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영혼과 삶의 의미에 관하여

영혼이 없다면, 삶의 정복도 없다.

by 수민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왜 그것을 좇고 있는 것일까?”

뭔가 이상했다. 너무나 당연히도, 더 괜찮은 삶의 의미를 찾아 산다면 후회 없이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삶의 방식과 후회의 부재, 만족의 만연 사이의 거리는 크다. 살아가는 방식에 상관없이, 만족이나 후회는 의도 밖에서 나타나는 사건에 더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의미나 목표를 설정하고 좇는 것은 분명 살아가는 방식을 정해주지만, 우리 삶은 여러 가지 우연과 불확실성이 겹쳐 초기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모양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대단한 의미를 좇는다고 꼭 만족이 넘치는 삶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의미나 목표를 갖는 것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 삶을 다른 방식으로, 예를 들면 만족을 더하고 후회를 빼는 낙관적인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목표나 의미는 보통 좇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의미를 좇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상태를 만족과는 먼, 결핍 상태로 바라본다. 삶의 의미란 이뤄야 할 대상이기에, 지금 자신의 삶 속에 그 의미나 목표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손에 넣어야만 삶이 온전해진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삶의 의미는 목표이자 삶의 길잡이이며, 동기가 된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은 불완전한 자신의 삶이 온전해지는 순간을 꿈꾸며 삶의 의미를 좇는다. 그러니까 좇는 삶의 의미가 존재하며, 그 과정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러한 사실을 돌아보면, 삶의 의미란 결국 엄청난 보물과 같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손에 넣기만 하면, 이후의 삶이 탄탄대로가 되는, 혹은 최소한 지금까지의 고난과 역경을 모두 보상받을 수 있는 무언가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의미나 목표를 좇아도 불확실성 때문에 그 과정까지 만족으로 가득 찰 순 없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면서도 삶의 의미를 좇는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의미를 손에 넣었다고 딱히 세상이 바뀌는 것도 아닌데, 왜 세상과 상호작용 하는 우리의 삶이 만족으로 넘쳐날 수 있는 것일까?


삶의 의미를 손에 넣는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불확실성으로 인한 예측 밖의 일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예측 빗나갔다는 사실에서 나오는 불쾌함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의미가 있는 온전한 삶이기 때문에 예측 밖의 일을 마주하면서도 더 낙관적으로 생각할 수는 있다. 조금 더 과장해서 생각해 보면, 더 이상 그러한 불확실성에 딱히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마치 고타마 싯다르타가 수행 끝에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운 부처가 되었듯이 말이다. 이러한 논리라면 결국 삶의 의미란, 정신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무언가이다.


심리학에서 그러한 정신 변화를 일으킬 방법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방법은 삶의 의미를 좇는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셀리그먼의 낙관주의 사고방식을 인지행동치료 방식으로 훈련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고방식이 변화하는 마법 같은 일은 깨달음이나 의미, 목표의 성취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식으로 반복 훈련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과 달리 너무나 오랜 기간, 우리는 삶의 의미의 성취가 우리 삶, 특히 그것을 수용하는 우리 내면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무언가라고 여겨졌다. 어째서 우리는 사실과 먼 생각을 너무나 긴 기간 믿어온 것일까?


그 원인을 알기 위해, 그러한 믿음이 어떤 믿음에 영향받으며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해 보자. 이 사실과 다른 믿음은 우리 내면이 무언가에 도달하게 되면서 성장 혹은 완전해진다는 믿음으로부터 왔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가보면, 신체와 분리되어 성장하는 내면에 관한 상상은 모두 신체와 분리된 정신체, 즉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뿌리로 둔다. 이 영혼에 관한 상상은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는 정신 경험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 신체와 분명 분리된 것만 같은 경험은 영혼이란 존재를 상상하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자신이 신체와 분리되는 영혼이라는 지각이 생긴 옛사람들은 감정과 동조를 경험하며 자신의 영혼이 도달해야 할 바가 존재한다고 상상했다. 몇몇 옛사람들에 의해 이 초자연적인 경험과 상상을 구체적인 세계관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반복되며, 영혼과 영혼이 추구하는 바가 만나면 완전한 상태의 영혼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 사상은 오랜 기간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었고 그 결과, 너무나 당연한 존재가 되어 우리의 다양한 생각에 침투해 있다. 결국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현대에서도 내면의 성장, 완전한 의식과 같은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 완전한 영혼과 다를 바가 없는 개념이 활용된다.


삶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삶의 의미를 이루면 온전한 삶을 살게 된다거나, 후회 없이 만족만이 넘쳐나는 삶이 완성된다는 생각 역시 영혼이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와 만나 완전한 영혼이 되고 영혼이 조종하는 신체의 삶 또한 완전해진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왔다. 이번 글에서는 지금까지 다뤄온 다양한 개념을 통해서 이러한 추측을 검증해 볼 것이다. 영혼의 단서가 되는 초자연적인 경험이 물질적인 뇌만으로도 충분히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영혼과 그것으로부터 파생한 다양한 생각을 반박해 볼 것이다. 그리고 영혼에 관한 이론과 삶의 의미에 관한 이론 사이의 연결점을 찾아 삶의 의미에 관한 생각 역시 사실이 아닌, 영혼의 개념으로부터 파생한 하나의 생각이기 때문에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를 해볼 것이다.




