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이 삶에 관해 깊게 고민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우연과 필연이 겹쳐, 우리는 삶에 관한 비슷한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 우리 대부분은 삶의 의미를 손에 쥐는 순간에 삶 혹은 삶에 관한 경험이 이전에 비해 완전히 더 나은 차원으로 변화할 것을 꿈꾸며, 삶의 의미를 좇아 살아간다. 이처럼 서로 다른 사람이 비슷한 것을 믿는 현상은 우리가 삶의 의미와 그 효과가 실존한다고 믿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관한 추측이 그렇게나 오래되었음에도 여전히 삶의 의미를 찾아 그 효과를 누렸다는 사람이 나타난 적은 없다. 삶의 의미를 찾는 여정에 참여한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일에 의문을 갖고 인간에 관한 과학을 활용해, 우리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좇는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자 했다.
우선 이성이 합리적인 생각으로 사실을 성공적으로 추측해 내는 존재라는 편견부터 반박했다. 의식의 허점을 보여주는 리벳과 프리스, 웨그너의 연구를 통해 뇌와 의식에 관해 알아가며, 그것이 늘 합리적인 추측으로 사실을 밝혀내는 존재가 아니라, 제한된 정보를 처리해 편향된 결론을 내리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 즉 삶의 의미에 관한 우리의 추측이 우리의 대단한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서 꼭 사실일리는 없다고, 오히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다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관한 믿음에 영향을 주는 몇몇 뇌 기능, 혹은 뇌가 처리하는 정보에 관해 알아봤다. 우선 예측 그리고 감정에 관해 알아봤다. 우리는 감정을 이성과 함께, 불확실한 세상을 극복할 이정표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감정의 실체란 사실 무슨 상위 세계나 내 안의 가장 진실된 곳에서 전달된 신호나 이정표가 아니라, 뇌의 미래 예측 결과였다. 우리를 포함한 모든 동물은 살아남기 위해, 마주하게 될 보상 혹은 위험에 관한 예측을 만들어야 한다. 감정은 편도체와 보상회로의 활성화로 그 실체를 포착할 수 있는, 그러한 보상 혹은 위험에 관한 예측 신호 중 한 종류였다. 우리는 어디선가 오는 신호를 포착하고 그것을 감정적으로 경험하며, 그 진실된 신호를 좇아 삶의 의미를 탐구하는 존재라기 보단, 다른 동물과 같이 살아남기 위해서 자기 안에서 만들어진 예측, 즉 감정에 충실한 존재였다.
또 뇌의 동조 경향을 알아보며, 삶의 의미를 향한 감정과 동기가 자동적으로 공유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의 실체를 알아봤다. 신기하게도 삶의 의미에 관한 감정적인 경험이나 논리적인 믿음은 사람들 사이에 너무나 쉽게 공유된다. 이처럼 신체의 물리적인 분리에도 감정과 그 감정에서 나오는 동기, 믿음이 공유되는 현상은 마치 인간의 마음 혹은 영혼이 어떤 공통된 것을 좇고 있다는 추측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동조는 사회적인 동물의 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로, 우리 뇌는 자신이 아군이라고 여긴 타인의 표정, 행동 등에서 정보를 포착해 해당 타인의 뇌에서 일어나는 일을 똑같이 모방하고자 한다. 뇌 촬영에 의하면, 이와 같은 동조는 뇌에게 있어서 일종의 보상처럼 여겨질 가능성이 높은데, 실제로 이러한 동조나 모방은 사회적인 기능을 하며, 해당 개체와 사회가 존속하는데 기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뇌에서 동조나 모방이 일어나면 서로의 경험이나 믿음이 공유되고 이는 다시 서로가 아군임을 확인하는 근거가 되는 등 이처럼 결과적으로는 동조가 사회적인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정보의 실체나 근거를 꼼꼼히 따지지 않고도, 그 믿음이나 경험이 공유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더 쉽게 믿고 동조하며, 더 큰 무리를 형성하고 번영할 수 있었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실체를 확인하지도 않고 믿음을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번영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즉 