 동기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다. 그러한 동기가 없는 독자가 이어서 글을 읽을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겠지만, 앞으로의 글이 특정한 믿음, 삶의 의미, 목표를 강요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읽어주면 글을 오해 없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당부는 여기까지이다.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늙어보니 모든 게 헛되다는 담임선생님과 솔로몬 왕의 한탄을 듣고 미래에 관한 지독한 불안에 빠진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 헛됨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좇았던 것보다 더 우월한 것을 좇으며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된다면, 엄청난 만족으로 노쇠함과 끝이 주는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는 삶을 그들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이유로 지난 삶의 보람보다는 쌓인 후회와 끝이 주는 허망함에 더 무게를 두고 삶을 평가했다. 그들과 달리 삶의 보람, 사는 것 그 자체의 감사함에만 집중할 수 있다면, 그들과 같은 후회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약 더 우월한 의미 혹은 목표란 것이 정말로 존재하고 때문에 그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여지가 진짜로 있다면, 더 우월한 의미를 좇는 일을 포기하고 두 번째 선택지를 따라 낙관적인 생각에만 빠져 있는 것은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는 것과 같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선은 첫 번째 선택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솔로몬 왕과 같은 후회를 남기지 않게 만들어줄 대단한 삶의 목표 혹은 의미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삶의 목표라는 모호한 표현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좇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그 구체적인 형상을 천천히 추적해 보자.
삶의 목표의 실체를 파악할 단서 중 하나는 그 영광의 자리가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삶은 이정표가 없는데, 불확실하기까지 하다. 거기에 주어진 시간까지 제한적이다. 아마 이러한 악조건 때문에 가장 우월한 것을 찾아 오직 그것 하나만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삶의 목표 혹은 의미란,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불확실성이 주는 실패와 이정표의 부재가 주는 방황을 최대한으로 보상해 주는 무언가로 여겨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가장 우월한 것을 좇으며 최대한의 보상을 받다 보면 분명 끝에 다다랐을 때, 허무함을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우월해 보이는 하나의 답을 삶의 목표로서 추구한다. 그렇지만, 처음 추구하게 된 목표에서부터 만족스러운 결과를 마주한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미숙한 상태였기 때문에 대부분이 필연적으로 실패를 겪게 되고 다시 새로운 목표를 찾게 된다. 이 쉽지 않은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이라면 아마 더 많은 실패를 겪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좇던 목표를 검토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에 관해 생각해 보는 일을 더 많이 겪었을 것이다. 즉 실패를 반복하며 자신이 좇아야 할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랬다. 목표를 좇다가 실패하고 새롭게 목표를 선정하는 일을 반복하며 가장 우월한 목표의 후보를 줄이면서 가장 우월한 목표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을 함께 하며 우리가 좇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보자.
처음에는 단순히 가장 거대해 보이는 보상을 좇았다. 성공하면 그 성취감과 부와 명예가 끝없어 보이는 거대한 보상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성공을 좇아 치열한 경쟁 한복판에 놓이고 나니,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친구나 가족과 보내는 소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이 희생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이가 들수록 성장하는 현실감각에 맞춰 목표로 했던 성공의 기댓값이 조정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성공을 위해서는 낮은 확률, 다르게 말하자면 높은 위험을 감수하며 일상의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혹시나 이 치열함 끝에 성공을 얻지 못한다면 후회가 넘치는 마지막을 마주하는 것은 확실해 보였고 또 성공을 얻었다고 해도 희생시킨 일상에 관한 후회가 그 만족감을 넘어 나 역시도 헛되다는 말을 남기게 될 것 같았다. 성공을 좇는 과정에서의 실패는 이러한 의심을 쑥쑥 키웠고 결국 다른 목표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가장 안전해 보이는 길을 걸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형태, 평범한 삶을 추구하면 성공에 비해 적은 위험과 비용을 감수하며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대다수가 수도권에 살며, 적절한 시기에 맞춰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가 내 집에서 늙어가는 그러한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해야만 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선택의 시기가 다가오니 또다시 위험과 비용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삶을 좇아 살기 위해서는 서둘러 괜찮은 곳에 취직해 커리어 관리를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져 있었다. 입시에 실패해 차선으로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었는데, 해당 전공을 살려 일하기는 싫었다. 평범한 삶의 괘도에 진입하기 위해 이대로 졸업하고 취직하면, 평생 만족스럽지 않은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 끝에 결국 졸업을 미뤘고 다른 목표를 찾게 되었다.