먼저 영혼이란 무엇일까? 어렸을 적 어느 만화에서 본 것과 같이, 태어나면서 신체라는 틀에 영혼이 들어가고 죽은 뒤 영혼이 신체에서 빠져나와 물리적인 세계를 벗어나 다시 정신적인 영혼의 세계로 돌아가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그러한 상상에 의하면 영혼이란, 물질적이지 않음에도 물질적인 신체를 지배하는 무언가 이다. 이 비과학적인 만화에 아이들과 몇몇 어른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분명 그러한 만화, 상상의 근거가 될 만한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영혼이 우리 신체를 지배한다는 의식적인 추론은 기억, 인지, 집중, 정보 가공, 신체 소유 감각, 운동 통제 감각과 같은 정신 기능의 경험을 근거로 한다. 즉 반대로 영혼의 실체는 해당 뇌 기능의 인지의 합이다. 우리는 하나의 정신이 정보를 주도적으로 선별해 받아들이고, 해당 정보를 가공해 의사결정하며, 정신이 소유한 신체에 그 의사결정을 전달해 신체의 움직임을 통제해 낸 경험을 근거로 이러한 정신이 신체와 구별되면서 신체를 조종하는 영혼과 같은 존재일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신체와 구분되는 정신적인 무언가가 신체 내부에 갇혀 있으면서 물리적인 신체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조건이 요구되는데, 놀랍게도 우리는 그 조건을 모두 충족해 내는 것만 같은 존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마법 같은 일의 주체가 뇌(신체)라는 한계가 있어 보이는 존재가 아닌 영혼이라는 한계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기 위해, 영혼을 추측하게 만드는 다양한 정신 기능을 파헤쳐보자.


먼저 이 모든 일은 정보가 반사적으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란 곳에 일정 시간 이상 머무르는 현상에서부터 시작된다.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온 정보는 뇌에서 바로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정 이상 의식이란 공간에 머무른다. 이 때문에 우리는 외부 감각 정보를 긴 시간 음미하며, 그 정보에 관한 해석을 만들고 그 해석을 반영한 반응을 하는 존재가 된다. 즉 정보에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있는 존재가 된다. 이해를 위해 반대로 이러한 의식이란 공간과 주관적인 경험과 해석이 없는 존재를 상상해 보자. 그러한 존재는 외부 충격에 반응해, 바로 위험에 관한 회피나 투쟁이라는 행동을 반사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부 충격이 주어졌을 때, 그 정보를 경험하고 아파하는 반응을 먼저 보이며, 그다음 회피나 투쟁이라는 행동을 할 것이다. 이러한 의식 혹은 마음이 정확히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기능을 경험하며 우리는 정보에 필요 이상으로 반응하는, 신체와 구별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추측을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마음이 신체에서 주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수용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신체로부터 전해지는 정보에 관한 선택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의식, 마음은 집중이라는 정신 기능을 통해서 감각기관이 수용하는 다양한 정보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수용할 수 있다. 이 특별한 기능, 경험 때문에 마음, 의식은 자신을 둘러싼 신체에 무조건적인 영향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나름의 자율권이 보장된 존재처럼 느껴지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은 이렇게 선택한 정보를 가공하는 경험을 한다. 자신이 직접 선택해 활성화시킨 정보를 조합해서 자신만의 의견을 만든다. 그리고 가끔은 그 의견을 따라 행동과 생각이 변화하도록 의견을 활성화시킨다. 이처럼 마음이 정보를 가공하며, 추론을 만들거나 의사결정을 진행한 경험 때문에 우리 마음은 자율권이 보장된 존재를 넘어 신체가 나아갈 바에 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인다.