정리하자면, 우리가 본 적도 없는 삶의 의미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강렬히 지지하는 이유는 우리가 사회적인 정보라면 그 실체나 근거를 꼼꼼히 따져보지 않고 믿어, 생존에 있어서 이득을 가져가려고 하는 존재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우리는 의식 밖에서 갑자기 나타난, 우리 안에서 만들어진 예측이나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감정을 경험하며, 해당 경험이 마치 더 나은 세계에서 온, 우리를 이끌어주는 무언가라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감정과 동조의 경험만으로는 더 상위 세계의 무언가에 관한 추측이 생기기에는 부족하다. 그 부족한 부분을 메꿔주는 것이 신체를 조종하는 신체와는 다른 존재, 즉 영혼에 관한 경험이다. 우리는 뇌의 인지, 집중, 기억, 의사결정, 신체 지도 최신화, 움직임 통제 등의 기능을 의식적으로 경험하며, 신체 안에서 기억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지하는 어떤 특별한 존재가 신체에 깃들어 신체를 소유하고 조종한다고 상상한다. 그렇게 신체와 분리되는 영혼의 존재를 추측하게 되는데, 이러한 추측에 감정과 동조의 경험이 합쳐지며, 영혼이라면 공통적으로 추구하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추측이 생기게 된다. 특히 몇몇 옛사람은 갑자기 경험하게 되는 영혼의 끌림에 충실했을 때 보상으로 만족감이 주어졌던 경험을 떠올리며, 영혼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완전히 손에 넣게 된다면, 영혼이 영원한 만족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고 영혼이 조종하는, 영혼보다 하위의 신체적인 삶 또한 완전해질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러한 추측은 동조하는 동물 사이에 빠르게 퍼졌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해당 사회의 구성원이 공통의 가치관을 추구하게끔 만들고 더 끈끈하게 협력하게 만들어 해당 사회가 더 강력한 사회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강력해진 집단은 다른 집단을 흡수하며 성장하고 존속했고, 그 사상 역시 그 집단의 수명만큼이나 긴 시간 유지되며 조금씩 내용이 바뀌거나, 다른 다양한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 영혼이 추구하는 그 무언가에 관한 이야기 중 하나가 바로 삶의 의미에 관한 이야기라고 추측한다. 영혼이 추구하는 무언가를 이뤄냄으로써 완전한 영혼과 완전한 삶을 이뤄낼 수 있다는 생각이 삶의 의미를 손에 넣으면 삶 혹은 삶에 관한 경험이 만족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생각과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옛사람 들은 뇌의 의식되지 않는 몇몇 기능으로 인한 결과만을 인지하며 그것을 영혼이나, 영혼의 끌림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 결과 삶을 지배할 무언가가 존재하며 그것을 향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상이 생겨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믿음의 근거가 되는 경험을 똑같이 경험하며 그 사상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또 어른의 말에 쉽게 동조하는 일을 반복하며, 어느새 그 사상을 깊게 믿게 되었다. 그래서 매번 존재하지도 않을, 삶을 지배할 삶의 목표라는 것을 좇는 일이 아주 오랜 기간 반복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같은 누군가는 왜 그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일까? 이처럼 여러 가지 일이 우리 대부분이 삶의 의미와 같은 존재를 믿고 좇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데 어떻게 누군가는 의심을 갖게 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그 이유가 사회의 변화에서부터 온다고 추측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산업화된 도시의 환경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만의 삶의 방식, 의미를 좇도록 한다. 그 결과, 좇을 삶의 의미에 관해 고민하다가 삶의 의미 그 자체가 정말로 존재하는지 의심하는 경우도 생긴다.