두 가지 실패를 겪으며 물질적인 것에만 너무 집중한 것 혹은 타인의 시선, 기준에만 충실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해석했다. 그 둘에 충실한 결과 어떻게 보면 그 둘보다 더 큰 가치를 가졌을지도 모르는 일상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과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며 느껴지는 만족을 간과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 자신을 위한 만족감, 행복을 삶의 목표로서 추구하기로 했다. 그런데 행복을 추구하는 것 또한 문제가 많았다. 회의적인 것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어느 한 철학자가 말한 것과 같이 행복은 마치 허상과 같았다.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일상 속에 행복을 느꼈던 경험을 최대한 많이 배치해 봤지만, 의도와 다른 결과를 마주해야 했다. 재미있어서 반복하게 된 어떤 일은 갑자기 어느 날부터 지루해졌고, 친구와의 약속이 취소되자 오히려 불쾌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행복을 느끼고자 하게 된 게임이나 음주는 가끔 일상과 건강을 망쳤다. 그러한 경험을 반복하며, 이대로 행복을 추구하다 보면 담임선생님이나 솔로몬 왕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매번 큰 기대를 갖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했지만,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났다. 목표를 추구하는 동안 장애물은 수많은 후회를 남길 것이 확실해 보였다. 때문에 그대로 해당 목표를 추구했다가는 삶의 후반기에 만족보다는 후회를 곱씹게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래서 결국 필요한 것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최대한 통제해 낼 수 있는 무언가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런데 그 무언가를 추구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는 불확실성을 통제한다는 말이 실천 가능한 목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전부터 늘 미래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진리와 같은 개념이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하며 그것이 분명 미래를 통제할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리는 시간의 경과를 포함한 온갖 변수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실을 뜻한다. 온갖 불확실성이 넘쳐나는 미래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을 무언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내고 활용할 수 있다면 기존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성능을 가진 미래 예측 공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존재에 관한 추측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했는데 아직 그 누구도 완벽히 미래를 예측하지는 못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정리해 보자. 이 모든 여정의 시작은 솔로몬 왕과 달리, 삶에 후회보다 만족을 더 많이 남길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살아갈 구체적인 방법이란 결국 삶의 목표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에 그 방법을 찾고자 여러 삶의 목표를 시도했다. 그러나 시도해 본 삶의 목표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 어떤 목표도 이 불확실한 삶을 완벽히 통제해 계획한 만큼의 만족을 보장해 주고 계획한 만큼의 후회를 퇴치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미래, 불확실성을 통제할 존재를 추구하면 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런 존재, 진리는 있다고 추측만 될 뿐,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에 추구할 방법이 없다. 결국 맨 처음으로 돌아온다. 어쩌면 솔로몬 왕보다 더 큰 만족을 누리고 후회를 퇴치할, 더 우월한 삶의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
이와 같이 삶의 목표에 관한 잘못된 접근 방식, 우리가 갖는 기본적인 한계를 마주하고 나서도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불확실성을 통제할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러한 추측이 합리적인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특히 삶에 관한 고민을 이어나가며, 불확실성을 극복할 것이라는 발칙한 결론을 내린 주체의 합리성을 검증해 볼 것이다. 의식은 합리적인 판단 하에 세상의 불확실성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을 후회보다 만족감으로 채울 방법이 실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혹시 어떤 편향된 경향을 갖고 있어서 그러한 발칙한 상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철썩 같이 믿는 것은 아닐까? 다음 글에서는 우리가 믿고 따를 삶의 목표를 만드는 의식에 관해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