기억은 이 의식, 마음 혹은 영혼이라는 존재를 하나의 존재처럼 보이게 만든다. 마음, 의식은 비활성화와 활성화를 오고 간다. 최소한 잠을 자는 동안에는 비활성화가 되는데,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활성화된 의식이 이전에 활성화되었던 의식과 같은 존재라는 확신을 갖는다. 바로 기억이란 정신 기능 때문이다. 우리 의식은 자신이 처리한 정보를 압축해 의식 밖 어딘가에 저장하고 그것을 필요에 따라 꺼내볼 수 있다. 또 이전의 경험이 의식의 정보 처리 경향을 편향시키고 그러한 편향이 다음 정보처리에 반영되기도 한다. 즉 학습이 이루어지고 때문에 인과를 추적할 수 있는 변화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기억과 학습은 현재 활성화된 의식, 마음이 이전의 것과 동일한 존재라는 믿음의 근거가 된다. 예를 들어 오랜만에 먹는 집 밥을 한 술 뜰 때, 머릿속에 펼쳐지는 어렸을 적 기억과 벅차오름은 기억 속 반찬 투정하는 어린아이와 지금의 내가 같은 존재라는 믿음을 갖도록 만든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과거 기억은 미래 계획에 활용되며, 미래의 나 역시 과거 혹은 지금의 나와 같은 존재가 되도록 몰아가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처럼 의식적인 경험, 집중, 의식적인 정보 처리, 기억과 같은 정신 경험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신체에 신체가 수용한 정보를 선택하고 처리하는 하나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혹은 자신이 신체에 깃든 그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기에 신체 소유 감각과 운동 통제 감각이 더해지며, 정신이 신체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상위의 존재와 같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우선 우리는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의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경험을 한다. 정신은 굳이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속한 신체가 어떤 모습이며, 각각의 부위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생각해 보면, 신체 안에 들어가 있는 정신, 영혼이 각 신체의 부위가 어디에 위치해야 하는지, 매번 별 다른 노력 없이도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정신이 신체에 들어간 것과 같이 차에 탑승할 수는 있으나, 차에 탑승한 상태에서 차의 외부를 이루는 부품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순 없다. 그에 비해 신체에 탑승한 영혼은 별 노력 없이도 신체 부품을 인지하는데, 우리는 그 때문에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뿐만 아니라 정신은 신체에 가해지는 자극을 실시간으로 똑같이 경험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체에 간지러움이 가해지면 마음이 간지러움을 경험하고, 신체에 약한 충격이 가해지면 마음도 약한 고통을 경험하며, 신체에 강한 충격이 가해지면 마음도 강한 고통을 경험한다. 이처럼 신체가 받아들인 자극이 유사한 형태로 마음에게 경험된다는 것 또한 신기한 일이다. 다시 차로 비유하자면, 우리가 탑승한 차가 일정하게 느린 속도로 달리다가, 부드러운 곳에 부딪혀 파손이 없는 경우와 같은 속도로 부딪혔지만 딱딱한 곳에 부딪혀 파손이 큰 경우를 상상해 보자. 만약 차가 그 충격을 경험할 수 있다면, 차는 같은 속도여도 부드러운 곳에 부딪혔을 때보다 딱딱한 곳에 부딪혔을 때 훨씬 아팠을 것이고 그 차이는 파손 차이로 나타난다. 그러나 탑승자인 우리가 느끼는 감각은 차가 경험하는 것과 달리 둘 모두 비슷한 수준의 진동일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영혼은 차에 탑승한 우리와 달리, 신체가 받은 충격을 거의 있는 그대로 경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고 결론짓는다. 이처럼 우리는 정신이 신체 부위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놀라운 경험, 정신과 신체가 감각을 공유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며, 그 둘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놀라운 일이 생겨날 수 있다는 추측을 하게 된다. 이러한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정신이 곧 ‘나’라는 관점에서는 정신과 신체를 동등한 관점에서 연결되었다고 보기보단, 신체는 곧 나(정신)와 연결된 나(정신)의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러한 연결 감각은 소유 감각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정말로 초자연적인 영혼의 능력 때문에 신체에 관한 정보가 자동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아니다. 유명한 고무손 실험의 실험 결과에 의하면, 신체를 소유한다는 느낌의 정체는 단순히 특정 정보의 합으로 만들어진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연구 가설에 의하면, 뇌에는 신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에 관한 지도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매번 감각정보를 통해 들어오는 해당 신체에 관련된 정보로 그 지도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신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다는 정보를 생산한다. 고무손 실험은 그 정보를 교란시키는 방법에 관한 실험이다. 실험에서는 진짜 손이 보이지 않도록 칸막이로 가리고 진짜 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으며 시야에 닿는, 진짜 손이 있을 만한 장소에 고무손을 놓는다. 그리고 그 피실험자에게 고무손을 바라보도록 요청한 다음 연구자는 진짜 손과 가짜 손을 동시에 간지럽히는 일을 반복한다. 이러한 일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피실험자는 고무손만 간지럽혀도 촉감을 느끼게 된다. 이 실험 결과를 해석하자면, 시각과 촉각 정보가 교란당하며, 해당 감각 정보를 수용해 신체 지도를 검증하는 뇌 기능이 교란당한 정보(가짜 손)를 기준으로 신체 정보를 최신화하도록 요청했고, 그 요청이 반복되며 결국 뇌에 있는 신체 지도가 수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새롭게 바뀐 지도를 기준으로 인지 되는 촉감 정보를 생산하게 된 것이다. 옛사람들은 영혼이 노력 없이도 신체 구석구석의 정보를 파악해 내는 경험을 통해, 영혼이 신체를 소유하며 그 둘이 연결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우리 예상과 달리 의식 밖 뇌에서 신체를 파악하기 위해 매번 신체 지도를 그리고 그것을 감각 정보와 비교하는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체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일은 영혼의 전능함 때문이 아니라, 조용히 노력하는 뇌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다.