현대 사회와 우리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는 것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삶의 방식을 정해왔는지를 알아야 한다. 사회적인 동물은 보통 삶의 방식을 정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따르는 삶의 방식을 참고한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대다수를 참고하며, 삶의 의미를 찾고 그것을 좇으며 사는 방식을 자신의 삶의 방식으로 채택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 중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남은 소중한 삶(시간)을 어떻게 채워갈지를 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나 오랜 기간 고민하며 계획을 만들다 보면,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자하게 되고 또 행동을 미루느라 여러 보상을 놓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렇게 만든 나만의 답이 꼭 생각만큼의 보상을 가져다준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고민하지 않고,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삶의 방식을 생각해 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방법 중 하나가 타인의, 그것도 다수 혹은 주류가 따르는 삶의 방식을 참고하거나 동조하는 것이다. 다수가 공통적으로 특정 삶의 방식을 따른다는 것은, 해당 삶의 방식이 그것을 따르는 이들의 생존이나 번영에 성공적으로 기여했다는 뜻이다. 즉 해당 삶의 방식은 어느 정도의 결과를 보장한다. 따라서 굳이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너무 오랜 기간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보다, 다른 이를 참고하며 어느 정도 보장된 그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현실적인 의사결정 방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수를 따라 삶의 의미 혹은 목표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선택해 왔다.
특히 생존하거나 번영할 방법이 한정적이었던, 우리 사회가 적은 생산성을 갖던 시기에는 더욱 모방이 중요했다. 주류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지 않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그러나 점점 생산성이 개선되고 대부분에게 생존이 어느 정도 보장되기 시작하면서, 꼭 타인을 모방할 필요는 없어졌다. 더 나아가 기술이 발전이 우리 사회를 점점 더 빠른 주기로 바꾸기 시작하면서, 모방이 딱히 더 나은 선택지가 아니게 되었다. 반대로 발전한 현대 사회는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강요한다. 또 현대 사회에서는 자신이 소속된 집단이 있다는 생각을 느끼기 어려워지면서, 삶의 방식을 참고하고 모방할 만한 대상 자체가 지워졌다.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고, 딱히 모방할 방식도 주어지지 않는 어색한 환경에서 살아가야 한다.
점점 빨라지는 기술의 발전 주기와 그로 인해 변화가 잦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번 그 환경에 맞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고민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최소한 이전 세대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인은 직접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고민하게 되고, 그 삶의 방식을 정하기 위해 삶을 돌아보고, 삶의 최종 목표이자 최고 목표인 삶의 의미 혹은 목표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삶에 관한 고민은 환경 분석을 통한 합리적인 판단보단 사회적인 압박이 주된 원인이 되어 생긴다. 즉 우리는 환경을 분석하며 이성적인 고민 끝에 자신만의 삶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보장해 주는 모방할만한 삶이 없어서 자신만의 삶을 고민하게 된다.
특히 삶을 보장해 준다는 측면에 있어서 우리가 주로 모방하게 되는 삶의 요소란, 보통 직업이다. 즉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가 직업 혹은 직업 생활이며, 따라서 우리가 주로 모방해 왔던 삶의 방식 역시 직업과 깊게 관련이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환경은 하나의 직업을 평생 보장해주지 않는 환경이다. 주변 어른의 특정 직업 생활을 모방한다고 해서 취업과 커리어 유지가 보장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는 현대 사회의 불투명한 직업 생활을 마주하며, 자신만의 직업 생활을 고민하게 되고 더 나아가 직업 생활을 선택하는데 영향을 줄 삶과 삶의 목표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게다가 이처럼 근로자가 환경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고 변화해야 하는 산업 환경은 교육 환경과 근로 환경을 변화시키며, 결과적으로 우리를 고립시킨다. 우리는 변화한 배움터와 일터를 경험하며, 우리가 소속된 집단의 존재를 이전보다 더 희미하게 느낀다. 우선 변화한 배움터를 살펴보자. 변화가 많은 지금의 산업 환경은 환경을 분석해 환경의 구성 요소를 파악하고 해당 요소에 변화가 있을 때에는, 새롭게 데이터를 모와 새로운 규칙에 관한 가설을 만들고 검증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근로자를 필요로 한다. 반대로 그러한 역량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발전한 기술이 탑재된 기계보다 생산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와 같은 인재를 기르기 위해 현대 교육 환경은 이전과 달라지고 있다. 