또 이러한 연구 결과는 눈이 수용한 2차원 시각 정보가 뇌의 정보 처리를 거쳐, 결과적으로 의식에게는 3차원 시각 정보로서 전달되는 것과 같이, 피부가 수용한 정보 또한 뇌의 정보 처리를 거치고 난 후 의식에게 인지되는 형태의 간지럼으로 가공되어 전달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즉 우리 신체가 수용한 촉감은 뇌에서 가공되어 인지된다. 신체의 경험과 정신의 경험은 엄밀히 따지자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가 간지러워서 간지럼이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에서 전달한 자극에 관한 정보가 뇌에서 간지럼이라고 해석되면서 간지럼이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근거 중 하나가 자기 자신을 간지럽힐 수 없는 현상이다. 분명 상대방이 간지럽힐 때와 똑같은 부위를 똑같은 강도로 자극 준다고 해도, 그 행위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면, 상대방이 간지럽힐 때와 달리 간지럼이 느껴지지 않는다. 두 가지 자극이 신체에 주는 충격은 똑같음에도 마음의 경험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경험하는 촉감이 신체가 경험한 것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해석을 추가해 가공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정신과 신체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매우 놀랍고 때문에 정신이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추측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는 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여러 연구를 통해 영혼의 존재 없이 신체에 종속된 신경과 뇌 기능만으로도 이러한 일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시 영혼을 구성하는 경험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영혼의 존재를 더 생생하게 만들어주는 마지막 다른 요소는 움직임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이다. 우리는 설명하기에 매우 복잡한, 그래서 초자연적인 현상인 것만 같은, 정신이 신체의 움직임을 통제한다는 경험을 한다. 이러한 경험은 앞선 신체 소유에 관한 감각과 합쳐져 우리 정신이 단순히 그 신체를 소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신체의 활용에 관한 통제권까지 갖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감각은 마음이 뇌에서부터 움직임의 통제가 시작되었다는 정황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작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게 포착된 정황에 뇌의 결론만 말하는 소통 방식과 필요할 때만 발동되는 과정에 관한 엉성한 추리력이 더해지며, 마음이 움직임의 통제자라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구체적으로 의식은 움직임이 이루어지기 전 우리 뇌에서 해당 움직임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인지할 수 있고, 해당 움직임이 이루어진 후에 그것이 예상과 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은 움직임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처음 만들어내는 뇌 부위로부터 그러한 의사결정을 한 이유는 전달받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뇌는 서로를 하나의 존재로 보기 때문에 굳이 그러한 의도를 세세하게 설명하며, 서로를 엄밀히 설득하는 복잡한 과정을 생략하는 것 같다. 이처럼 처음 그러한 의사결정을 한 이유에 관한 정보를 나누거나 저장하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굳이 그 이유를 인지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뒤늦게 해당 시점에서 접근 가능한 정보만 사용해서 그 이유를 추측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는 가끔 첫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다. 즉 보통 뇌에게 움직임의 주체를 뇌 안에서 엄밀히 찾아내는 일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반대로 뇌에게 움직임을 만들어낸 뇌 부위를 굳이 찾아내는 의식적인 활동은 익숙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자신이 접근 가능한 여러 정황을 통해 우리 마음이 신체의 통제자라는 엉성한 추측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신경 과학자 Ramachandran이 연구한, 자신의 마비를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가 이러한 뇌의 작동 방식을 조금 더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Ranmachandran은 왼쪽 신체가 마비되었지만, 해당 마비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를 연구했다. 해당 연구에서는 환자에게 마비된 왼손의 사용을 직접적으로 요구해 봤는데, 그럴 때마다 환자는 왼손을 사용할 수는 있지만 사용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과 다른 주장을 했다. 환자들 중 일부와는 면담을 하며 왼손 사용을 끈질기게 요구했는데, 한 번은 피험자가 그 끈질긴 요구 끝에 왼손을 가리키며 그 손이 자신의 아들의 손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고 답하였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해석해, 앞선 뇌의 작동 방식에 관한 가설을 지지해 보자면, 환자의 운동 관련 뇌 기능은 일단 “왼 손을 안 움직일 거야!”라는 주장을 퍼뜨렸을 것이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를 원하는 요구에 반응하는 논리 형성 기능은 해당 주장을 다시 검토하며 그러한 주장을 지지할 근거를 형성하고자 접근 가능한 정보를 취합했다. 그러나 해당 환자의 뇌는 자신의 마비를 정상적으로 인지하는 사람과 달리, 자신의 마비와 관련된 정보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결과, 자신의 마비 사실만을 깔끔하게 외면한, 엉뚱한 의견을 제시하게 된 것이다.


앞선 글에서 다뤘던 Persaud, N., McLeod, P., & Cowey, A. 의 논문에서는 일반적인 사람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뇌가 작동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해당 논문에서는 의식적으로 그 규칙을 바로 파악하기 어려운 게임을 반복하다 보면 실패나 성공의 경험이 암묵적으로 학습되어 결국 일정 반복 횟수부터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한 선택을 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게 이기게 되었음에도 그 게임을 한참을 더 반복해야 의식적으로 게임의 규칙을 파악해 자신이 왜 이기는지에 관한 설명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성공과 실패 경험을 학습해, 게임을 이기기 위한 선택지를 주장하는 뇌 기능 역시 이유를 설명하지 않고 골라야 할 선택지에 관한 주장만 하고 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즉 결정하고 행동하는 기능과 그 결정과 행동에 관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만들어내는 기능은 분리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뇌에 관한 두 가지 가설을 만들 수 있다. 첫째, 뇌는 자신의 내부를 들쑤시며 특정 주장의 시작 지점을 찾고 그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둘째, 필요로 인해 뇌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 추측할 때에는 오직 해당 시점에서 접근 가능한 정보만을 활용해 추측한다. 결국 이 때문에 우리는 행동 명령이 처음 만들어진 부위와 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양한 정보가 모인 의식 혹은 마음이 그 명령을 처음 만든, 행동의 통제자라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즉 실제 신체 통제를 위해서 의식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고려하지도 않고 느껴지는 대리감과 여러 정보만으로 영혼(의식)이 신체를 통제했다는 엉성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정신적인 한 공간에 신체에서 오는 정보 중 일부를 선택해 붙잡아두고 그것을 가공해 행동이나 생각에 반영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정신 공간은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오고 감에도 데이터가 쌓이고 그것을 다시 인지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주체가 하나의 존재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정신 공간, 존재에게는 의도하지 않아도 신체에 관한 정보가 알아서 전달되고 더 나아가 움직임의 통제와 관련된 정보도 알아서 쌓인다. 때문에 마치 신체의 소유자이자 움직임의 통제자와 같이 느껴진다. 결국 영혼은 소유한 신체를 조종해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누리는 신체의 지배자처럼 보이게 된다. 마치 신체라는 기계에 탑승한 조종자와 같게 느껴진다.