이러한 역량을 지니기 위해서는 특정 분야의 전문적인 지식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해당 지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볼 수 있는 능력까지 필요한데, 보통 이러한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고등교육 이상이 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현대 교육 환경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고등 교육 이상을 이수하기 위해 아주 긴 기간, 교육받는다. 쉽게 말해, 석사 이상이 넘쳐나는 사회가 되어야 첨단 산업이 꽃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배움 환경은 우리에게 매우 이례적인 것이다. 사회에 기여하는 분업의 한 축, 직업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해서 3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이례적이다. 이러한 이례적인 일에 적응하고자 한 결과, 생존과 번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에 관한 우선순위가 바뀌게 되었다. 즉 현대인은 현대 교육을 거쳐 한 사람의 근로자가 되어가며, 인간관계보다 커리어를 더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현대 산업 환경에 성공적으로 적응하고 생산성 있는 근로자가 되기 위해서는 긴 기간, 치열하게 자신의 역량을 개발해야 한다. 그렇게 역량 개발에만 집중하는 일을 반복하며, 역량과 그것을 개발하기 위한 시간은 더욱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고 그 외의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곤 한다. 즉 우리는 공부하고 취업 준비하느라, 친구와 놀고 떠드는 시간을 소모적이거나 생산성이 낮다고 여기곤 한다. 우리의 생물학적으로 매우 가까운 다른 유인원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로의 털을 가꿔주고 신뢰를 확인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그렇게 우리는 과거와 달리 관계나 집단을 형성하는 것의 중요성을 덜 느끼게 되고, 그러한 일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집단을 형성하거나 소속되어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을 자신이 속한 집단으로 정의하는 일이 적어진다. 그리고 이 때문에 긴 시간 살아갈 방법을 알려줬던, 소속된 집단의 주류, 존경할만한 어른 역시도 사라지게 된다.
빠른 기술 발전을 반영한 일터 또한 우리를 분리한다. 우리는 사람보다는 기계와 일하게 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서로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적어졌다. 이전 제조업 시대나 농업 시대의 업무 환경은 같이 물리적으로 붙어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업무 환경에서는 컴퓨터를 통해 서로 얼굴을 마주 하지 않고도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다. 그 결과, 같은 무리에 소속되어 함께 일한다고 느낄만한 경험이 점점 적어지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에게 요구되는 역량이 달라지며, 이전 세대를 모방하고 따르는 일 또한 없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더욱 서로 함께 일하는 하나의 집단이라는 감각을 느끼기 힘들어진다. 결국 현대인은 자신이 배우고 모방할 어떤 집단에 속해있다고 느끼지 않고, 때문에 삶에 관한 선택을 내리는 데 있어서 모방이나 동조라는 방식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된다.
긴 기간,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가장 효율적인 방식 중 하나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이전 세대의 삶의 방식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전 세대를 따라 삶의 의미나 목표를 구상하고 그것을 좇아 사는 방식이 매우 당연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전과 다른 현대 환경은 우리가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감각을 줄여, 우리가 모방하거나 참고할만한 대상 자체를 찾기 어렵게 만든다. 또 살면서 직장 혹은 직업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현대 환경에서는 하나의 직장 혹은 직업을 갖던 시기에 비해 참고하거나 모방할 수 있는 대상 자체가 적다. 변화가 잦은 이러한 환경 속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답을 찾고자 누군가를 모방하기보다는 자신만의 추구할 바를 고민하는 것이 더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즉 현대 사회는 우리가 자신만의 삶의 방식을 만들기 위해 삶에 관해 깊게 고민하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삶에 관한 고민의 무게가 오직 나에게만 더 무거운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삶을 통제하기 위해 삶의 의미 혹은 목표를 좇는 일에 의문을 갖는 이 역시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변화가 잦은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전과 달리 삶에 관해 더 깊게 고민해야만 하고 삶의 의미를 좇는 일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의 목표에 관한 고민의 어떻게 나왔는지에 관해 다뤄보며, 그러한 고민의 필요성을 얘기해 봤다. 현대 환경은 우리가 삶의 방식을 정하는 데 있어서, 자신만의 답을 갖추도록 강요한다. 따라서 현대인 대다수는 삶과 삶의 의미에 관해 깊게 고민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다음은 본격적으로 이전과 다른, 삶에 관한 접근에 관해 다뤄보고자 한다. 그렇기 위해서 삶의 목표 혹은 의미의 기능과 밀접한 기능을 갖는 뇌의 예측 기능과 학습 기능을 다뤄볼 것이다.