그러나 소유감과 대리감을 설명하면서 얘기했듯 이러한 감각은 신체를 초월한 존재의 초자연적인 능력의 결과가 아니다. 소유감과 대리감은 신체 위치 정보와 움직임 의도, 예측에 관한 정보가 오고 간 결과이며, 해당 정보를 가공하는 데 있어서 뇌의 능숙하지 못한 추측 실력이 더해져, 해당 정보가 소유의 증거, 통제의 증거로 부풀려지며 생긴 결과이다. 기억, 의식적인 정보 인지 및 처리 역시 영혼이라는 정신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뇌라는 물질적인 실체에 종속된 기능이다. 특히 물질적인 뇌의 손상이 영혼의 기능이자 증거처럼 보였던 기억, 정보 처리 등에 영향을 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를 통해 우리는 그러한 정신 활동이 영혼이라는 정신체가 아닌 뇌라는 물질에 종속되어 있다고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즉 영혼의 증거로서 여겨졌던 정신 활동이, 뇌라는 실체의 일부 손상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영혼(혹은 정신 활동)이 신체와 완전히 분리된 무언가가 아니라 신체에 종속된, 뇌에 묶인 무언가라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애초에 영혼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을 전제하며, 쌓아 올린 대부분의 논리 역시도 과학적인 사실과 다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영혼 세계와 그것을 가기 위한 방법에 관한 논리가 그러하다. 영혼이 추구할 바 혹은 영혼 세계에 관한 얘기를 이어나가고자 잠시 영혼에 관한 과학적인 해석은 잊고, 다시 영혼을 믿었던 조상을 상상해 보자. 영혼의 초자연적인 느낌은 내집단 속 타인의 뇌와 동기화되고자 노력하는 사회적인 뇌가 주는 감각을 통해서 더욱 극대화된다. 서로의 정신적인 경험이 공유되는 마법 같은 경험은 영혼의 존재를 믿는 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영혼이 지금의 물질세계와는 다른 세계 출신일 것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다. 즉 과거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달리,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뇌가 상대방의 뇌를 모방하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 현상을 겪으며 모든 영혼이 특정 대상에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해석했다. 그러한 추측 중 하나가 영혼이 신체에 속하기 전, 같은 가치관을 갖도록 교육받는 공간 같은 것이 있다고 추측이다.


특히 공감과 동조가 의식 밖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생겨났다. 과거 영혼의 존재를 믿던 사람은, 영혼이 신체의 소유자로서 신체에서 오는 모든 정보, 경험을 수용하고 조절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신체에서 오는 경험이란 인과를 분석해 예측 가능한 경험이며 때문에 영혼이 의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고 통제 가능한 경험이라고 여겼다. 예를 들어 맛있음은 특정 음식을 신체가 먹도록 조종해서 얻을 수 있고, 들썩이는 즐거움은 그러한 경험을 주는 음악을 귀가 듣도록 조종하고, 집중하며 얻을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의식 밖에서 일어나는, 인과를 추적할 수 없는 경험은 매우 이질적인 것이었다. 예를 들어 조형물과 그것을 바라보는 다수가 감탄하는 광경을 같이 바라보며, 조형물의 문외한인 나조차도 무언가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끼는 경험은 매우 이질적인 경험이다. 이러한 경험은 신체적 반응이 원인이 되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영혼이 의도해서 만들어낸 경험도 아니기 때문이다. 옛사람들 중 일부는 이러한 놀라운 경험을 하며 영혼이 통제 가능한 신체적 경험과 영혼이 통제 불가능한 경험을 분리해 보고자 노력했다. 특히 신체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인지 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던 영혼이 인지할 수 없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은 신체와 상관없는, 순수한 반응 혹은 경험이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영혼의 반응이라는 모호한 개념에 구체적인 기준과 세계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인과를 추측하기도 어렵고 그 시작을 의도할 수도 없이 생겨나는 정신 경험(감정)은 신체와 상관없는 영혼만의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만의 경험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신체에 들어오고 나가는 영혼이 신체에 속해있지 않은 시기에 무언가를 학습할 장소가 있다는 추측으로 이어졌다. 옛사람들은 그러한 세계를 추측하며, 영혼의 세계, 본질의 세계, 정신의 세계, 선의 세계 등을 상상했다. 또 그 세계 속 영혼이 추구하는 존재를 추측했다. 옛사람들은 진리, 선, 아름다움, 신, 성장, 행복(에우다이모니아) 등의 이름으로 영혼이 추구해야만 하는 존재를 상상하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혼이 그 존재를 좇는 정당한 이유를 상상해 냈다. 특히 감정 경험이 그 이유와 관련된 추측에 근거가 되었다.


생리학적인 관점에서 감정은 곧 생존을 위한 예측이자 다음 생존 행동을 부추기기 위한 동기이다. 이러한 과학적인 사실을 모르는 옛사람들은 마음(영혼)이 쾌한(행복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에 끌리는 이유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해석했다. 옛사람들은 의식 밖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쾌가 그것을 향한 강력한 끌림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돌아보며, 그 경험을 영혼과 연결 지었다. 즉 영혼은 태생적으로 추구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것에 닿게 된다면 영혼의 만족 즉 충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더 나아가 가끔 우리가 느끼는 일시적인 영혼의 충족감은 영혼이 추구하는 무언가의 편린에 닿은 반응이며 언젠가 그 전체에 닿게 되면 영원한 충족감을 경험하며, 완전한 형태의 영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논리 끝에 옛사람들은 이러한 엄청난 느낌에 도달하면 영혼은 더 이상 다른 것을 좇을 필요가 없는 완전해진 형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마땅히 영혼이 좇는 바를 좇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체에 갇힌 우리 영혼이 좇아야 할 대상을 성공적으로 식별해 낼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단서가 되는 것은 쾌한 감정이다.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사상의 시작을 타고 올라가 보면 그 시작은 의식의 통제 밖에서 생겨나는 쾌한 감정의 경험이다. 옛사람들은 그 초자연적인(뇌를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인과를 제대로 추측하기 어려운) 경험을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손에 넣으며 생기는 충족감이라고 해석했다. 따라서 통제 밖에서 나타나는 쾌한 감정을 주는 대상을 추구하면,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하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러한 추측을 통해 하게 되는 활동 중 일부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불러일으키거나, 인간관계를 해쳤다.


즉 영혼을 이끄는, 긍정적인 감정을 추구하는 활동 중 일부는 쾌락을 향한 파괴적인 행동이 되기도 했다. 옛사람은 결과적으로 개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이러한 활동을 막고자 영혼이 좇아야 할 대상을 더 구체화했다. 물론 갑자기 한 현자가 출현하고 깨달음을 공유하며 악한 쾌락 추구 문화를 막게 되고 영혼을 가진 우리가 그것에 동조하게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현실적으로 추측해 보자면, 쾌락 추구 사상을 지닌 집단의 생산성은 낮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해체되거나 흡수당해 그 독자적인 사상을 후대에 전달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쾌락 추구 중심의 사회는 개인의 경험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고 그 결과, 개인 경험보다 다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여기는, 어느 정도의 희생 혹은 양보를 통해 더 강력한 협력을 해낼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쾌락을 중요하게 여긴 집단은 다른 집단에 비해 생산성이 낮아 도태되었을 것이고 그 결과 그들의 사상과 문화가 후대에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떨어진다고 해석할 수 있다.


어쨌든 이 때문에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해 다른 관점을 가진 집단이 살아남고 그들의 사상이 더 오래 퍼졌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영혼이 추구할 바를 더 엄밀하게 나눴다.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대상, 행동을 그 감정을 경험하는 대상에 따라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으로 나눴고, 그 감정을 주는 대상의 특징에 따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나눴으며, 신체 개입 여부에 따라서 신체적인 것과 영혼적인 것으로 나눴다. 그들은 이타적이고, 정신적이며, 영혼적인 대상을 영혼이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으로 봤다. 반대로 긍정적인 감정을 추구하며, 이기적이거나 물질에 집착하거나 신체 반응과 관련된 것을 과도하게 추구하게 되면 집단 전체의 생산성이 낮아지는 등, 그 결과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들은 그러한 경험을 통해 그와는 정반대에 있는 긍정적인 감정이야말로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로 봤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국 그들의 경험을 통한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았다. 이러한 사상은 결과적으로 더 강력한 집단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어떻게 쾌를 주는 특정 대상이 이타적이고 정신적이며 영혼적인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바로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하면 된다. 영혼의 존재를 밝혀내고 영혼이 추구할 바를 밝혀낸, 물질세계를 뛰어넘어 세계의 이면이자 진실을 파헤친, 합리성을 활용하면 된다. 과학이 없던 시대, 이 놀라운 영혼에 관한 통찰 혹은 사상은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그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실 보다 더 놀라운 것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이 영혼 세계에 관한 사실을 그들이 성공적으로 밝혀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사고, 그중에서도 영혼이 해낼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를 마치 보이지 않는 깜깜한 영혼의 세계를 밝혀낼 등불처럼 여겼다. 세상의 진실을 밝혀낸 합리성이라면, 곧 영혼이 좇아야 할 바 역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공부 끝에 세상을 초월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상상은 옛날에도 흔했다.


한편 이렇게 개선된, 영혼이 추구할 바에 관한 사상은 곧 사회적인 동물이 이웃과 잘 지내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누릴 방법이 되기도 했다. 즉 영혼의 충족감을 누릴 방법일 뿐만이 아니라 실제 삶도 개선할 방법이 되기도 했다. 또 해당 사상은 보통 추구할 바를 모호하게 정신적이고 영혼적인 대상으로 정의해 놓고 매번 길을 잃을 때마다 합리성을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결과적으로 문제를 마주한 순간에 반성하며 이성적인 사고를 하도록 유도하고 따라서 개개인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에 관한 사상을 믿는 이들은 실제 삶 역시 개선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하다 보면 물질세계의 삶 역시 개선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로서 진리, 신, 삶의 의미, 아름다움 등 영혼이 완전해지기 위해 좇는 바를 추구하게 되면, 그보다 하등 한 신체의 삶 역시 완전해질 수 있다는 개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러한 개념과 사상은 그런 사상을 믿는 집단이 가장 강력한 집단이 되면서 아주 오래 이어졌고, 때문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지금에서도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사상은 결과적으로 집단을 성장시켰다. 보이지 않는 모호한 개념을 추구하는 사상은 반대로 모호하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이들을 포용할 수 있었다. 또 영혼이 추구해야 하는 바에 관한 이야기는 협력적인 사회 구성원이 되기 위한 지침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상을 믿는 집단에 비해 더 효율적인 협력을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생산성이 개선되었다. 특히 협력이 중요한 농업 사회에서는 이러한 사상이 생산성을 크게 개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와 사상은 그것을 믿고 공유하는 집단과 그 수명을 함께한다. 마치 살아남은 자들의 유전자가 더 멀리 그리고 더 오래 퍼지듯, 문화 역시 그 문화를 믿는 집단이 다른 집단을 흡수하고 살아남으면 더 오래 남고 더 멀리 퍼진다. 따라서 집단의 생산성 개선에 기여한 사상은 그 집단의 수명이 늘어나도록 기여했고 다시 그 영향으로 그 사상의 수명 역시 늘어났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물질적인 삶 이상의 것에 관한 사상이 로마의 기틀이 되고 다시 기독교의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시작 역시 고대 그리스를 공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현대라고 해서 그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심지어 신과 영혼을 부정하며 진화론을 믿는다는 이들 중 일부조차 영혼과 그것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사상을 차용한다. 유전자에 의지가 있고 그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은 생존과 번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은 영혼만의 의지가 있고 그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은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영혼이 유전자로, 영혼이 추구하는 바가 생존과 번식으로 말만 바뀌었을 뿐, 그 뿌리가 되는 생각, 틀은 완전히 같다. 영혼 세계의 인도자인 진리, 신이 단순히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진정으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면 영혼에 관한 믿음으로부터 뻗어 나온, 인간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라는 논리의 틀 자체를 부셔볼 생각을 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삶 이상의 무언가가 있고 그것이 삶을 초월해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어줄 것이란 믿음이 어떻게 만연한가에 관한 가설을 만들어봤다. 그 시작은 뇌이다. 우리 뇌는 다양한 기능을 하고 그 기능과 관련된 정보 중 일부가 의식된다. 의식되는 복잡한 정보와 기능은 뇌의 엉성한 추리실력과 맞물려 마치 영혼이 존재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 영혼에 관한 추측은 또 다른 뇌의 기능인 예측 그리고 동조를 통해 더 생생해진다. 우리 뇌는 다음 생존 활동을 정하고자 매번 예측을 하는데, 그 예측에 관한 정보 중 일부가 감정의 형태로 인지된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형태의 감정 이후에는 그에 맞는 추구 동기 혹은 회피 동기가 생겨나는데, 때문에 감정은 마치 행동의 동기이자, 통제자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경우 그 감정을 주는 대상을 향한 끌림이 함께 느껴지고 곧 그것을 추구하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감정은 마치 행동에 관한 이정표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영혼은 자신만의 이정표를 지닌 존재처럼 여겨지게 된다.


사회적인 뇌는 이러한 이정표를 쉽게도 공유한다. 의식할 수도 없는 사이에 뇌는 마주 본 상대방에게서 많은 단서를 포착해 내고 그 사람이 느꼈을 만한 감정을 모방한다. 그 결과, 신체가 분리되어 있음에도 행동의 이정표가 공유되는 마법 같은 경험이 생겨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단순히 영혼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추구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모든 영혼은 그 존재를 동일하게 추구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추측은 집단마다 다양한 세계관, 사상으로 구체화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집단 구성원의 협력을 이끌어내고 생산성을 개선하는 사상이 해당 집단의 경쟁력을 개선하며 같이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 사상이란 아마, 모든 영혼이 좇아야만 하는 것이란 이타적, 정신적, 영혼적인 가치이며, 그러한 가치를 언젠간 손에 넣게 되면 영혼이 완전해지고 그에 종속된 삶도 완전해질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사상일 것이다.


이 사상은 그 사상을 집단의 수명만큼이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세상, 삶, 인간을 설명하는 다양한 이론에 깊게 스며들었다. 개인적으로 삶의 의미라는 개념에도 스며들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삶의 의미에 관한 개념은 영혼이 추구해야 할 바에 관한 개념과 매우 유사하다. 삶의 의미라는 추상적인 무언가를 찾아내면, 삶이 충만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얻어내면 영혼은 엄청난 충족감을 느끼며 완전해질 것이고 신체의 삶 역시 완전해질 것이란 생각과 닮아있다. 특히 삶이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실제 삶(물질적 삶) 속 불확실성(장애물)이 모두 정복되어야 하는데, 두 사상 모두 추상적인 무언가(삶의 의미,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손에 넣는 것만으로도 이러한 물질적 삶 속 장애물을 완벽히 극복할 수 있다고 여긴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는 삶의 의미에 관한 생각이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생각에서 조금의 변형만 거친, 같은 뿌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래서 반대로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생각이 반박된다면, 삶의 의미에 관한 접근 방식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고 생각한다. 어렴풋이 갖고 있던, 불확실성 통제가 불가능하며 때문에 지금까지의 삶의 의미에 관한 접근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확실히 확인받는 과정이라고 여긴다. 지금까지 긴 얘기를 나눴듯, 영혼에 관한 추측은 모두 영혼이라는 특별한 존재를 가정하지 않아도 물질적인 뇌만으로도 설명된다. 영혼을 가정하고 나온 이후의 다양한 가정 역시 뇌의 기능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따라서 영혼과 영혼이 추구하는 바에 관한 생각은 사실이 아니다.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추구하다가 그것에 닿게 되면 신체의 삶을 초월하게 된다는 믿음도 사실이 아니다. 그러한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발전한, 인간이 추상적인 어떤 가치를 취해 삶을 정복하게 된다는 믿음 역시 잘못되었다.


너무나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결국 의심을 검증했다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삶의 의미, 목표라는 것이 존재하고 진짜로 삶의 불확실성(혹은 그것에 관한 주관적인 반응)을 정복해 낼 수단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남은 삶을 기꺼이 투자할만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를 검증하고자, 그러한 믿음이 생겨난 과정을 추적해 봤다. 그러한 믿음의 뿌리는 영혼과 신체를 분리하고, 그것이 살아가는 세계, 삶을 분리하는 과정을 뿌리로 두고 있었다. 여러 연구 결과를 참고해 뇌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며, 그러한 믿음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확인했다. 또 그럼에도 인간이기에 지금까지 그러한 사실과 다른 믿음을 굳게 믿어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는 것 또한 확인하며, 해당 믿음이 사실과 다름에도 긴 기간 생존할 수 있었던, 이상한 현상 또한 이해했다.


이제 우리는 다시 돌아와 삶에 관한 이야기를 백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실 완전한 백지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제는 버리기로 한, 삶에 관한 잘못된 접근이 그럼에도 분명 어떤 기능을 하긴 했기 때문이다. 삶과 살아갈 방법에 관한 새로운 접근을 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이로웠던 기능을 빼놓을 수는 없다. 때문에 삶에 관한 새로운 접근의 초안을 그리기 위해, 잘못된 접근이었어도 어떤 기능을 해왔는지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이라고 해도 기능을 해왔다면 꼭 폐기할 필요가 있는지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그 얘기를 하기 위해 믿음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하나인, 예측과 학습 과정을 다시 다뤄볼 것이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삶의 의미나 영혼에 관한 믿음이 사실이 아님에도 그렇게나 자연스럽고 굳건하다면, 그 믿음에서 벗어나는 일은 분명 이상한 일이다. 나는 어떻게 이 당연하고도 만연할 수밖에 없는 사상에 의심과 반기를 들게 된 것일까? 추구할 바에 관한 지독한 강박(불안)이 원인일까?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일까? 그랬으면 좋겠지만, 다른 요소 또한 강력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다음에는 그러한 믿음이 깨지고 의심이 생겨나는 과정에 관해서 얘기하고자 한다. 즉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삶에 관한 의문을 부추긴 여러 요소, 특히 사회의 변화로 인한 요소에 관해 얘기하며, 이 고민이 개인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Dennett, D. (2001). Are we explaining consciousness yet?. Cognition, 79(1-2), 221-237.

Earl B. (2014). The biological function of consciousness. Frontiers in psychology, 5, 697. https://doi.org/10.3389/fpsyg.2014.00697

Ehrsson, H. H., Spence, C., & Passingham, R. E. (2004). That's my hand! Activity in premotor cortex reflects feeling of ownership of a limb. Science, 305(5685), 875-877


Frith, C. D., Blakemore, S. J., & Wolpert, D. M. (2000). Abnormalities in the awareness and control of action. Philosophical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Series B: Biological Sciences, 355(1404), 1771-1788.


McBride, J., Sumner, P., Jackson, S. R., Bajaj, N., & Husain, M. (2013). Exaggerated object affordance and absent automatic inhibition in alien hand syndrome. cortex, 49(8), 2040-2054.


Ocklenburg, S., Rüther, N., Peterburs, J., Pinnow, M., & Güntürkün, O. (2011). Laterality in the rubber hand illusion. Laterality, 16(2), 174-187.


Persaud, N., McLeod, P., & Cowey, A. (2007). Post-decision wagering objectively measures awareness. Nature neuroscience, 10(2), 257-261.


Ramachandran, V. S. (1995). Anosognosia in parietal lobe syndrome. Consciousness and cognition, 4(1), 22-51.


Ramachandran VS, Rogers-Ramachandran D.(1996). Denial of disabilities in anosognosia. Nature. 382(6591):501. doi: 10.1038/382501 a0. PMID: 8700222.

keyword
이전 05화사회적인 동물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